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자로 말해요 | I Prefer to Text (1/2)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존은 점점 더 당황스러워졌다. 이게 다 셜록 때문이다. 이 새로운 플랫메이트에 익숙해지는 데 몇 주 걸렸단 말이다. 처음 생각했던 게 여러모로 옳긴 했다; 셜록은 제대로 정신나간데다, 거만하고 무례했다. 한편으로는 호감 가는 매력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모리어티와의 조우 이전까지만 해도, 이 특성들은 모두 이 남자 안에 평화롭게(셜록 홈즈가 연관된 것 치고는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있고부터, 존은 두 남자와 플랫을 같이 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책 어딘가에 나오던 상황처럼 말이다. 낮의 셜록은 훌륭하긴 하지만, 여전히 무례하고 거만한데다 신랄하고 냉혹하면서 동시에 유치하고 퉁명스러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를 사건에 끌고 다니고 시도때도 없이 바이올린을 켜대는 건 물론, 냉장고에는 비위생적인 것들을 쟁여두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반면에, 매일 밤 존이 침실로 자러 들어간 다음이면 어김없이 셜록의 상냥한 면이 나타나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존은 소리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플랫메이트가 밤이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라도 한다는 건가? 왠지 웨어울프 정도라면 그럴지도. 거의 스위스제 시계만큼이나 정확했다: 존이 윗층으로 올라가 이를 닦고 파자마를 갈아입은 다음, 이불을 덮고 눕는다. 그러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삑, 울리는 거다. 문자로 만나는 셜록은 친절하고 다정해서 호감 가는, 걱정할 줄 아는 상냥한 남자인데다 심지어 유머 센스까지 갖추고 있었다. 존은 둘만의 늦은 밤 대화가 정말 즐거웠다. 기대하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가끔은 전혀 피곤하지 않은데도 셜록이 문자를 보내오게끔 자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조심해야만 했다. 오후 7시부터 올라가버리고 싶어지긴 하지만, 완전 수상해보일 게 뻔한데다 둘이 이야기하던 걸 억지로 끊어서 셜록이 긴장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산 지도 몇 달, 존은 가끔 이 플랫메이트의 뛰어난 머릿속에서 - 추리 말고 -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의아해지곤 했다.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저 숨겨진 생각들 중 일부에 특별 접근 권한이라도 얻어낸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았던 거다. 문자를 보낼 때면 셜록도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완전히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게 살인 동기와는 전혀 관계없을 때조차도.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얼굴 맞대고 하는 건 영 내켜하지 않는 듯 했기에, 거기까지는 존도 지나치게 강요하려 들진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저 상냥한 말들을 셜록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듣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얼굴을 맞대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썩 내켜하진 않는 것 같았기에, 존은 그 부분을 지나치게 강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저 상냥한 말을, 셜록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듣고픈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만약 스스로에게 솔직했다면, 그는 세상 단 하나뿐인 이 자문 탐정에게 살짝 반해 있다는 걸 인정했을 거다. 만약 스스로에게 정말 솔직했더라면, 그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외면하려 했었다. 부드럽게 닿아오는 손가락에 심장이 빠르게 뛰지 않는 척, 버튼이 두개 풀어진 짙은 보랏빛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늘고 긴 목덜미에 설레지 않는 척 하려 했었다. 서로 주고받은 문자를 읽고 또 읽는 건 자신도 모르게 웃게 된다거나 엔돌핀으로 차오르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그저 병원 점심 시간에 지루하기 때문인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고도 해봤었다. 하지만 자신과 이 플랫메이트 사이의 감정은 우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간신히 설득해내더라도, 그러자마자 곧바로 셜록이 부엌에 선 그의 뒤로 기척도 없이 다가와, 존이 제일 윗쪽 선반에서 꺼내려 애쓰고 있던 뭔가를 집어주면서 존의 등에 몸을 바짝 맞대오는게 아닌가. 아니면 그런 류의 작은 표현들이라든가. 존이 정말, 진짜 스스로에게 솔직했더라면, 셜록을 향한 끌림은 점점 더 외면하기 어려워질 뿐임을 시인했을 테다.

