◀ 서로가 서로에게 | Learn to Wear Each Other Well (3/4)





마이크로프트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이 바뀌었다고 설명해야겠다 마음먹으며 레스트라드가 핸드폰을 꼭 움켜쥐던 찰나, 벨이 울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뭐가 씌었기에 마이크로프트처럼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의 자유 시간 상당 분량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지 레스트라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레스트라드가 플랫에 누군가를 데려온 것도 말 그대로 몇 년은 족히 지났다는 걸 갑자기 깨달아버린 탓이기도 했다.

그가 들어서는 순간 불현듯, 나섰을 때보다도 플랫이 훨씬 더 작아보였다 - 좁아터지겠다는 쪽에 가깝겠다 - 는 것도 문제였다. 소파의 해진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오고 벽에 남은 흠집들이 더 진해보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싱크대에 놓인 설거지거리는 어쩐지 더 늘어난 것만 같았다. 게다가 냉장고를 열었을 때 보이는 거라고는 묵은 빵 쪼가리들 몇 개에 당황스러우리만치 오래된 포장음식 상자들 뿐이었다.

그래서 레스트라드가 문을 열었을 때에는, 황급히 설거지를 하고 조리대의 작은 선반에 말려두느라 두 손이 축축하게 젖은데다 북북 문질러서 붉어져 있었던 거다. 많이 빨아 물빠진 스웨터에 낡았지만 제일 좋아하는 바지를 입고도 문득 너무 초라한 차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금 열일곱 소년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침실로 초대하는 것만 같은 상황이라 해야 할까.

“안녕하세요,” 레스트라드는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라드의 불안함 따위는 완전 헛방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대답하며 문지방을 넘어 들어섰다.

마이크로프트는 예의 그 쓰리피스 정장이 아닌, 말쑥한 바지에 빳빳한 셔츠 차림이었다. 레스트라드의 퍽 쓸만한 관찰력은 그의 가죽 구두가 고급에 고가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흠집도 있고 가장자리가 무던하게 닳아있기도 하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심지어 우산까지 놓고 온 게 아닌가.

간편한 차림의 마이크로프트라니, 조금은 어색했다.

“들어와요,” 레스트라드는 조금 다급하게, 살짝 소리높여 뒤늦게 한마디 던졌다. 그는 문을 닫고는, 바지 허벅지에 두 손을 문대어 닦으며 성큼성큼 부엌으로 들어섰다. “와줘서 고마워요. 집에서는 뭘 챙겨먹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마실 것 정도는 좀 있을 - ”

그의 어깨에 마이크로프트의 손이 가볍게 얹혔다.
 
따라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레스트라드가 조금 놀라며 돌아보자, 마이크로프트가 서 있었다. 차에서의 그때를 제외하면 어느때보다도 더 가까이 마주서 있는 거였다. 찰나의 순간 레스트라드의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은, 마이크로프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이었다. 어깨가 넓기도 했고. 더 탄탄한 체격이기도.

“당신, 꽤나 힘든 하루를 보낸 것 같군요.” 마이크로프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스트라드는 비웃음과 신경질적인 쓴웃음이 한데 섞인 소리를 뱉어냈다. “그건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갸웃, 하며 대답했다. “당신 걸음걸이가 약간 흔들리는걸 보면, 등이나 목, 어깨가 일부 굳었거나 아프다는 뜻일 겁니다. 정도가 약하니 부상을 입었다기보다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걸 의미하겠구요. 눈가에 다크써클은,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피로를 뜻하죠. 아마 며칠 연속으로 밤을 새웠겠네요. 당신 교대가 끝나야 할 시간에서 거의 세 시간이나 지났는데, 당신 열쇠나 가방이 부엌 테이블에 그대로 올려져 있는 걸 보면 막 도착한 게 분명합니다. 과로, 피로감에다 당신 직업에 대해 내가 아는 바를 비추어 보면, 당신이 지난 며칠간 까다로운 사건에 매달려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죠.”

