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진실을 마주하다  | Seeing the Truth  



눈을 떴을 때, 존은 혼자였다. 평소라면 그닥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만, 함께 자게 되면서부터는 셜록이 악몽을 꾸는 것 때문에 둘 다 깨곤 했기에 이번에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옆쪽을 확인해보았지만, 차게 식어 있는 걸 보니 오늘은 셜록이 일찍 일어났다는 말이겠다. 존은 안심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난 밤과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어제의 기억을 만끽하며 이대로 그냥 잠시 누워 있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래봐야 소용은 없었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셜록이 걱정되어, 마지못해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빠져나오고 마는 존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며, 도중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셔츠들을 난간 기둥에 걸어두었다.

잠에 취해 느릿느릿 거실로 들어섰을 때, 옷을 다 차려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셜록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파일을 읽어보고 있는 모습이, 컨디션도 확실히 좋아보이는데다 화난 기색도 없었다.

“일어났네.” 존은 욕실로 향하며 웅얼웅얼 인사하고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이를 닦기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던 탓에, 잠에서 깨어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부엌으로 어슬렁어슬렁 돌아와 주전자를 집어들어 개수대로 넣고는, 물을 틀며 창밖으로 본듯 만듯 시선을 돌렸다.

본듯 만듯.

방금 본 게 뭐였더라?

존은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대로 돌아서서는, 거실 문가로 돌아가서 머뭇머뭇 둘러보았다.

셜록은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대고 있었고, 존이 다가섰을 때쯤에는 사진 모듬을 분주히 넘겨보는 중이었다. 존이 유심히 바라보는 걸 금방 알아챘는지, 셜록이 고개를 들고 싱긋 웃는다. “좋은 아침.” 그의 눈빛은 전처럼 생기를 띠고 있었다.

존은 엄청나게 놀라 선 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셜록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떡 벌리고 만다. “어떻게? … 언제? … 어째서? …” 말을 꺼내보았지만, 더듬더듬 나올 뿐이었다.

셜록은 파일을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움직여서인지 조금은 움찔했지만, 이내 커피 테이블을 훌쩍 넘어 방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세가지 다 탁월한 질문인걸.” 대답하고는, 존의 개인 영역마저 좁히고 들어와 얼굴을 감싸쥔다. 구석구석 샅샅이 훑어보는 두 눈에서는 레이저빔이라도 쏘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존은 다시 묻고 싶었다. 셜록이 왜 자신을 깨우지 않았는지, 시력이 어느 정도나 돌아왔는지, 이제 뭘 할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소리는 도무지 나와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전에는 자신을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는 듯이 응시하고 있는 셜록을, 존은 그저 마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넘치는 생기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꼭 감싸안는 바람에 거의 들리다시피 하면서도. 

“나 돌아왔어!” 당당하게 한 마디 하고는, 품에서 놓고는 어깨를 대신 부여잡는다. “보라구, 존.” 부추기듯 말하더니, “가볼 데도 있고, 만나봐야 할 사람들도 있잖아.” 환하게 씨익, 웃으며 덧붙인다. “말 그대로, 보는 거라구.”

실은 자신이 아직 잠들어 있는게 아닌가 의아해지는 존이었다.

“너 꿈 꾸는 거 아냐.” 셜록은 한마디 해주더니, 그를 빙글 돌려세워서는 계단 쪽으로 떠밀고는, “가봐,” 채근하기 시작했다. “옷 입어. 우리 나갈 거니까.” 어깻죽지를 밀어내며, 존의 둔부를 찰싹 때리는 게 느껴졌다.

존은 다시 돌아섰다. “하지만…”

“가면서 이야기하자구.” 말하면서도, 셜록은 손으로 ‘서둘러’라며 재촉하고 섰다.

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지난 몇 달 간의 일들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냥 아침에 일어나, 사건이라며 여느 때와는 달리 호들갑스럽게 신나하는 셜록을 보고 있는 것처럼. 존은 그대로 선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셜록이 조바심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차도 안 마시고 이 모든 걸 받아들일 거라 기대했던 건 너무 과했던 모양이군. 그럼 빠르게.” 존에게 부엌 쪽으로 손짓하면서, 옆에서 계속 떠들어댔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그러니까 딱 두 시간 전이지. 보이더라구. 시력은 완벽하고, 왜곡이나 비어있는 지점도 없이 완전히 정상이었어. 계단 내려와서 혼자 파일 좀 살펴보고 있었지. 특히 어젯밤에 마이크로프트가 가져다준 - 네가 아직 안 읽어준 업데이트 부분을.”

이 정도의 떡밥을 덥석 물 존이 아니었다.[각주:1]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그냥 일어났는데 시력이 돌아와 있었다는 거야?” 주전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묻고는, 다시 뒤돌아섰다. 셜록은 너머로 팔을 뻗어 불을 켰다.

“바로 그거지.”

순간 존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퐁 떠올랐지만, 말로 하지는 않았다.

역시나 셜록은 데굴, 눈을 굴렸다. “아니, 존. 난 네… 배출물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꾸한다. “마법같은 치유력을 가졌다고는 생각 안해.”

“아니, 아냐. 당연히 아니지.” 존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의했다. 잠시 생각해보긴 했지만 그의 두뇌의 최대치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난 콘돔도 썼고.”

“응, 존. 그래서 내가 확신하기도 하는거야.” 화가 난 게 분명한데도, 셜록은 그를 향해 싱글 웃어주었다.

존은 얼굴을 붉혔다. “그럼 뭐라고 설명할 건데, 천재님?”

“나중에 말해줄게.” 셜록은 두 잔의 머그를 잡아들고 티백 하나씩을 던져넣었다. 존은 티백이 어디 있었는지를 그가 안다는 사실 자체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아주 가끔 필요해질 때면 정보를 추리해내고는 다시 지워버렸을 게 뻔하지 않은가.

“병원으로 다시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 해.” 존은 돌아서서 끓는 물을 부어넣으며 충고했다.

셜록은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섬뜩 놀란 듯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허비해버리라구? 너 정신 나갔어? 싫어.” 그가 자리를 옮기자 냉장고 문이 덜컥거렸다. “내 두뇌는, 절대로 내가 판단할 문제라구. 병원이랑은 관계없어.” 조리대 너머로 우유를 끄집어내는 그의 팔을, 존은 빠져나가기 전에 덥석 붙들었다. 그리고는 셜록이 바로 뒤에 멈춰서도록 잡아당겼다.