그런 이유로다가, 존은 해리의 담당 의사에게서 누나가 급성 췌장염으로 고생하다 입원했다는 전화를 받고도 그닥 화나지 않았던 거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이 알콜 중독자인 누나는 수년간 자신의 몸을 엉망으로 망쳐오고 있으니, 췌장이라고 예외일 리 없는 거다. 존은 그녀와 며칠을 보낼 일정을 잡기 시작했고, 우선 기차표부터 끊은 다음 찬장에서 낡은 군용 더플백을 꺼내 옷가지와 세면도구 등등 갖가지를 싸넣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셜록은 문가에 기대서서 가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존은 말했다. “해리는 지독한 누나인데다, 내가 저런 누나가 바라마지않는 관심을 줘서 부추기고 있다는 거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구요?” 셜록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겨우 며칠 다녀오는 것 뿐야, 부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아줘.” 존의 간청에도 셜록은 대꾸 한마디 없이 홱 돌아서서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소파에 털썩 몸을 던지더니, 까만 가죽 등받이를 마주보고 웅크려 누운 채로 팩 토라져 버리는 거다. 존이 가겠다며 인사를 하는데도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소파 등받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셜록이었다. 





존은 병원에서의 기나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해리의 빈 플랫에 들어섰다. 그는 문에 기대선 채로 눈을 감고 몇 번 심호흡했다. 해리의 상태는 심각하긴 해도 치명적이진 않았고, 의사가 모르핀을 처방해서 진통을 억제해준 다음부터는 낮시간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녀가 자는 동안은, 낮시간 텔레비전 방송을 보거나 담당 의사와 그녀의 예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평화롭게 보냈다. 하지만 일단 깨어나면 그녀는 매우 불쾌하게 구는 터라,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존은 왜 서로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건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면회 시간이 끝나자마자 몇 시간이나마 조용하고 평화롭게 보내고픈 마음으로 누나의 플랫으로 돌아온 거다.

진하게 우려낸 차를 연거푸 두 잔 마시고 피부에 들러붙은 병원 냄새를 샤워하면서 박박 문질러 지워낸 다음, 그는 소파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각주:1] 그는 느릿느릿 채널을 넘겨보았지만, 집중하지는 않고 있었다. 플랫이 너무 조용했던 탓이다; 그는 시끄러운 바이올린 소리와 부엌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이 그리웠다. 맙소사, 셜록이 그의 블로그 포스팅이나 책 취향 가지고 뭐라 하는 것까지도 그립다니. 존은 그닥 망설이지도 않고 핸드폰을 열어, 늦은 밤 문자를 처음으로 먼저 보냈다.


우리 플랫 아직 멀쩡해?


셜록의 답장은 너무나도 빨리 도착했다. 존의 문자가 오기만 기다리며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던 게 아니면 이보다 더 빠를 수는 없을 거다.


일단은 그래요. 어때요?

지칠 대로 지쳤어. 해리가 아프지만 않았으면 차트로 갈겨줬을지도. 넌?

지루해요. 이젠 레스트라드가 내 문자에 답도 안 해줘요.

얼마나 보냈길래?

조금요. [각주:2]

그만 물어보라고 일부러 대충 대답하고 있는거지?

그렇죠.


존은 소리내어 웃으며, 마음 속에서 느껴지는 따스함만큼 몸도 덥혀 보려 소파 팔걸이에 걸려 있던 묵직한 담요를 집어 어깨까지 올려 덮었다. 그리고는 답장을 쓰려 했지만, 셜록이 더 빨랐다.


해리는 어때요?

신체적으로? 괜찮아질거야. 진통 억제용으로 모르핀도 맞았고, 장도 좀 쉬게끔 아무것도 안 먹이고 있거든.

왜 그런건지는 안대요?

왜 그런건지야 다들 알지. 우리가 대학 다닐때 췌장염을 일으키는 일반적인 원인을 기억할 때 쓰던 연상법이 뭔지 알아? ‘I get smashed’였어. [각주:3]

글자들 의미가 뭔데요?