레스트라드는 눈만 깜박거리고 있다가, “정확하네요.” 멍하니 시인했다.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마이크로프트는 어깨에 얹었던 손을 올려 레스트라드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난, 지금 당신 집에 와 있죠, 당신이 와 달라고 했으니까. 필시, 작지는 않은 의미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레스트라드는 그날 내내 꾹꾹 눌러왔던 좌절감을 담아 천천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눈을 감는 모습에, 마이크로프트는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거라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는 반대쪽 손으로 레스트라드의 목덜미를 감싸쥐고는 살갗 아래 뭉친 근육을 손가락으로 주물러주었다.

“정말 지독한 하루였어요.” 레스트라드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지독한.”





마이크로프트는 말을 꺼냈다. “일단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음식을 주문하는 거겠는데요, 당신만 허락해준다면.”

레스트라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마이크로프트는 메뉴를 골랐고, 30분 후 둘은 용기에 담긴 세사미치킨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얼마나 잘 먹어치웠는지로 말할 것 같으면, 레스트라드가 기억해낼 수 있는 한에서는 최고의 포장 음식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뱃속을 채운 따뜻한 뭔가가 미해결 살인사건으로 억눌려 있던 두려움마저도 녹여줄 만큼 오래 지속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가 환상이나 일탈처럼 보이는 게 조금 덜해진다거나, 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되는 데에도 일조해 주었다.

커피 테이블 위, 사무실에서 집까지 들고온 일 더미 사이로 무릎 위에 얹어둔 용기를 놓을 곳을 찾으면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불편하다기보다는 사뭇 다정하게도 느껴졌다. 가끔씩 음료를 향해 동시에 손을 뻗을 땐 서로의 손마디가 부딪히기도 했고.

마이크로프트는 마지막 한 입까지 마무리하고 작게 만족스러운 흐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레스트라드 쪽으로 돌아앉으며 소파를 따라 한 팔을 뻗으며, “그래서,” 말을 꺼냈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가요, 아니면 다른 주제가 나을까요?”

레스트라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건에 대해서는 별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알아냈지만, 누구인지가 문제라서요. 그러니, 솔직히 말하면 그거 없인 나머지는 그닥 쓸모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당신 동생이 살펴보고 있으니 화요일 전까지는 완전히 정신나간 해결책이라도 제 앞에 가져다주길, 그리고 그게 옳다고 밝혀지기만을 바랄 뿐이죠.”

“그런 방면이라면 그애도 쓸만할 겁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대답하며 히죽,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에서 살짝 애정이 묻어났다.

맥주캔들이 테이블 위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레스트라드는 가볍게 올라오는 취기와 함께 마이크로프트의 팔이 거의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다시피 하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사실상 껴안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즐거운 만큼이나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레스트라드는 온 몸을 타고 기분 좋게 온기가 전해지는 걸 느꼈다. 배 아랫쪽으로 모여드는 은근한 열기도.

“당신 일과에 대해서 마음 편히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죠?”

“할 수야 있지만, 그랬다간 당신을 제거해야 할 걸요.”

레스트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우울하군요, 그건.”

마이크로프트는 소리내어 웃더니, 너무나도 부드럽게 - 레스트라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등받이에서 팔을 내려 레스트라드를 감쌌다.[각주:1] “내 경험상으로는, 그래요, 실제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나지만은 않더군요.”

“으음, 신호등 프로그래밍하는 게 전부 아니었던가요. 그럼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저에 대해서라면 당신이 다 알잖습니까.”

“내가 그런가요?” 마이크로프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번에는 레스트라드가 비웃어줄 차례였고, 온 플랫과 그의 행동 반경을 다 아우르듯 한 손을 휘저어보이며 그렇게 했다. “당신이라면 내 모든 뒷조사를 다 할 사람을 붙여두었고도 남는다는 걸, 내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주었음 좋겠군요. 이미 출력해서 당신 책상까지 전해받은 것들 외엔 내가 한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군요.” 마이크로프트는 대답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하는 듯 했다. 자신이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는 듯 손가락으로는 무심코 레스트라드의 스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서류와 실제 그 사람이 현저하게 차이나더군요. 사람은 읽어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레스트라드는 고개를 돌려 마이크로프트를 마주보았다. “정말이지 당신다운 칭찬이로군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마이크로프트의 뺨이 확 붉어졌다. “당신에 대한 거라면 꽤나 많이 읊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겠죠.”