이 상황을 차차 이해하기 시작하자, 존은 위태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며 내심 생각했다. 이상하잖아. 푹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깨어난다 하더라도 셜록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금방이라도 잠을 떨쳐버릴 수 있었겠지만, 이건 완전히 찬물이라도 끼얹은 격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의 마음 속 큰 부분은 기뻐하고 있었다. 심지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셜록이 지금도 자신을 원할지에 대한 이기적인 걱정이 작게 남아 있었다. 그 마음 때문에 속이 불편해지는 스스로가, 존은 부끄러웠다. 배에 얹어진 셜록의 손을 맞대어 누르며, 그런 두려움을 가능한 한 깊숙하게 묻어두고는 뒤돌아 조리대에 기대섰다.

“정말 기뻐.” 셜록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다시금 지성으로 환하게 빛나는 셜록의 저 두 눈. 그 강력한 영향력이란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는 거기도 하겠지만, 존은 그 힘에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 모든 걸 후회할 수는 없다고. 무슨 일이 있었든간에 - 심지어 그들이 그저 친구 사이로 되돌아가버린다 할지라도, 셜록이 어느 한 군데라도 상하는 건 결코 바라지 않았다. 이런 진실을 깨닫자마자 그의 미소는 더 커졌고, 속에 감춰둔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걸 느꼈다.

셜록의 시선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얼키고 설킨 생각 사이를 따라 차근차근 훑어보고 풀어내면서. “아,” 셜록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우러나고 있는 차로 잠깐 향하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존의 목 뒤로 손을 올려 감싸안는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존은 순간 자신의 심장이 다른 시간대로 이동해서 멈춰버린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셜록이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갔던 것처럼 그의 키스에 스스로를 맡겼다. 너무 허기진 것처럼 보인다는걸, 이런 상황에는 너무 강렬하다는 걸 알았다. 확실히 지금처럼 사건에 집중하려 할 때엔 이런 걸 셜록이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마저도 잘 알았지만, 더는 자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까치발로 몸을 뻗으며 한 손을 올려 셜록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다른 팔로는 그의 허리를 감싸 가까이 끌어안았다. 셜록은 그대로 받아들이며 키스에 답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냥 키스만. 존이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안심하고 만족할 때까지. 그렇게, 마음 속 무거움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더 이상 미소를 감출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둘은 마침내 떨어졌다. “고마워.” 존은 대답하는 자신의 얼굴 하나 가득 감정마저 숨김없이 드러나버릴 걸 알았다. 셜록은 흡, 숨을 들이마셨다.

“이거야.” 셜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미안, 뭐라구?”

“아, 허드슨 부인이 말했던 거 말야.” 셜록은 그에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우린 이제 함께야, 존. 확실히 해두자구.” 그는 존의 손을 잡아, 가슴에 얹었다. “‘그냥 친구’라든가 동료 같은 거, 아니면 기타등등 네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어이없는 생각처럼은, 다신 되돌아가지 않아.”

질문은 아니었지만, 존은 어쨌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행복으로 부풀어오는 기분을 느끼면서 - 셜록이 시력을 되찾자마자 완전히 예전의 그로 되돌아가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의식적으로 하진 않았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었던가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이제는 너무 우러나버린 아침 전용 차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 차는 못 마시겠는데.” 바라보면서, 이렇게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 차 마시는 즐거움을 포기한 적은 없었을 거라 내심 생각했다.

“흐음.” 셜록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 존을 놓아주고 물러선다. “나, 이런 연애사업에는 초짜일지도 몰라.” 그의 말에 존은 휙 고개를 돌려 셜록을 마주보았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키스하는게 차 마시는 것보다 좋을지도?”

존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시 주전자에 불을 붙였다. 뭐, 둘 다 가지면 안된다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럼, 어디로 가는 건데?” 셜록이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싶어할지 궁금해하며 물었다. 두 달이나 앞을 못 본 그인데, 뭐가 제일 보고 싶을까?

“밖에, 존!” 그가 대답했다. “우선 스코틀랜드 야드가 좋겠어. 하지만, 마이크로프트가 여기 오기 전에 나가는 게 중요해.”

마이크로프트가 온다구? 셜록이 전화나 문자를 했던 게 분명하다. 예상보다 빠르네. “말하니까 뭐라셔?” 마침내, 두 손에 새로 우려낸 차가 담긴 머그를 들고 돌아서며 존은 물었다.

뭔가 수상쩍은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셜록의 눈이 반짝였다. “존, 넌 천재야.” 활짝 미소지으며 한마디 한다. “좋아, 계획 변경이다.” 머그를 받아들자마자 내려놓는다. “가서 옷 입고 다시 내려와. 마이크로프트가 와도 아무 말 하지 말고.”

존은 데굴, 눈을 굴렸다. “말 안했구나, 그렇지?” 자신보다 마이크로프트가 먼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묘하게 즐거워졌다. “형을 골려먹으려는 게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 잘 지내보기로 하지 않았었나?”

셜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자신의 사악한 계획에 푹 빠져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떻게 무시했었는지, 그 인간에게도 가르쳐줘야겠어.” 존의 손에 차를 쥐어주고 부엌에서 쫓아내듯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네 ‘도움이 필요할 때’란 건 날 보내버리는 거였어?”[각주:2] 거실 한가운데 힘주어 멈춰선 채 존이 물었다. “이제까지 누군가 했던 최악의 결정 중에서 Top 5에 들어갈거라던 그거 말야.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지상전까지 포함한다 치더라도 말이지.”

셜록은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존.” 대뜸 부인한다. “어쨌든, 내가 ‘눈 먼’ 척 할 수 있다는 게 좋을지도 몰라 - 속이려 든다기보다는 그냥 실습이라고 생각하자구.”

존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너라면 합리화할 거리를 반 다스 정도는 준비해두고 내가 뭐라 하기만을 기다렸을 게 뻔하지.”

“사실은 여덟 가지였어.” 의기양양한 표정의 셜록이었다.

“뭐, 네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 내 생각엔 안될 것 같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적어도 나는 절대 못할거야.” 존은 콕 집어 말했다. “날 한번 보기만 해도 무슨 일인지 알아버릴걸.”

셜록은 무시하듯 손을 휘저었다. “그냥 섹스 건으로 당황하는 거라 생각하고 넘길거야.”

존은 이걸 알아야 할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묻고 있었다. “섹스 건?”

치켜올라간 한쪽 눈썹이 그에 대한 답이었다. “마이크로프트가 어젯밤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텐데? 우린 합의를 보지 못했었는데다, 형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너도 거기 서 있었잖아.”

