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저녁 | You Can Imagine the Christmas Dinners (6/8)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존은 살짝 거슬리는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밤 내내 끊임없이 채워지던 셰리주 덕분이겠지. 더 아픈 것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가능한 한 꼼짝하지 않으려 애써도 보았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일텐데 지금 당장 일어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특히 그게 문제의 홈즈 가족들을 다시 마주한다는 의미일 때는 더더욱 그렇겠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 사람, 순식간에 존재만으로도 골치아파지게 된 그 남자 말이다. 게다가 침대가 따뜻하고 고즈넉한데다, 그의 몸 위로 나른하게 턱 걸쳐진 다리는 물론 턱과 어깨 사이로 파고든 코끝이 보드랍기도 하니-

존은 조심스레 한쪽 눈을 떠 보았다.

셜록이 잠결에 침대를 가로질러 움직였는지, 큰 대자로 드라마틱하게 뻗어 있었다. 제멋대로 자리를 몽땅 차지하면 안된다는 생각따위, 의식 없는 저 인간의 머릿속에는 털끝만큼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아니지, 존은 생각했다 - 셜록이 자신을 절반이나 덮고 누워있는 것 뿐만 아니라, 소유욕을 과시라도 하듯 손가락으로는 존의 허리께를 꽉 그러쥐고 있으니 말이다 - 의식 없는 저 인간의 머리는 제멋대로 자리만 차지한 게 아니라, 필요한 모든 걸 차지한 셈이었다. 그는 졸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아직 셜록을 깨우지 않게끔 숨소리를 고르게 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순간이 찾아왔을 때 한껏 즐기는 게 좋잖아, 존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이지, 무척, 너무나도 편안했다…

그는 한 팔로 셜록을 감싸안으며 짙은색 고수머리에 손을 묻었고,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셜록은 없었다.

그는 끙, 신음소리와 함께 간밤 내내 뭉쳐 아픈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저쪽 온도로 미루어 볼 때, 셜록이 자리를 뜬 지도 꽤 된 모양이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서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었고, 아랫층에서 돌아다니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는 침대에서 나와, 문에 걸려 있던 플러시 가운을 집어 걸치고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넣었다. 문자가 두개 와 있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마이크 스탬포드의 문자와, 겨우살이 아래에서 셜록에게 찐하게 키스하는 건 아직이냐고 묻는 해리의 문자다. 어젯밤 찐한 키스에 대한 답장이라니, 자신이 제대로 망쳐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잘만 되어가고 있었다는 걸 떠올리자 휴, 한숨만 나오는 존이었다.

이 집 어딘가에 완전 진하게 내린 커피같은 게 있어준다면 좋을 테다. 셜록이 한 잔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는 바람따위 가져봐야 소용 없겠지; 그 인간이라면 삐져서 집안 어느 구석엔가 처박혀 있거나, 아니면 어머니 타도 계획이나 짜고 있을 테니[각주:1] 말이다. 물론 셜록이 커피란 걸 탈 리도 없고.

거실에는 마이크로프트가 앉아 있었다. 어젯밤에 있던 바로 그 자리 그대로였지만, 지금은 검정색 실크 가운 차림에다 무릎 위엔 신문을 올려둔 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밤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 없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단정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붙어앉은 홀리는 누가 봐도 확연할 정도로 안색이 나빴다.

“잘 잤나요, 존.” 마이크로프트는 눈도 들지 않은 채 인사를 건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블랙베리 안 보나요, 홀리?” 존은 테이블 위에 있던 카페티에르에서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그녀는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도는 해봤죠. 화면만 봐도 울렁거리더라구요. 유감스럽게도 신이란 없나봐요.”

존은 소리내어 웃고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손가락 끝까지 전해지는 카페인 기운을 만끽했다. 휴, 만족스러운 한숨이 나왔다.

“신의 존재에 대해 고찰할 마음일랑 조금도 없긴 합니다만, 커피의 존재만큼은 확실히 그분의 축복이네요. 좀 드실래요?”