갑자기 방이 원래 크기보다도 더 작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 주위로 벽이 좁혀지기라도 한 건지, 레스트라드는 마이크로프트 외에 다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라드가 상상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미남도 아니고, 중요하고도 사적인 곳에서조차도 손끝 하나 댈 엄두조차 나지 않을, 그런 사람.

하지만 지금 레스트라드의 소파에 앉아 있는, 레스트라드가 부르자 와 준 사람이기도 했다. 무언가 있었다. 레스트라드가 이제껏 일하고, 살아왔던 내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만약 제가 이야기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침대로 데려가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레스트라드는 물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마이크로프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죠.”





레스트라드의 침대는, 이혼한 후에도 치워버리거나 바꾸지 않은 살림살이 중 하나였기에 그대로 2인용이었다. 그는 조금 이상한 건 아닐까, 잠시 생각도 해봤지만 곧바로 넘겨버리기로 했다. 그에게 침대라고는 이거 하나뿐인데다, 다른데서 섹스를 하겠답시고 야단을 떨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제일 최근에 했던 섹스는 알콜 기운에 흠뻑 취한 어색한 상황에다 절망과 고독에 찌든 경험이었고, 어째서인지 외로움을 더는데는 눈꼽만큼도 도움이 되어주지 않았었다. 어깻죽지 한가운데를 타고 느껴지는 마이크로프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받으며 옷을 벗고 있는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될 것 같긴 하지만, 또다시 다른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게 뭔가 의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있었던 일을 아예 없었던 척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마이크로프트는 침대 발치에 앉아 단정하게 셔츠 단추를 풀어내고는 신발을 끌렀다. 그는, 레스트라드가 기대했음직한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레스트라드는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었으니까.

처음으로 키스하는 순간, 레스트라드는 속옷 차림으로 아직 바지를 입고 있던 마이크로프트의 다리에 기대어 서서, 그의 목을 두 팔로 느슨하게 감싸안았다. 차 안에서의 그 밤 이후 조금은 익숙하게도 느껴지던 그의 키스는, 불현듯 전보다도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좀더 세심하지만, 망설임은 줄어들었달까. 마이크로프트는 두 손으로 레스트라드의 허리를 위아래로 어루만지더니, 마침내는 속옷의 밴드를 힘주어 밀어내어 바닥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두 사람 다 젊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사실, 둘 다 젊은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자극적이고도 격정적인 날들은 이미 가고 없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치, 그들에게 천천히 해나갈 여유를 더 주기라도 한 것처럼. 마이크로프트는 키스를 이어가는 동안 자신의 바지를 벗어던지더니, 레스트라드의 침대로 들어갔다.

아침에 절대 정돈해두는 법이 없는 그였기에, 침대 시트는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그래도 안락한 만큼 그렇게까지 지저분해보인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레스트라드는 늘 완벽하게 침착만을 유지하던 마이크로프트의 조금 풀어진 모습을 보는 게 꽤나 마음에 들기도 했다.

레스트라드는 아무렇게나 구겨진 시트 위, 마이크로프트에게 몸을 맞대고 누워 그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직도 전,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하지 말아요.” 마이크로프트는 레스트라드의 허리에 손을 얹어 가까이 끌어안으며 충고하듯 대답했다.

세상이 온통 뒤흔들릴 만큼 놀라운 건 아니었다. 섹스라는 건 그저 친밀감을 조금 더해줄 뿐이었고, 레스트라드는 이미 살면서 충분히 겪어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았다. 자신의 허리와 팔, 그곳에 누군가의 손이 와닿는 게 미칠듯이 좋았던 거다. 뺨을 스치는 다른 사람의 숨결, 다른 사람의 체취, 작게 헐떡이는 소리. 낯설지만 달콤한 그 느낌이 늘 부족했었다.