“돌아와?” 존은 멍하니 따라 말했다.

“아, 좀 알아들으라구, 존. 내가 왜 우리 셔츠를 계단에 흘려놨겠어? ‘우리 한창 하는 중이니까 꺼져’라는 게 당연하잖아.[각주:3] 그러니 형은 대신 오늘 아침에 들르는 거고.”

“하는 중이라고?” 셜록의 단어 선택도 선택이지만, 마이크로프트가 계단 아래 서 있는 동안 윗층에서는 자신이 그의 동생과 열심히 몸을 섞고 있던 중이란 사실을 깨달으며 존은 거의 혼이 빠져나가버릴 것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셜록의 표정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깃들기 시작하더니, “괜찮아?” 묻는다. “조금 창백해보이는데. 다시 키스해줄까?”

“괜찮아.” 존은 찻잔을 꽉 붙들고 침실 상태나 확인하러 가기로 했다. 셜록과 더 이상 이야기해봐야 남는 게 없을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전략적 후퇴를 하기로 마음먹고, 내팽개쳐져 있는 셔츠를 집어들었다.

그는 최근의 이 진전 상황을 이해하고, 그 결과까지 차근차근 생각하려 애써 보았다. 그들의 삶이 지금과 같아질 거라 상상하기는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에 사랑하게 되었던 그 방어적이고 까칠한 남자와, 지난 몇 주간 알게 된 - 좀더 의존적이고 다정해진 셜록을 연결짓기도 어려운 건 물론이다.

물론 부엌에서의 그 키스나 셜록의 말만으로 안심하기에는 한참 멀었지만 - 존은 분별력 있고 합리적인 사람인 만큼, 걱정은 접어두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쯤에는 어느새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모른척하고 방금 일어난 시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돌아보는 셜록의 얼굴과 자신의 너머로 향해 있는 초점 없는 시선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져버리고 말았다. 이 남자, 겁나게 잘하잖아. 존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였지만 이 모든 게 그냥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남몰래 스스로를 꼬집어볼 정도였으니까. 마이크로프트가 살짝 움찔하는 모습에 셜록의 입가가 비죽거리는 걸 보고서야 마음을 놓는 존이었다. 

흥미롭다는 듯 응시하는 마이크로프트를 보며, 존은 평소대로의 차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좋은 아침.” 이 방문의 공식적인 이유에 초점을 맞추어 말을 꺼내보았다. “둘 다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미 알아차리셨겠지만요.”

“그렇군요.” 마이크로프트는 다시금 셜록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확실히 어젯밤의 그… 협의는 잘 진행된 것 같네요.”

존은 그의 말에 얼굴을 붉혔고, 넘어질 뻔 휘청거리면서도 테이블 쪽으로 가 기대어 섰다.

“그리고, 오늘 아침엔 내 동생이 자리에… 앉는 데 약간의 문제를 겪는 것 같으니,” 셜록이 어색하게 의자에 고쳐앉는 걸 보자마자 마이크로프트는 말을 이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지금쯤 셜록은 노려보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하고 있겠는걸, 마이크로프트의 말에 식겁하며 존은 생각했다. 항상 점잖은 남자에게서 저렇게나 개인적인 지적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다. 잠시 후 셜록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존은 마이크로프트가 의도적으로 동생을 도발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셜록이 물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작게 미소지어 보이고는, “기쁨이 넘쳐 숨기지도 못하는 네 분위기를 보자마자 의심은 했다만,” 대답했다. “존이 깔개 위로 넘어질 뻔 하는 걸 보니 명확해지더군.”

휴, 한숨을 내쉬며 체념하고 마는 존이었다. 자신의 탓으로 돌아올 거란 사실쯤은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어떻게 된거지?” 마이크로프트의 물음에, 셜록은 아까 존에게 그랬던 것마냥 ‘그냥 돌아왔어; 완벽해; 병원은 안가’를 빠르게 주르륵 읊어대며 넘기려 들었다. 참으로 고맙게도 존이 잠시나마 떠올려봤던 ‘마법의 정자’ 이론은 제외하고 말이다.

마이크로프트는 잠시 생각하는 듯 아무 말 없다가, 이내 느릿하게 물어왔다. “아는 사람은 있고?”

서로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두 형제는, 예의 그 침묵의 대화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늘 존이 버려진 짐짝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바로 그것 말이다.

“너무 위험해.” 마침내 셜록이 입을 열었다.

존은 귀를 쫑긋 세웠다. “뭐가?”

셜록은 그저 고개만 저어 보였지만, 마이크로프트가 대답해주었다. “우린 지금 셜록의 시력이 돌아온 걸 비밀에 부칠지를 고려해보는 중입니다. 그게 모리어티를 상대할 때 유리한 점이 될 수 있으니까요.”[각주:4] 

존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침묵의 말다툼은 모른척 하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뇨.” 결국 말을 꺼냈다. “뭐, ‘너무 위험하다’는 부분은 이해 못했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어째서 ‘아니’라는 쪽에 한 표를 던지는 겁니까, 존?” 마이크로프트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언제부터 자신의 의견이 한 표 씩이나 되는 걸로 업그레이드된 건지 의아해졌지만, 어쨌든 존은 고개를 돌려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네가 집중해야 할 게 분산될 테니까.” 그는 말을 시작했다. “못하는 척 해야 한다면 관찰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질거야. 어두운 선글라스라 해봐야 조금밖에 도움 안 될 테고. 이 사건은 네가 완전히 집중해야 하잖아.” 그리고는 군인 모드로 이어갔다. “게다가, 그렇게 했을 때 네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점이 뭐지? 네가 스스로 처리할 생각이라면 그래선 안될거잖아.” 할 수 있는 한 제일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두 형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시력에도 문제가 없으니 그 의견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봐. 그리고, 네가 갑자기 어딘가 혼자 나타나게 되면 모리어티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말 거고.”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셜록은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그건 네 ‘공식적인’ 이유잖아, 존. 다른 이유는 뭔데?”

마이크로프트가 놀란 듯 다시 쳐다보자, 존은 당황스러움에 발을 꿈지럭거렸다. 존이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걸 아예 몰랐던 것 같았다. 셜록은 히죽 웃었다 - 마음속 점수표같은 어딘가에 스스로에게 한 점 추가해넣은 게 분명하다.