홀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한잔 더 따르고는 방을 가로질러 다가가 건네주었다. 그녀는 고마워하며 받아 마셨다.

“셜록은요?” 그는 어젯밤에 앉았던 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마이크로프트가 던져둔 신문을 집어 스포츠면을 펼치며 물었다.

“없는데요.” 마이크로프트가 그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갔습니다. 그애가 말 안했나요?”

존은 머뭇거리며 마른침만 삼켰다.

“음, 아뇨. 안 했습니다. 제가 자고 있던 때인가봐요. 그 인간, 어디로 간다는 이야긴 했나요?”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저었다.

“내 동생이 어떤지 알잖습니까, 존. 그냥 사건의 실마리를 찾았다며 서둘러 가봐야 한다고만 하더군요. 정말 무례하지 않나요; 엄마께는 한마디도 안했을 거라 봅니다.”

존은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셜록이 짜증나고, 화났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오늘 아침에 자신만 남겨놓고 그대로 내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 특히나 아까 잠시 깼을 때,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잠결에도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매달려 있던 그를 봤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받는 이: G 레스트라드
셜록 지금 당신과 사건 맡고 있나요? J (덧. 메리 크리스마스)


답장이 오기까지는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받은 메시지
오늘은 그놈의 젠장맞을 복싱 데이[각주:2]고 난 쉬는 날입니다. 아뇨, 그 인간 못 봤습니다. 그렉



다시 시도해보기로 한다.


받는 이: M 앤더슨, S 도노반
셜록 봤습니까? J


이번에도 답장을 받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우 간단명료하긴 했지만.


받은 메시지
꺼지쇼.
[각주:3] 

받은 메시지
오 맙소사. 괴물이 이번엔 뭘 했길래요? 샐리♡



셜록이 갔을만한 곳은 이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는 시체 안치소의 몰리에게 물어보았다. 예의 그 ‘짐’ 사건 이후로는 그녀와 이야기하기를 피하려 했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받는 이: M 후퍼
셜록이랑 같이 있나요? 중요한 일입니다. J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더 걸렸기에, 불안한 상태로 커피를 홀짝였다. 드디어 핸드폰에서 삐, 소리가 났다.


받은 메시지
그사람 못본지 한참 됐어요 :) 건 글코, 이 번호 누구세요? xx~*몰리잉*~xx
[각주:4]


그는 불안스레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사건은 아니란 말인데; 만약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걸테지. 진짜 사건이라면, 레스트라드조차 모르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아무리 셜록이라도 수영장 사건 이후부터는 혼자 무턱대고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 좀더 분별력 있게 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남아 있는 가능성은, 처음에 추측했던 게 맞았다는 거겠다: 셜록은, 같은 집에서 제 가족들과는 한시도 더 머무를 수 없을만큼 불편했던 거다. 존과도 그렇겠고. 존은 좌절감을 느끼며 끙, 신음했다.


받는 이: 셜록
너 바보구나. J [각주:5]


그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며 거실에 있던 모두에게 말했다.

“전 베이커가로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셜록이 뭔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뭐, 도울 거라든지. 사건으로 말이죠.”

홀리는 커피잔 뒤로 킥킥, 웃었다.

“그래요, 가는게 좋겠네요, 존.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요.”

그녀의 말이 지난 밤에 나누었던 대화를 암시한다는 걸 알아챈 그는,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보다는, 제가 관리하지 않으면 그 인간이 부엌에 무슨 짓을 저질러놓을지가 더 걱정이네요.”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느껴질 불만스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써 가볍게 대꾸했지만, 차분하게 바라보는 마이크로프트의 눈빛에 움찔하고 말았다. 마이크로프트라면 그를 꿰뚫어보는 건 물론이거니와 불안함의 실체까지도 알아차리고도 남는다는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운을 빕니다, 왓슨 선생.” 그는 한마디 던지고는 다시 신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말은 단순한 부엌 상태 이상을 의미하는 게 분명하다는, 확연한 심증이 느껴지는 존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으러 한달음에 계단을 올라갔다.