온전히 느껴지는 편안함 덕에, 레스트라드는 스스로보다 마이크로프트에게 더욱, 한껏 집중할 수 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밖에서나 다름없이 침대에서도 세심하고도 깐깐했지만, 그런 그에게서 손가락이나 혀로 신음소리를 이끌어내고 마는 놀라운 순간들도 있었다. 그리고 레스트라드는, 그런 순간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격정의 순간이 지나간 후, 레스트라드는 한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서로의 몸을 덮었다. 그는 한 팔을 베개 아래 괴고 모로 누워, 옆에서 기지개 켜는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마음 내키면 있어도 됩니다.”[각주:2]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있어주면 좋겠구요.”[각주:3] 

씩, 웃는 마이크로프트의 미소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그래요?”

“그래요.”

“좋습니다.” 마이크로프트의 대답. “이리 와요.” 





레스트라드는 하수구 바닥에서 기어올라오기라도 하듯 잠에서 깨어나, 이른 새벽녘의 쌀쌀하고 희뿌연 빛살에 눈을 깜박였다. 그는 몸을 꿈지럭거리며 작게 한숨 한번 휴, 내쉬고는 본능적으로 이불 아래 따스한 구석으로 돌아 파고들었다.

“경위,” 누군가의 말소리. 흐리멍덩한 머리로, 잠시 지나서야 그 목소리가 마이크로프트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어 되돌아오는 지난 밤의 기억들에, 그는 조금 더 잠이 깨는 걸 느끼며 눈을 깜박여 보았다. 바지와 손목을 다 채우지 못한 셔츠 차림의 마이크로프트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살짝 옆으로 쏠려 흐트러진 채였다. 레스트라드 생각엔 그나마도 저게 어느 정도 매만진 것 같긴 했지만.

“경위라.” 레스트라드는 하품 섞인 거칠어진 목소리로 따라 말해보았다. “당신이 그런 호칭을 고수할 줄은 몰랐는데요.”

마이크로프트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난 의외인 구석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그러나 곧바로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살짝 스쳐간다. “가봐야겠습니다.” 그는 핸드폰을 든 손을 들어보였다. 화면에는 뭔가 엄청나게 중요해보이는 - 그 하나하나가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경고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 불빛들이 수도 없이 반짝여대고 있었다. 

“일이군요.” 레스트라드는 한마디 하고는 바로 돌아누우며 긴장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시계를 흘끔 바라보고는 이르디 이른 시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시,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밤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건 물론이거니와, 아침에 일어났다고 하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할 일이 있어서요.” 마이크로프트는 시인하듯 대답했다. “텅빈 침대에서 당신 혼자 깨게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레스트라드는 작게 웃었고, 불현듯 자신이 이불 아래 속옷 한장만 달랑 입고 있는데다 욱신거린다는 걸 제대로, 확실하게 의식하고 말았다. 익숙하고도 기분 좋은 쪽으로 그런 거지만. “매우 신사적이시군요. 가보시죠, 세상을 구하셔야잖습니까.”

마이크로프트는 일순 미적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몸을 숙여 레스트라드에게 키스해주었다. 놀랐던 레스트라드의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오래. 그리고는 일어나 코트를 걸치더니, 문가에서 잠시 멈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떠났다.

레스트라드는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서는, 곧바로 다시 잠들었다.





레스트라드가 다시 잠에서 깨어난 건, 귓가에서 끈질기게 울려대는 벨소리에다 침대 머리맡 테이블이 드륵드륵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끙, 앓는 소리를 뱉어내며 레스트라드는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단단한 플라스틱을 찾았고, 곧바로 문제의 물건을 충전기에서 뽑아내서 벨소리가 멈추고 전화가 연결될 때까지 쳐다볼 생각도 않고 버튼부터 눌러댔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는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모로 돌아누웠다. 마이크로프트가 침대 옆에 있을 때에는 기분 좋게 욱신거리던 것이, 안 쓰던 근육이라 그런지 이제는 한층 확실하게 저릿한 아픔으로 남았다.

“당신 사건, 내가 해결했습니다.” 성마르게 대꾸하는 셜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거?”