“네가 싫어할 테니까.” 존은 결국 입을 열었다. “아, 물론 비밀이란 사실은 즐거워하겠지. 어느 정도는 신나할 게 분명해. 하지만 넌, 너무너무 그리워했었잖아.” 셜록이 그답게 몰입해 있을 때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떠올리며 미소지어보였다. “관찰하는 거 말야. 그러니까 -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알아차리고, 난데없이 추리해내서 네 천재성으로 우리 모두를 놀래키는 거. 바츠 연구실에서 알 수 없는 실험들을 하고, 답을 찾아내고, 비밀마저도 알아내버리는, 그 모든 것들 말이지.”

그가 말하는 동안, 셜록의 미소가 점점 환하게 커져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진짜였다.[각주:5] 히죽거리거나 입술 끝만 올리는 비웃음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따뜻하고 행복한 미소였던 거다. 마이크로프트도 그를 흘긋 쳐다보고는 눈을 떼지 못했다.

“난, 그런 네 표정을 다시 보고 싶어.” 존은 말을 끝맺었다.

셜록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한 그의 모습에, 마이크로프트가 어젯밤 소리로 들었던 것들을 영상으로도 보게 될까봐 두려워지는 존이었다. 하지만 셜록은 점점 더 의기양양해지는 표정으로 형을 돌아보았다.

“내 말대로지.”[각주:6] 셜록의 말에, 존은 저 둘이 뭔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군.” 마이크로프트도 동의했다. “내 마음은 괴롭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소띤 얼굴로 존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가려는데, 잠시 배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각주:7] 

셜록이 휙 쏘아보는 품을 보니 화는 난 것 같았지만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기에, 존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로프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하려던 말은, 내 동생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경고 정도겠네요.” 그의 말에 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셜록을, 말 그대로 가질 수 있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존은 홈즈 형제가 특히 이해할 수 없게 굴 때마다 늘 해왔던 대로, 가볍게 무시해주었다.[각주:8] 대신에 궁금하던 걸 묻기로 했다. “셜록의 시력 건을 비밀로 하는게, 어째서 위험하다는 거죠?” 

마이크로프트는 계단 아래에서 잠시 멈춰서더니, 그를 돌아보고 대답했다. “셜록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알려지면, 모리어티의 위협들 모두가 다시 그애에게로 향할 테니까요. 당신이 아니라.”

존이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고, 이내 분노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비밀로 하는 건 나한테 더 위험한 거겠군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게 저 인간의 이유랍니까? 저 빌어먹을 남자가, 날 위험에서 건져내겠답시고 그걸 자기가 다 무릅쓰겠다는 건가요.” 돌아서서 계단으로 향했지만, 마이크로프트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지 말아요.” 마이크로프트가 재빨리 대꾸했다. “그애가 하게 두시죠, 존.” 팔을 붙든 손이 조금 느슨해졌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난 어젯밤 전까지, 저애가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습니다.”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존, 셜록에게 맡겨줘요.” 둘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 계단 올라서 있는 존과 마이크로프트의 시선은 같은 높이에서 가까이 마주쳤고, 마이크로프트의 손은 여전히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때, 윗쪽에서 크흠, 일부러 소리내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은 마이크로프트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노기 등등한 표정으로 위에 기다리고 선 셜록에게로. 맨 윗 계단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존은 벽으로 밀어붙여졌고, 곧바로 셜록이 온 몸으로 덮어오며 맹렬한 기세로 그에게 키스했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도록 온 몸으로 기대어 붙박아두는 건 물론, 고개조차 돌릴 수 없도록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로.

마이크로프트가 현관을 나서는 달칵,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지만, 보는 눈이 없다는 사실조차 셜록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이젠 아예 한 손으로는 머리칼을 움켜쥐어 고개를 기울이게 만들고, 다른 손으로는 존의 목을 감싸안으며 목덜미를 세게 빨아올리고 있었다.

존이, 자신에게 이러는 것까지 참아줬던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은 적색경보나 다름없었기에 저항하려는 본능을 애써 억눌러야 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자제하는 데 성공했다.

존은 셜록의 자켓 안으로 두 손을 밀어넣어 어깨부터 허리까지를 어루만졌다. 물어뜯을 듯 덤비던 입이 존의 입술까지 되돌아왔을 때, 그는 키스로 화답해 주었다. 몸을 세워 한쪽으로만 무게가 쏠리지 않도록 가능한 한 벽에서 떨어지고는, 서로의 혀를 한데 얽으며 격랑에 몸을 맡겼다. 셜록이 차츰 진정해서 - 위협적으로 옭아매던 손길이 내려와 그의 몸을 감싸안고, 머리칼을 움켜잡던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질 때까지.

깊게만 치닫던 키스가 나긋해지고, 거칠게 물어뜯던 것도 가볍게 무는 정도로 가라앉아 - 계단 끝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두 팔로 감싸안고 부드럽게 입맞출 때까지. 마침내 셜록이 고개를 들고 눈을 뜨더니, 당황한 듯 불안한 눈빛으로 존을 바라보았다.

“미안, 존.” 입을 여는 그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건 말야,” 존은 대답해주었다. “질투로 불타오르는 소유욕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준 사태라고나 할까. 거기에 억제해두었던 지배욕이랑,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형제간의 경쟁 심리까지 더해서 말이지.”

셜록은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부르르, 떨었다. “사과할게.” 존은 물러서려 하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끝내주게 흥분되는 거기도 했지.” 그는 덧붙였다. “뭐, 네가 고를 만한 대안이래봐야 나한테 오줌을 누는 것 정도일 거잖아. 불평하는 건 아냐.”[각주:9] 

셜록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금세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긴장을 풀고 이마를 맞대왔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존 왓슨?”[각주:10] 

“아, 아예 내 탓을 하지 그래?” 존은 소리내어 웃었다. “뭔지 알아내면, 내가 그만두었음 좋겠어?”

“아니,” 셜록은 대답했다. “안돼, 그만두지 마.”