새 크리스마스 스웨터를 껴입고 반쯤 내려왔을 때쯤 핸드폰이 삑, 울었다.


받은 메시지
훌륭한 추리군. SH



그럼 아직 이야기 정도는 한다는 건데. 그거면 됐다. 그는 서둘러 답장을 보내고는 - 


받는 이: 셜록
너 어디야?


- 택시를 불러, 마이크로프트 저택이 정확히 어딘지 기사에게 설명하면서 현관을 나섰다. 전화를 막 끊고 났을 때쯤엔, 핸드폰이 반짝거리며 또다른 메시지가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받은 메시지
바빠. 방해하지 마. SH



존은 밀려오는 짜증에 욕설을 뱉으며 분노의 메시지를 쏘아보냈다.


받는 이: 셜록
사건 없는거 알거든. 레스트라드랑 이야기했다구. J


그는 이 택시가 출발을 하긴 했는지, 아니면 마중이라도 나가야 하는 건지 의아해하며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나가봐야 하려나. 그는 문 손잡이로 팔을 뻗었다.

“뭐 잊은 거 없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애러실리아 홈즈가 그를 가만 바라보며 쇼핑백 하나를 내밀고 서 있었다. 그는 받아들고 안을 살펴보았다. 어젯밤에 셜록이 선물로 주었던 노트였다.

“고맙습니다.” 불안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니, 그녀가 입을 연다.

“그애에게 말했군요.” 존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마주보았고,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불쑥 대꾸해버리고 말았다. “셜록은 그냥, 그리고 전, 그게-”

“결국에는 그애도 알아냈을 거에요.” 그녀는 조금은 후회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게 어젯밤이어야 했다는 게 유감이긴 하지만요. 우리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으니까요. 하지만, 드라마같은 게 없다면 홈즈가의 크리스마스답지 않겠죠.”

존은 본의아니게 픽, 웃어버렸고, 순간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애러실리아, 셜록을 감시하고 있다셨죠, 안그래요? 그럼 지금 어디에-”

“그애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요.”

그는 경계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겐 말 안해주실 생각이군요?”

“그럼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애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존.” 그녀는 손을 뻗어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애도 정리할 게 좀 있어서요.”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새로운 메시지 없음


밖에서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택시가 왔군.

“제가 부른 택시에요.”

“그럼요, 존.” 그녀는 따스하게 그를 안아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마침내 당신을 만나서 정말 기뻤답니다.”

“네, 고맙습니다. 만나뵈어서… 흥미로웠어요.” 그의 꾸밈없는 대답에, 애러실리아는 ‘킥킥’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문을 나서며 그녀에게 한번 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길 저편,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난 밤만큼이나 추워서, 두텁게 짜여진 스웨터가 새삼 고마워지는 쌀쌀한 아침이었다. 이걸 입고 있다는 걸 알면 셜록은 짜증을 낼까 생각하다가, 얼어죽느니 그 인간의 짜증을 받아주는 게 낫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택시에 올라탔지만, 맞은편 자리에 셜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데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

“베이커가 221B요.” 셜록이 다른 곳에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존은 자동반응마냥 주소를 읊었다. 그 인간을 찾는답시고 런던 길거리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닐 생각 따위 전혀 없기도 했고.


새로운 메시지 없음

받는 이: 셜록
그만 좀 삐져. J


가는 내내 여러 장소와 표지판들을 지나쳤다; 아는 곳도, 모르는 곳도 있었고, 가끔은 바람을 등지고, 경찰을 뒤세우고 온 런던을 헤집고 달리다 셜록과 함께 들렀던 곳이 눈에 들어올 때면 움찔 놀라기도 했다. 내심 숨겨져 있던 위험으로의 치명적인 끌림, 그 생각만으로도 그는 심장 고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셜록이 어머니와 나누던 이야기를 엿들었던 걸 되새겨 보았다. 그것 역시, 이 플랫메이트를 향한 강박과도 같은 집착의 일부분이었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택시가 221B의 까만 현관 앞에 멈춰섰고, 그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집이다.