셜록은 철저하게 혐오감 잔뜩 담긴 소리로 응수했다. “살해된 여자 말입니다, 레스트라드. 우리가 지난 주 내내 매달려 있던 그 사건요.”

레스트라드는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허벅지에 팔꿈치를 괸 채로 웅크려 앉았다. 그는 가슴이 조금 뛰기 시작하는 걸 모른척했다. 셜록이 깔끔하게 논리적으로 마무리지어진 해결책을 들고 올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었으니까. 사건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상관 없이, 계속. “말해봐.”

“피해자는 늘 애니 레넌이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셜록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여자, 전에는 도로시 레넌이었던 거죠. 하지만 여자 때문에 남자친구를 버리고 떠나는 바람에 남자가 스토커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이름을 바꾸었던 겁니다.”

셜록이 사건의 정황을 설명해내는 데까지는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0대 때 만났지만, 강한 소유욕에 폭력성까지 보이기 시작했던 남자친구 때문에 피해자가 이름을 바꾸고 집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던 것부터, 그 남자가 말단 공무원이었던 - 컴퓨터 쪽으로 소질이 있긴 하지만 열람해선 안될 것들까지 손대고 만 - 사촌을 통해 그녀를 뒤쫓아갔던 방법까지도. 

“그 남자라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건가?” 레스트라드는 물었다. “다 우연의 일치인 셈이잖나.”

“지난 5년 내내 이곳저곳에서 정원 관리하는 일을 했더군요.” 셜록이 대답했다. “그 덕분에 2층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손에 넣었고, 열쇠가 없어졌을 때 들어갈 수 있게 된겁니다. 목 정도는 가뿐하게 베어낼 만한 여러 흉기들도 마찬가지겠구요.”

레스트라드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혼자 미소지었다. “알았네, 심문할 수 있게 잡아들이도록 하지.”





레스트라드가 야드에 도착했을 때, 한가득 미소에다 뺨에는 홍조까지 띤 도노반이 달려오는 바람에 문 안쪽으로 들어서지도 못할 뻔했다. “그놈 튀더라구요!” 그녀는 두 손을 비벼대며 탄성을 질렀지만, “우리가 잡아왔어요.” 레스트라드의 얼굴에 떠오른 조용한 분노를 알아채고는 곧바로 한마디 덧붙였다. “하수도에 처박았어요. 그런데도 튀는데, 뭐 시인하는 거나 다름없다 싶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레스트라드는 씨익 웃었다. “그렇네, 좀 수상쩍군. 셜록은 여기 있나?”

도노반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레스트라드의 사무실 쪽으로 턱짓을 해보인다. “왓슨 선생이랑 저기 가둬놨어요. 경위님 오셔서 특별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용의자랑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일러뒀구요.” 

그녀는 조금은 희망어린 듯한 기색이었다. 언젠가는 저 셜록을, 레스트라드가 경찰 조사를 방해했다는 준엄한 꾸짖음과 함께 경찰 업무에서 치워버리지 않을까 하는 환상이라도 키우고 있는 것처럼. 그러기에는 셜록이 지독하게 유용하긴 하지만, 레스트라드는 그녀의 입장을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고마워.” 그는 대답했다. “내가 가보도록 하지.”

셜록은 레스트라드의 사무실에서 창문부터 벽까지, 돌아설 때마다 드라마틱하게 코트를 휘날리며 왔다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존은 의자 하나에 자리잡고 앉아서 무언가 살짝 찡그린 것 같은 표정으로 셜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레스트라드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 모두 그를 바라보았고, 셜록은 휙 돌아서서 상처입은 가젤을 목표로 삼은 사자처럼 달려들었다. 

“저놈, 내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빨리 불게 할 수 있어요.” 셜록은 바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순간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향수 바꿨습니까?”

하던 말과 질문이 완전히 다른데다 앞뒤도 전혀 맞지 않아, 레스트라드는 잠시 후에야 그 둘을 따로따로 이해하고 대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을 거란 건 알지만, 절차란 게 있잖나. 그리고 아니, 안 바꿨는데 그게 무슨 관계라도 있는건가?”