이어지는 며칠은 폭풍처럼 흘러갔다. 이곳저곳 분주히도 돌아다녔으니까;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을 조사했다. 셜록은 자신을 쐈던 스나이퍼를 인터뷰하고 싶어했었지만, 그는 ‘더이상 여유가 없다’고 안시아가 알려왔을 때에도 딱히 놀란 것 같진 않았다. 대신 심문했을 때의 비디오 영상을 보기로 했지만, 그나마도 좌절스러울 정도로 쓸모는 없었다. 존은 그 모든 인터뷰들이 셜록이 총에 맞은지 단 이틀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만 알아차렸을 뿐, 아무것도 얻어내진 못했다. 해서, 그건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칼 파워스(Carl Powers) 사건을 다시 검토하며, 라울 데 산토스(Raoul de Santos)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힉맨 갤러리(The Hickman Gallery)에서 거래했던 사람과, 제이너스 카(Janus Cars)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몽크포드 부인(Mrs. Monkford)은 그들과 말을 섞기조차 거절해버렸지만 말이다.[각주:11]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셜록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행동했다. 물론 확연한 차이점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의 행동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존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보다는 좀더 가까이 다가서 있긴 했지만, 그거야 언제나 그랬던 거니까. 그는 여전히 참을성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데다 짜증도 자주 냈다; 존을 바보라 부르는 것도 변함없었지만, 말투에서는 날카로움이 줄고 그만큼 애정이 더해져 있었다. 게다가, 존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항상 알아야만 했다.

신체적인 면으로 보자면, 보류 상태라 할 수 있겠다. 셜록은 완전히 사건 모드였기에[각주:12] 소파에서 쪽잠을 자는 건 물론이거니와, 하루 걸러 한번 이상은 먹으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키스도 잠깐의 휴식처럼만 했다. 지독하게 바쁜 사람이 차나 커피를 마실 때 움직이면서 후룩 한모금씩 들이키는 것처럼, 셜록은 존을 붙들고는 1~2분 정도 완벽하게 집중해서 열정적으로 키스했지만, 그만큼이나 갑자기 놓아주고 다시금 휙 사라져버리곤 했다. 셜록에게 섹스란 건, 먹는 거나 자는 것과도 마찬가지로 ‘사건 사이에' 할 일이란 걸 너무도 명확하게 깨닫고 마는 존이었다. 뭐, 별 수 없지, 언제나 샤워란 게 있으니까.[각주:13] 

셜록은 여전히 보모 사건이 모리어티의 소행 중 하나라고 믿고 있었기에, 유언장의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러 스코틀랜드 야드로 향했다. 막 들어섰을 때, 로비에서 레스트라드가 그들을 불러세웠다. 

“유기된 시신이야. 신원 미상. 한번 볼 텐가?” 그가 물었다. “아, 그리고 축하해.” 셜록과 존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다시 볼 수 있게 된 거 말야.” 레스트라드는 재빨리 덧붙였다. “이후로는 처음 본 거잖아.”

셜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는 존에게로 눈썹을 치켜올려보이며 사건을 돕고 싶다는 의욕을 내비쳤고, 존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네가 좋다면’ 하는 미소를 보냈다. 둘은 함께 돌아섰다. “가죠.”

시신은 고급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에서 발견되었고, 그곳은 이미 경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샐리가 달려들다시피 그들을 맞았다.

“그럼, 사실이었군?” 그녀는 따지듯 물었다.

“아, 도노반 경사. 그 정도 질문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답하는 셜록의 목소리는 존이 생각했던 것보다 냉랭했다. “내 시력에 대해 묻는 거라면, 맞아. 당신 무릎에 영향을 미친 카펫이 누구네 건지 전처럼 완벽하게 추리해낼 수 있게 되었지 뭔가.”

“셜록!” 놀라움만큼이나 실망스러운 기색이 묻어나는 존의 목소리에, 셜록은 곧바로 멈췄다.

“사과하지.” 한마디 덧붙이더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존의 팔을 붙들고는 현장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거든!” 뒤에서 샐리가 소리쳤다.

셜록이 시신을 조사하면서 질문 목록을 우르르 쏟아냈을 때, 그녀가 다시 옆으로 다가왔다. 

“그럼, 둘은 이제 ‘그런 사이’인가요?”[각주:14] 셜록은 그녀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했고, 존은 당황하며 그저 반쯤 웃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연애? 커플? 사귀는?” 주위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경관들이 하던 일을 멈춘 것만 같았다. 셜록은 흘끔 둘러보더니, 샐리 쪽으로 팔을 저으며 한마디 했다. “네 분야겠어, 존.”[각주:15] 

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분야라니? 둘의 관계를 ‘공개’할지 말지의 결정을, 셜록은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건가?

“당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존은 샐리와, 주위를 둘러싼 채 불만스러운 듯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조용히 좀 해!” 셜록이 팩, 쏘아붙였다. “이 문제들에 생각을 집중할 수가 없잖아!”

샐리는 존에게 동정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닥거렸다. “저 인간, 지금 당신을 차버린 거죠? 내가 뭐랬어요.”

셜록은 몸을 일으키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면?” 누구 하나 지목하지 않고 물었고, “정보? 자료? 질문에 대한 답?” 아무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존은 모든 시선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아, 제발들 좀. 당신들 몽땅 정신 나갔군요!” 셜록은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두 발짝 앞으로 다가서서는, 존의 목덜미를 그러쥐고 제대로 키스해버리고 만다. “이제 일 좀 해도 될까요?”





그날 늦게, 존은 무거운 장바구니들을 부여잡고 툴툴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이렇게나 무거운 것들을 한가득 들고 내내 거기서 맴돌았으면, 적어도 빌어먹을 쇼핑 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니냐구, 그는 생각했다. 짐들을 부엌 테이블에 올려놓고 거실로 들어설 때까지도, 그는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셜록은 무릎 위에 서류들 한 무더기를 올려둔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는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푹 빠져있는 게 분명했지만, 보란듯 한 팔을 쭉 뻗는다. 존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서서는 서류를 살펴보려 몸을 숙였다. 순간, 셜록이 팔을 감더니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으며 그의 몸을 아래로 끌어당겨 키스한다.

최근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친밀한 순간이었다. 셜록의 혀가 그의 입술을 따라 그리며 민감한 입가를 할짝였고, 존은 온 몸이 떨려오는 걸 느끼며 몸을 낮춰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들어 셜록의 얼굴을 감싸쥐고, 아래로 훑어내리며 이 자세에서 너무도 아름답게 드러난 - 길고 창백한 그의 목을 어루만졌다; 존이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처음 바라본 것이기도 했다.

둘의 키스는 더욱 깊어져만 갔고, 그가 오른손을 들어 머리칼을 감아쥐자 셜록이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셜록의 목을 어루만지는 내내, 존의 아래에서 긴장을 풀고 나긋하게 입을 벌려주어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존이 이끄는 대로, 하고픈 대로 키스하도록 오랫동안 따라주었다. 