맞추면 선물 가져다주지. 힌트 하나 줄게: 첫번째 E는 ethanol(에탄올)이야.

집에는 언제 올 건데요?

내일 오후쯤.

Idiopathic, gallstone, ethanol, trauma, steroids, mumps(또는 다른 바이러스), autoimmune disease, scorpion/snake sting, hypercalcemia/hyperlipidemia/hypothermia, endoscopic retrograde cholangio pancreatography, drugs. [각주:4]


구글로 검색한 티가 확 나지만 않았더라면 인상적일 뻔 했다.


축하하오, 탐정 나으리. 내 그대를 구글의 제왕으로 임명하겠소. [각주:5]

나 뭐 줄 거에요?

기다려 보시죠. 난 슬슬 자러 가야겠어.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 가고 싶거든.

거기도 조용해요? 여긴 조용하거든요.

조용하다 못해 으스스할 정도야. 보고 싶다.


그는 꽤나 대담해진 기분이었다. 이래서 셜록이 문자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보통 말하지 않고 넘겨버릴 것들도 이야기하기 편하니까. 여느때처럼 답장이 빨리 오지 않자, 존은 너무 나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답장은 왔고, 그는 너무 헤벌쭉 웃어버린 나머지 치켜올라간 볼 윗쪽이 스스로의 눈에도 보일 지경이었다. 


나도 보고 싶어요.

이제 자러 간다.

런던 근처까지 왔을 때 문자 주면, 도착했을 때 먹을 게 기다리고 있을거에요.

넌 최고의 플랫메이트라니까. 잘자, 셜록.





그때 런던에서는, 세상 유일의 자문 탐정님께서 존의 스웨터 중 한 벌을 베개삼아 괴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웨터가 원래 베개보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뿐, 감상적인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최소한, 추궁이라도 하듯 텅 빈 동공으로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해골에게 셜록이 대꾸한 바로는 그랬다는 거다.

넌 최고의 플랫메이트라니까. 잘자, 셜록.

그는 핸드폰 화면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답장을 입력했다.

잘자요, 존. 사랑해요.

오랫동안, 셜록은 조그만 검정 글자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 튀어나와버린 것 같은 말이었지만, 화면에 쓰여진 그 말을 봐도 그렇게까지 놀랍진 않았다. 읽고 있는 지금은 오히려 명백해보일 정도였다; 이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제껏 주위에서 봐왔던 것과는 전혀 달랐지만, 지금까지는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었으니까. 그는, 존을 사랑하는 거였다. 존은 셜록을 사랑할까? 그간 몇 번 받아본 적도 있었지만, 원치 않는 사랑 고백은 불편했다. 존을 당황스럽게 하거나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그는 결국 마지막 부분을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지금 당장은. 

잘자요, 존.





존이 없는 며칠은 길기만 했다. 지난 몇 달간 이 남자가 있는데 익숙해져버린 탓에, 셜록은 혼자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게 꽤나 어렵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해골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도 했지만, 해골은 존이 오면서부터 외면당한 것 때문에 그에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셜록은 사건으로라도 머리를 바삐 굴렸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레스트라드가 그의 문자들을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 계속. 그는 바이올린도 켜 보고 삐져 보기도 했다. 존에게 문자를 보내려 몇 번이나 핸드폰을 집어들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존이 집에 없으니까. 물론 그가 나가 있을 때 셀 수도 없을 만큼 문자를 보냈었더랬다. 하지만 그럴 땐 뭔가 중요하게 물어볼 거나 해야 할 게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언제나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존에게 문자를 보낸다는 건 아예 새로운 영역이었던 거다. 다행히 존이 먼저 말을 걸어온 덕분에 내적인 갈등도 끝나긴 했지만. 