셜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없습니다.” 대꾸했다. “상관없잖아요, 절차라는 건 보통 정의를 실현하는데 방해만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게 10분만 주시죠.”

레스트라드가 바보는 아닌지라,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벌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의 구현에 대한 게 더 긴급한 사안이고, 결국에는 취조실에 셜록을 데리고 들어가게 될 거라는 사실만큼은 동의할 수 있었다.

존이 지적해주었다시피, 셜록이 남자로 하여금 살인죄를 자백하게 하는 데까지는 7분 걸렸다.





살인범을 체포하고 처리가 끝나 자신의 손을 떠난 다음, 레스트라드는 사무실로 돌아와 피해자의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는 전화를 붙든 채 15분간 자리에 앉아 그녀가 울먹이면서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 답해주었고, 누군가 그에게 잘했다고 말해줄 때면 늘 걸리던 불편함을 느끼며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받았다. 정말 잘한 거였다면 살인사건 자체가 아예 없었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탈진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지만, 내심 이정도면 됐다 싶기도 했다. 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져두고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일에서 진짜 이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문에서 들려오는 무딘 노크소리에 고개를 휙 쳐들었을 때, 그는 유리벽 너머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서 있는 셜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스트라드는 살짝 찡그리며 그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이고는, 잠시 몸을 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또다른 하루, 또다시 싸움, 뭐 그런 식이다.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금 이게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야겠지.

“도와줄 일이라도?” 레스트라드는 물었다. 

셜록은, 레스트라드가 책상 맞은편에 준비해둔 두 개의 의자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섰다. 레스트라드가 이제껏 보아왔던 것 중 가장 모호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로. 

꽤나 오랫동안, 셜록은 순전히 의지 하나만으로 레스트라드를 밖에서부터 샅샅이 해부라도 하려는 것처럼 레스트라드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스트라드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꿈지럭거린다거나, 자켓이나 바지를 만지작거린다거나,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들겨대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당신에게서 형 향수 냄새가 납니다.”[각주:4] 마침내 셜록은 차분하지만 조금 껄끄러운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형이 존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똑같이 찾아갔으리라고 추정은 했었죠. 내 형은 어리석지도 않고, 우리의 유대관계는 미묘한 구석이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에게서 형 냄새가 날 이유까지는 없잖습니까.”

레스트라드는 거의,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어버릴 뻔 했다. 

대신에, 셜록 앞에서 대놓고 낄낄거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리는 걸 느끼며 그는 의자에 뒤로 기대어 깍지낀 손을 배에 얹었다. 지금이 바로 재고해 봐야 할 순간인지, 온 몸의 통증까지도 심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터무니없는 기분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떨쳐버렸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그게 자네와는 무슨 상관이지?”

셜록은 강력하기 그지없는 레몬이라도 꿀떡 삼킨 것마냥 얼굴을 구겼다. “내 이니까요.”

“자네는 아니고.” 레스트라드는 고개를 까딱해보이며 대꾸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자네가 물어보지 않는 걸 보면 정말 알고 싶은 건지도 의문인걸.”

셜록은 맹렬하고도 좌절 섞인 신음소리를 내긴 했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대신에 레스트라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셜록의 얼굴에는 레스트라드가 그를 알고 지낸 몇 년간 봐왔던 것보다도 더 많은 감정들이 스쳐지나갔다. 충격, 그랬다. 무성생물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제 형제를 상상하면서 겪게 된 숨죽인 경악과 함께, 여전히 날선 특유의 호기심까지. 어쩌면, 셜록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을 완전 비논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느낌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보통 ‘그사람 눈물나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나게 해줄 줄 알아.’[각주:5] 정도로 넘기곤 하던데.”

넌지시 건넨 레스트라드의 말에 셜록은 흥, 코웃음을 쳤다.

“마이크로프트라면 자기가 알아서 그러고도 남을 거라 봅니다만.”

“그건 그렇지. 그럼 왜 신경쓰는 건가?”

“당신이니까 그렇죠!” 셜록은 짜증섞인 투로 버럭, 쏘아붙였다. “당신은 레스트라드고, 상대는 내 형이잖습니까. 용납할 수 없습니다.”