평소와는 다른 고분고분한 태도에, 존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불만스러운 듯한 신음소리는 못 들은 척, 셜록의 머리를 그러쥔 손에 힘을 주어 고개를 젖히고는 저 긴 목을 따라 키스해 나갔다. 그러면서 한 손은 셜록의 가슴으로 미끄러뜨려,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끈한 셔츠 위로 도드라지게 드러나보이는 유두를 손끝으로 퉁겨 보았다.

그의 아래, 셜록이 가볍게 떠는 게 느껴졌다. 아아, 저기가 민감한 거군. 존은 그곳을 문지르고 가볍게 꼬집어주었다. 그리고 문득, 피어싱을 한 셜록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잘 재단된 셔츠 위로 드러나보일 링, 하지만 오로지 존만이 만지작거릴 수 있을 그것을.

그 상상에 존은 피가 아래로 몰리는 것을 느끼며,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재빨리 고개를 숙여 셜록의 목 바로 아래를 깨물어 강하게 빨아올리며 손가락을 비틀자, 셜록은 전율하며 숨막히는 목소리로 존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온 몸이 긴장하며, 무릎에 놓여 있던 서류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셜록은 반사적으로 서류들을 붙잡더니 그대로 멈췄다. “존,” 그가 말하려던 게 뭔지는 명백했다.

존은, 셜록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을 가만히 얹어둔 채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머리를 쥔 손을 놓았다.

“미안,” 셜록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 저걸 마무리해야…”

존은 몸을 세워 앉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마찬가지야.” 후회하는 말투였다. “하지만 기다릴 거야. 너도 조만간 긴장을 풀어야 하게 될 테니까.”

셜록은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그의 관심은 이미 서류로 옮겨간 상태였지만, 일어서려는 존의 손을 잡아세운다.

“난…” 말을 꺼내놓고는 목을 가다듬는다. “널 사랑해.” 올려다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게 나인걸.”

“알아.” 존은 그를 내버려두고, 수많은 서류들이 흩어져 있는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아마도 안심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던가보다, 흩어진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셜록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건이 언제나 최우선인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불끈 치솟아 있을 때면 이성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 뿐이다.

몸이 조금 진정되자 주의력도 다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고, 이내 자신이 든 게 ‘기부처’라는 제목의 목록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존은 쭉 정렬된 십여 개 이상의 이름과 단체명을 눈으로 훑어내리다 말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문제 있어?” 셜록이 빤히 쳐다보고 있자, 존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니.” 그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자기네 부지에 저렇게나 많은 돈을 쏟아붓는데, 대체 얼마나 좋은 곳인지가 궁금해서.” 다시금 목록을 훑어보며, “하이게이트 홀,” 집어 말했다. “라이헨바흐 하우스, 모닝턴 저택…” 넌더리난다는 듯 말을 끊었다. “저택 씩이나! 맙소사. 이것들 중 어떤 것도 모리어티 앞가림을 해줄 만큼 허세 쩌는 것 같진 않군그래.” 

갑자기 셜록이 무릎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브룩 부인의 유언… 자선 기부금이라,” 신나는 듯 읊더니, 몇몇 서류들을 더 훑어보았다. “그리고 맨 위의 하브룩 부인은… 기부자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사람이 조정한 거야.” 

“기부금이야, 존. 틀림없어. 놈은 일을 처리해주고 그렇게 돈을 받았던 거야. 아, 천재적인데!” 존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건 알아차리지 못한 채, 셜록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놈들은 전국 곳곳에 자리잡고 있겠군, 귀찮겠는걸.”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싸해보이는 후보들부터 시작하면 돼 - 네가 말했던 것들 중에 하나랑, 다른 몇몇 곳까지.” 

존은 익숙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끼며, 팔짱을 낀 채 테이블에 기대섰다. 셜록은 팔을 휘저으며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열심히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기부금이나 유언장에 적힌 기부 액수에 의구심을 가질 사람은 없지 - 진짜에 위조할 목록을 더해넣은 걸지도 몰라. 그리고 사업적으로 보면, 받은 금액에 대한 절세 효과까지도 누릴 수 있었을 테니, 훌륭하잖아!” 그가 휙 돌아섰다. 빛나는 눈빛, 하지만 박수갈채가 없다는 데 실망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훌륭하네.” 존은 차갑게 덧붙였다.

셜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갑자기 자신없는 표정이 되었다. “존?”

존은 냉담하게 그를 응시했다. “말해봐, 셜록.”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모리어티를 사라져버리게 할 스위치가 있다면, 넌 그걸 내릴거야?”

셜록이 그를 이해하려 애쓰는 걸 바라보며, 다시금 밀어붙였다. “네가 만날 수 있을 가장 최고의 적수잖아. 분명 너와 동등하다고 인정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진 단 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때 마음 깊이 남아 자신을 괴롭혔던 말들을 떠올렸다. “격조있고, 기발한데다, 지루하다는 게 어떤 건지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존은, 그가 했던 그대로 읊어주었다.

셜록은 반 발짝 내딛어 봤지만, 다가설 수 없게 하는 존의 태도를 보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은 네가 나랑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어떻게 견디는지도 모르겠어.” 존은 말을 이었다. 지나치게 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는 사실마저도 더욱 화가 날 뿐이었다. “평범하고, 지루하고, 단순한 존 왓슨 말이지 - 내가 어디 상대나 되겠어? 그 빌어먹을 모리어티놈만큼 ‘유쾌하리만치 흥미로운’ 사람은 결코 될 수 없을 텐데.”

셜록은, 가장 좋아하던 쿠션을 깔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갑자기 뿔이 돋아나 쿠션이 터져버리는 걸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각주:16] 그래, 엉덩이. 존은 반항하듯 생각했다. 나도 내키면 엉덩이 같은 말 따위 생각할 수 있다구.[각주:17] “엉덩이에 뿔난 녀석 같으니라구.”[각주:18] 결국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마는 존이다. 말하려던 내용에 그닥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기분은 조금 나아졌으니까.

셜록의 눈썹이 끝을 모르고 치켜올라가더니, 생각에 빠진 듯 한데 모였다. “넌 우리 둘이 짝짝꿍 잘 맞는다고 했었지.”[각주:19] 그는 노부인이 살해당한 이후의 말다툼을 기억해냈는지, “네가 질투하는 걸 왜 몰랐던 걸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그걸 놓쳤지?”