기사에게 요금을 내고는, 그대로 현관으로 들어섰다.

“셜록!” 그는 거실로 향하는 열 일곱 계단을 오르며 불러보았다. 딱히 대답이 되돌아오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여기 있어?”

그는 없었다. 있었다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존은, 아수라장 같은 그들의 거처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미세하게라도 달라진 게 있는지 휘 둘러보았다. 소파 옆에 쌓여있는 책들이 살짝 달랐다. 테이블 위에는 전에 있던 시험관 모듬세트가 아닌,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종이가 몇 장 놓여 있었다. 그리고 셜록에게 선물했던 우주에 대한 책이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 그는 얼굴을 구겼다 - 음료수가 놓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그란 컵 자욱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내 방식 알잖아, 존. 적용해봐.

그는 플랫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셜록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 단서라도 찾으려 애써보았다. 소파 옆에 쌓인 책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의식과 이상심리학에 대한 책 한 권에, 지나-티벳어의 분류에 대한 책 한 권, 어린아이들 실뜨기 놀이 - 실뜨기 패턴 및 기타등등에 대한 책도 한 권 있었다. 그리고 네번째는, 지난 밤에 셜록이 그렇게나 몰입해서 들여다보던 벌에 대한 책이었고. 존은 어깨 한번 으쓱하고는 부엌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조각들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름도 씌어있지 않은 설계도 몇 장에 (대략 박물관이나 도서관같아 보이긴 했지만) 해독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글씨인지 암호인지를 휘갈겨 적어둔 페이지도 몇 장 있었다.

거실 책상 위에 자신의 노트북이 놓여있는 게, 그리고 불빛이 깜박이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셜록은 그의 컴퓨터를 쓰고 있었다는 거겠군. 또.[각주:6] 존은 저 인간이 이번 비밀번호까지는 맞출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지만, 보아하니 그 생각은 틀렸던 모양이다. 혹시라도 인터넷 사용 히스토리를 보면 뭐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재빨리 가보았다 - 셜록이 지워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싹 지워버렸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브라우저만큼은 닫지 않았던가보다. 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페이스북 사진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해리 생일날에 찍은 한 장의 사진. 그때 그녀는 축하해 달라며 존을 저 술집으로 끌어냈고, 그는 대신 셜록까지 끌고갔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사진에서 둘은 제대로 찍혀 있지도 않았다; 앞에는 시끌벅적하게 낄낄거리며 카메라를 향해 칵테일을 들어보이고 있는 해리의 친구들만 잔뜩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그와 셜록은 뒷배경처럼 나와 있었다. 티는 안 나게, 하지만 분명히 주변 사람들은 모두 외면하면서. 셜록은 냅킨에 뭔가 그리고 있었고 (그건 밤에 놀러나온 15명의 술기 오른데다 집적거리기 딱 좋은 여자아이들이 나갈 만한 경로를 모조리 표시한 동선도였다. 반대쪽 술집으로 이어지는 모든 출구가 표시되어 있는 지도와 함께 말이다.) 존은 한 손에는 술잔을, 얼굴에는 짜증 섞인 미소를 띤 채 어깨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두 사람의 일상 중 어느 순간을 찍어도 나올 수 있을 만한 그냥 스냅샷일 뿐. 하지만 그 안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친밀함에 존은 숨이 턱, 막혀오는 걸 느꼈다. 이어 자신의 프로필 페이지를 뒤지다 말고, 그는 불현듯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그건, 두 사람이 함께 나와 있는 유일한 사진이었던 거다.