“꺼져주시지 그래.” 레스트라드는 쾌활하게 대꾸했다. 셜록은 안절부절 못할 때 자신이 이만큼이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기분이 든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다, 그는 이 상황이 정상적이라거나 건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보다도 조금 더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봐, 그건 자네 일이 아냐. 자네 입장에선 형과 친해지려 드는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썩 잘 될 것 같진 않고. 그리고 혹시나 그렇게 생각할까봐 하는 말이지만, 자네와 관련된 건 아니라네. 처음에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안 그런지도 꽤 됐거든.”

파르르 떨리던 셜록의 얼굴이 방금 들은 정보 때문에 치명적인 과부하라거나 논리적 단절 사태가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더니 입을 딱 다물어버리고는, 레스트라드 생각에는 삐졌다고 하는 게 딱 맞을 법한 상태로 돌입했다.

“허락하기에는 너무 이상하다구요.” 그릉, 투덜거리는 그의 말투에서 레스트라드는 자신의 승리를 직감했다.

“그런데 잠깐, 처음이라구요? 이거 얼마나 된 겁니까?”





30분 내내 쏟아지는 셜록의 질문 공세에 짐짓 정중하게 답변을 해 주고 나자, 존이 묻고 싶은게 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커피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셜록의 팔을 붙들고는 일으켜 세웠고, 셜록의 폭탄 선언에 잠시 아무 말 못하고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기만 했다.

“마이크로프트라니, 정말입니까?” 존은 물었다. “당신 타입인 것 같진 않던데요.”

레스트라드는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셜록이란 인간을 생각해보면, 존에게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 중 어느 쪽이 좋겠느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서도.[각주:6] 군자는 위험한 곳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각주:7]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다. 기꺼이 형과 치고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셜록이니만큼, 저 인간을 설득해서 레스트라드에게로 쏟아질 질문을 마이크로프트에게로 돌려 줄 수 있을 사람이라고는 존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핸드폰을 꺼내어 주소록을 뒤적였다.

벨이 세번 울리고 마이크로프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바쁘십니까?”

“당장은 아닙니다. 무슨일 있어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의 목소리가 불현듯 놀랍도록 익숙하게 느껴졌다.

레스트라드는 고개를 젖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싱긋 미소지었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오늘 밤에 셜록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경고 정도는 해주고 싶어서요.”



+)
바빠! 바쁘다고! 아침저녁으로 엄살을 부리면서도 절대 덕질 셜록에서 손을 놓을 수 없는 건
이 귀엽고 냉정하고 소심하고 제멋대로인 캐릭터들이 좋아서 그렇다.
시누이 노릇까지 다 해주는 말썽꾸러기 셜로기나, 제눈에 콩깍지 안경 존도 귀엽지만  
화끈하면서도 다정돋는 남자 마형님, 경탄하다가도 이죽거리는 레경위님이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그러니까 부디 다음 시즌에서는 둘이 만나게 해주… 쿨럭;; : ]



  1. 저… 전문가의 손길! [본문으로]
  2. “You can stay if you'd like,” - 정중하게, 에둘러서 말문을 열었지만 핵심은! [본문으로]
  3. “I would like it if you stayed.” - …참 이 아찌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_-* [본문으로]
  4. “You smell of my brother's cologne,” -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를 느꼈… 이건 아니고;;; [본문으로]
  5. ‘if you break his heart, I'll break your legs,’ - break를 중의적으로 활용한 말이라 느낌 살려서 의역한다. [본문으로]
  6. ‘He feels like he ought to ask John whether he wants to be the pot or kettle’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정도의 관용구인 ‘The pot calls the kettle black’을 토대로 한 말장난. ‘셜록과 사귀는 님이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잖소’ 하고 대꾸해주고픈 레스트라드의 까칠함이 엿보이는 생각이라 귀엽다 XD [본문으로]
  7. ‘discretion is the better part of valor.’ - 역시 관용구. 대뜸 덤비기보다 신중한게 좋다는 의미.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