“그땐 네가 다른데 정신 팔고 있었거든.” 존은 버럭, 화내며 대꾸해주었다. 어째서 둘 중에는 꼭 그가 합리적인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걸까? 흥분한 건 물론이고, 화나고 실망한데다 질투까지 했었다; 그랬다, 셜록을 이렇게나 매혹시켜버린 모리어티를, 지독하게도 질투했다. 그때도 말다툼 내내 좌절 그 이상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던 거다; 그때만큼 떠나버리고 싶었던 순간이 없었다.

셜록은 다른 모든 걸 제치고서까지 모리어티에게 집착해 왔었다. 모리어티가 그를 유혹한 셈이었다. 비단 존에게서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간성은 물론 그가 이뤄왔던 그 모든 것에서부터 꾀어내려던 거나 다름없었다; 셜록은, 유혹당하고 있었던 거다.

“넌 놈을 선택했지.” 이제 존의 목소리는 나직하기만 했다. “넌 날 치워버렸어. 그래야 그놈을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테니까. 넌, 나보다도 그놈을 선택했던 거야.”

셜록은 두 손을 한데 모은채 손끝 너머로 그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수영장에서 모리어티가 했던 말, 왜 내겐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그가 물어왔다.

존은, 갑자기 화제가 전환되자 멍해져버렸다. “미안, 뭐라고?” 그는 되물었다. “보고서 줬잖아. 내가 아는 건 네게 읽어줬어. 그 이상으로는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도 없었고.”

셜록을 바라보다 말고 문득 알아차렸다. “이거… 이젠 기억이 난다는 말인거야? 그 30분, 기억해냈어?”

셜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니, 우습지.” 말을 꺼내고는, “심지어 나조차도 말야.”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저 30분일 뿐이었어. 그렇게 될때까지 걸린 시간의 반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다른 목격자도 있어. 그런 건 기억 상실이라고도 할 수 없지. 머리를 다치게 되었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는 것 정도는 완전히 정상적인 거니까… ‘중요하지 않다’고들 하겠지.”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는지 셜록은 다시 존을 바라보았다. “난 전부터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어. 그러니까, 우리 관계 말야.” 그는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네가 나한테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같이 일도 잘 해나갔고, 서로 잘 맞는 것 같았으니까.”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셜록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던 거다. “네가 있을 때면 늘, 플랫이 따뜻한 느낌이었어. 내 실험 가지고 소리쳐댈 때나, 챙겨먹으라고 잔소리할 때조차도 말야; 나도 싫지 않았어. 네 관심을 받는게 좋았거든.”

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저처럼 날카로운 지성을 자신에게 돌려 스스로의 행동을 분석하고 동기를 추리해내는 건, 셜록이라면 거의 하지 않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런 순간들도 있었지.” 셜록은 미소지으며 마주보았다. 두 사람 모두, 같은 공간은 물론 생각까지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게 뭔지도 잘 몰랐고 그만큼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었어.”

“내 실수였지.” 입꼬리를 살짝 찡그리며 덧붙였다. “네가 그 코트를 열어젖혔을 때, 널 감싸고 있는 폭탄을 보면서도 난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었어. 겉보기엔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모든 게 뒤죽박죽 뒤엉켜 핑핑 돌고만 있어서 무엇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거든. 모리어티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진…” 

갑작스러운 침묵을 깨고 이어진 존의 목소리에는 충격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네 심장을 끄집어내서 태워버리겠다고 했었지.”[각주:20]  

“바로 그거야.” 셜록은 바로 수긍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마주보았을 때에서야 난, 그게 바로 너라는 걸 깨달았어. 내 심장.” 그는 잠시 멈추었지만, 이내 그런 모호한 발언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물론, 비유적으로 말해서 그렇다는 거지.”

“물론이고 말고.” 존은 수긍했지만, 셜록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소시오패스를 놀리지 말라구, 존.” 경고하듯 한마디 한다.

존은 방어라도 하듯 손을 들어보이고는, “아냐, 그럴리가. 그럴 생각도 없어.” 비어져나오려는 웃음을 속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주장했다.

“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셜록은 말을 이었다. “수영장에서 빠져나온 이후부터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어. 내가 뭘 깨달았는지, 뭔가 깨닫기나 했었는지조차도 기억할 수 없었지. 하지만 우리 사이의 유대감, 너와의 친밀한 느낌은 남아있었어. 그리고 그 감정은 모두 다시 자라났어. 네게 키스했던 그 밤, 네게 이야기해줬던 그대로.”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걸 깨달을 때까지, 다시 자라났던 거야.”[각주:21] 

갑자기 밝혀진 이 진실에, 존은 어쩐지 어지러움마저 느껴졌다. 화가 났던 것조차, 그 수영장에서 둘 다 다치지 않고 빠져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의아해하는 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랬더라면 셜록이 감정대로 행동했을까? 존을 더 가까이 지켜보기 시작하고, 그 감정들 모두 화답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리긴 했을까? 어찌되었든간에 둘 사이가 지금처럼 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래서, 네 시력은?”

“기억이랑 한꺼번에 돌아왔어.” 셜록이 대답한다. “수영장에 대해서 계속 꾸던 꿈…”

“우리 둘 다 총에 맞았다던 그 꿈?” 존은 물었다.

“그런 게 아니었어.” 그의 대답이었다. “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내가 봤던 건 - 그러니까 내 잠재의식에서 그동안 실제로 내게 전하려 했던 건, 단 한 발 뿐이었어.”

“네가 말했던 게 그거잖아.” 존이 끼어들어 물었다. “네가 그렇게나 고집스레 소파에서 자려 했을 때 한 발 뿐이었다고 중얼거렸었거든. 의외였지, 내 악몽에서는 두 발이었으니까.” 셜록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네가 맞았을 때,” 존은 설명하면서도, “네가 그 조끼를 쐈고, 스나이퍼가 널 쐈어 - 총성은 두 발이었던 거지. 단 한 번 뿐이었어야 했는데.” 그 기억에 몸서리쳤다.

셜록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까이 다가섰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서는, “내 꿈에서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존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가 총에 맞았어. 하지만 나도 피를 흘리고 있었지.”

“하지만 넌 가슴에 총을 맞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존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셜록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추측이었어. 잠을 자면서도 내 두뇌가 그럴 줄 알았어야 했는데.” 꿈꾸는 버전의 자신을 잊어버리려는 듯한 말투였다. “널 죽게 했던 그 한 발이, 나 역시 죽여버렸던 거지.” 설명을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심장을.”