그는 눈을 깜박, 했다. 어이없는 일 아닌가. 지난 1년간 - 맙소사,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 건가? 마이크가 둘을 소개해준 게 1월 말이었으니까 - 그의 삶에서 깨어있는 순간들 거의 대부분을 이 남자와 보냈는데도 사진 한 장 없다니.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 사진같은 걸 찍는 타입도 아니었고 그들이 함께 있을 때 만나는 사람이래 봐야 스코틀랜드 야드 사람들에, 바츠의 의사 가끔, 그리고 허드슨 부인 정도밖에 없긴 하다. 존은 마음 속으로, 애러실리아에게 연락해서 어젯밤에 찍은 - 그녀가 떠준 어이없는 스웨터 차림으로, 얼근히 취해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사람의 - 사진들을 몇 장 복사 부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컴퓨터엔 그 외에 셜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건 없었고, 플랫에서는 도저히 추리해낼 수 없었다. 그는 셜록의 침실 쪽을 흘끔 바라보긴 했지만, 굳이 시도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딘가 물린다거나, 독에 중독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육식성 곰팡이균에 감염되고 말 테니 말이다.

이제 할 거라고는 텔레비전을 켜는 것 뿐이겠는걸, 존은 생각하며 잠시 기다렸다. 애러실리아가 옳았을 거다; 셜록은 그저 좀더 시간이 필요했던 거고, 마음의 준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올 거다. 그는 그동안 차나 한잔 타 마시면 되는 거다. 존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틀면서 부엌으로 향했다. 복싱 데이에 하는 영화 치고는 지독하게 달달하지 않은 걸로 뭔가 있겠지. 그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든가 멋진 인생같은 건[각주:7] 넘겨버리고, 벅시 말론[각주:8] 틀어두었다. 이정도면 되겠지, 생각하며 그는 주전자를 켰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는, 우유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눈을 깜박, 하며 바라보았다.

이 사태가, 여기 인간의 머리 하나가 턱, 들어있을 때와 맞먹을 정도로 놀라운 건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보아하니 셜록이 오늘 아침 집에 왔을 때 냉장고를 - 우유로 하나 가득 - 채워둔 모양이다. 그것도 둘이 마실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우유로 말이다. 복싱 데이에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구해왔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새로운 메시지 없음

받는 이: 셜록
우유 사놓은 거 봤어. J


그는 다시 한번 냉장고를 들여다 보았다. 갖가지 종류의 우유가 다 있군그래, 멍하니 깨닫고는 저지방 우유를 집어들었다. 그는 의심스레 킁킁, 냄새 한번 맡아보고는 - 셜록은 절대 모를 인간이니까 - 자신 몫의 차를 탔다.

그리고 기분 좋게 한모금 들이마시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
부둥부둥 포근하게 껴안고 잠들어 있는 장면, 생각만 해도 좋다. (저 침실에도 감시 카메라를!)
배경처럼 나와 있는 사진을 커플샷이구나, 생각하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을 셜록이나,
그걸 뒤늦게 발견하고 사진 더 달래야지, 생각하고 있는 존이나. 일상 속의 비일상적인 깨달음이 참 좋다.
그러니까 어머님, 그 영상이랑 사진을 저에게도 좀… : ]

  • 소개합니다: 하이지달님께서 [크리스마스 저녁 3편의 왕관 쓴 셜록]를 해사하게 그려주셨어요. 꼭 보세요~ :D



    1. ‘plotting on how best to overthrow his mother’ - 셜로기의 마음을 상상해서 조금 귀엽게. :P [본문으로]
    2. ‘Boxing Day’ - 크리스마스 다음날의 휴일. 영국식 발음(?)으로 표기한다. :P [본문으로]
    3. ‘BUGGER OFF’ - 이예~ [본문으로]
    4. ‘WHOSE NUMBER IS THIS BTW? xx~*MOLLZ*~xx’ - BTW나 MOLLZ 느낌 살려서(?) 옮긴다. [본문으로]
    5. ‘YOU’RE AN IDIOT.’ - 셜록에게 바보드립 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 하나뿐이겠지. [본문으로]
    6. ‘Again’ - 한마디에 담겨 있는 애환. -_-;; [본문으로]
    7. ‘The Sound of Music’, ‘It's a Wonderful Life’ - 외국에선 이런 걸 하는구나?;; [본문으로]
    8. ‘Bugsy Malone’ - 아이들이 나오는 갱스터 뮤지컬 영화… 라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어쨌든 추천. 자세한 설명은 여기: http://goo.gl/MFMHt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