존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그의 눈빛은, 존이 봐왔던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하고 연약했다. “넌, 사실상 내 일부분인거야, 존. 난 너 없이는 온전하지 않으니까.”[각주:22] 

셜록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그의 두 눈은 타는 듯 빛났고, 두 손으로는 존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 그놈이 사라져버리길 원하느냐고 묻지 마.” 매서운 목소리였다.

“그놈이 널 내게서 빼앗아갔으니까. 네 생명을 위협했으니까. 그놈의 몸에 숨이 붙어있는 한 넌 결코 안전할 수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그런 스위치만 준다면, 난 내려버릴 거야. 버튼이 있다면 누르겠어. 그놈이 지금 당장 이 플랫에 들어온다면, 그자식 눈알이 피로 붉어지고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버릴 때까지 놈의 목을 맨손으로 졸라버릴거야. 넌 내꺼니까. 내 남은 인생 내내, 절대로 네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구. 알아듣겠어?” 

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선 셜록을 두 팔로 와락 감싸안고 사랑한다고, 언제까지라도 그럴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치 감정 그 이상을 이미 겪어버린 셜록이기에,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어색하다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아들었어.” 셜록이 고마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줄 때에서야, 존은 옳은 선택이었음을 알아차리고 조금은 안도했다.

“그러면… 이제 자동차 여행인가?” 존은 고갯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기부처 목록을 가리키며 물었다.

“기차 여행이지, 사실은.” 방금 전까지 감정을 쏟아냈던 탓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살짝 거칠었지만, 금세 셜록의 평소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도중에 내가 운전이라도 배우길 바라는게 아니라면 말야. 요즘엔 아무 바보한테나 면허증을 내주는 것 같으니, 그렇게까지 어렵지도 않을 거라 확신하지만.”

셜록에게 운전을 가르치려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존이었기에, 잽싸게 대답했다. “기차가 좋겠어.” 

셜록은 뭔가 헤아려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며칠 머물러있을 수도 있겠는걸.” 중얼거렸다.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해 조사해볼 시간이 필요하거든.” 

존은 갸웃,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뭔데?”

“주근깨.”[각주:23] 



  • 원문: The Heart in the Whole (17/20): Seeing The Truth 
  • 역자 주석: 이번에도 주석이 많고 + 좀 길다. 드라마나 전편과 연결된 부분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배려돋는 엄마존과 거친 남자라고 쓰고 삐돌이라 읽는 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귀여운 장면만큼은 
      느낌을 살려보고 싶기도 해서;; 이 남자들이 귀여워 죽겠는걸 어쩌겠는가  : ] 

    ※ 업뎃만 간신히 하고 있어 답글까진 못 달고 있네요. 시간 되는대로 몰아서라도;; 달 생각입니다.
        혹 서운하셨다면 죄송해요. 고의는 아니니 그런갑다, 하고 너그러이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 물론 일부 개념없는 글은 그냥 무시합니다. < 이건 극소수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에요. )


  • ◀ 16. 각성 | Waking Up  [ 목록 ]   18. 알고 싶어 | Wanting to Know (A) ▶



    1. ‘John was not distracted by this titbit.’ - 이런데서 평소 언어습관 나오는;; [본문으로]
    2. 16편에서의 셜록과 마이크로프트의 대화 참조. [본문으로]
    3. ‘Piss off, we’re shagging’ - 꺄 >_<♡ [본문으로]
    4. …그런 이야기는 언제 orz [본문으로]
    5. ‘this was the genuine article.’ - 역시 존 한정일 테다. 세상 누가, 자신을 이렇게 잘 알아주겠어. [본문으로]
    6.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는 언제;;; 역시 홈즈가의 종특은 텔레파시일지도. [본문으로]
    7. “I wonder if you would be so kind as to see me out?” - 마이크로프트는 역시 매너남♡ [본문으로]
    8. ‘John adopted his usual approach when a Holmes was being particularly incomprehensible, and ignored it.’ - 시크한 남자 존. [본문으로]
    9. ‘the alternative would probably have been for you to pee on me’ - 짐승st. 영역표시법을 들먹이며 놀리는 것. [본문으로]
    10. “What have you done to me, John Watson?” - 나야말로 묻고 싶다. 당신들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본문으로]
    11. S1-3에서의 등장인물/장소들. [본문으로]
    12. ‘Sherlock was in full-on case mode’ - 스위치 온! [본문으로]
    13. ‘there was always the shower’ - 잠깐, 눈물 좀 닦고… [본문으로]
    14. “So, are you two a 'thing', now?” - thing을 거시기…로 옮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제했;; [본문으로]
    15. “Your area, John,” - S1-1, 여자따위 낫마에리아 드립의 응용편(?). [본문으로]
    16. ‘as if his favourite cushion had suddenly grown teeth and bitten him on the arse’ - 원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가장 좋아하던 쿠션에 갑자기 이빨이 자라나 엉덩이를 콱 물어버린 것처럼’이겠지만, 이렇게 옮기는 이유는 각주18에 이어서. [본문으로]
    17. ‘I can bloody well think arse if I want to’ - ‘둔부(backside)’라고 수줍게 말하던 셜록을 감안해서(13편), 존은 생각할 때도 일부러 ‘엉덩이(arse)’처럼 직접적인 표현은 피했다(16편). [본문으로]
    18. “Arse.” - arse는 ‘엉덩이’라는 뜻이지만 ‘멍청한 놈’ 정도의 가벼운 욕(?)으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셜록을 배려해서 arse같은 단어 쓰는 것조차 조심조심 참아왔던 존이지만, 지금은 제대로 삐져서 쏘아주고 싶은 마음에 확 말해버린 것. 하지만 옮길 때 ‘엉덩이’라는 말을 쓰는 맥락을 이어가면서도 벙 찐 표정을 설명하는 장면과(각주16), ‘멍청하다’는 뉘앙스를 살릴 표현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다가 제 앞가림 잘 못한다는 의미의 ‘엉덩이에 뿔났다’는 표현을 골랐다. [본문으로]
    19. “You hoped we'd be very happy together.” - S1-3의 대사. 더빙판의 번역을 따른다. [본문으로]
    20. ‘he would burn the heart out of you’ - S1-3의 대사. 더빙판의 번역을 따른다. [본문으로]
    21. 15편 참조. [본문으로]
    22. “Effectively, you are a part of me, John. I'm not whole without you.” - 한글 제목에 대한 역자의 잡설 참조. [본문으로]
    23. “Freckles.” - 14편 참조. 주근깨 있냐고 묻던 셜록을 기억하시라. 앙큼한 녀석♡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