다음 날, 존은 40분쯤 후면 플랫에 도착할 것 같다고 셜록에게 문자로 알려주었다. 셜록은 그 즉시 파자마에서 평소 차림인 수트로 갈아입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존이 제일 좋아하는 인도식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는 존이 먹고 싶어하는 걸 빼놓지 않도록 모든 걸 조금씩 다 주문했다.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지만, 존이라면 남은 음식을 출근할 때 싸들고 가는 걸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존, 존, 존… 언제부터 존이 좋아하는 대로 하기 시작했던 걸까? 흥미로운 생각이었지만, 더 고민해볼 시간은 없었다. 집으로 나를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다, 테이블도 치워야 하니까.

그가 찬장에서 접시 두개를 막 꺼내들었을 때, 바깥쪽 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존이다! 문이 열리고, 허드슨 부인이 돌아온 세입자를 반기며 플랫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간 둘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동안 음식은 식고 있는데다 셜록은 슬슬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윗층에서도 존이 피곤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고, 해리의 상태를 묻는 집주인에게 예의바르게 대답하고는 있지만 목소리에서도 불편함이 느껴졌다. 결국 참다 못한 셜록이 허드슨 부인에게 질투중인 해골바가지라도 던져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쯤, 플랫쪽 계단으로 올라오는 존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킁킁거리며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인도 음식이야? 넌 정말 최고의 플랫메이트라니까!” 

“명백하죠.” 그는 존에게 다가서서 가방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았고, 코트를 벗는 걸 도와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어서 와요.”

“집에 오니까 좋다.” 함께 부엌으로 향하며 존이 대답했고, 둘은 셜록이 대부분의 실험거리들을 열심히 치워놓은 테이블에 앉았다.

존은 해리와 병원은 물론, 같이 이야기했던 거나 존이 말은 꺼내봤지만 소득은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알콜 문제가 어떻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는지, 대화할 때마다 항상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 누나가 입을 열 때마다 씁쓸한 분노를 느끼지만, 반대로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면 애정을 느낀다고도 셜록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셜록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에. 심지어 음식도 조금 먹었다. 존이 협박이라도 하듯 너무 오래 째려보는 순간 뿐이긴 했지만. 

일단 존이 지난 이틀간의 제일 불쾌했던 사건들을 가슴에서 덜어내고 난 다음에는, 둘은 기분 좋은 침묵 속에서 ‘집’만이 줄 수 있는 따스한 느낌을 만끽하며 밥을 먹었다. 물론 셜록은 떠난 적도 없긴 했지만, 존은 이제 베이커가를, ‘집’을 구성하는 일부분이었기에 돌아온 그와 함께 하는 게 좋았다. 존과 집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 존이 갑자기 움찔하는 것 같아 셜록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났어!” 존은 큰 소리로 외쳤다. “’I get smashed’! 그 연상법 의미 알아냈잖아. 뭐, 부정행위긴 했지만.”

“구글에서 검색하면 안된다고 한 적도 없으면서.” 셜록은 불퉁하게 대꾸했다.

“나도 안한 거 알아. 그러니까 너 줄 거 가져왔지.”

셜록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그는 존이 농담하는 거라 생각했었고, 심지어 선물을 준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피식, 웃기까지 했었다.

“나 줄 거 진짜 가져왔어요? 병원 안치소에서 가져온 건가?”

“당연히 아니지. 내 코트 주머니에 있으니까, 갖고 싶음 꺼내가.” 그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별건 아냐, 정말. 시간이 얼마 없긴 했지만 너 줄 거 꼭 찾아보고 싶었어. 바람도 쐴 겸 해리한테서 좀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해서 병원에서 나왔는데, 조그만 니트가게 하나가 눈에 띄더라구. 처음에는 스웨터를 사줄까 했는데, 음, 넌 내가 입은 거 놀리길 좋아하니까 나도 네가 입은 거 놀릴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저거 보니까 네가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음에 안 든대도 괜찮아, 상처받진 않을 테니까.”

존이 초조하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사이, 셜록은 잽싸게 일어나 이 플랫메이트의 코트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에, 얇은 종이로 정성스레 싸여있는 작고 보드라운 물건이 있었다. 조심조심 풀어보니 세 켤레의 양말이었다. 그는 한 켤레를 집어들었다. 짙은 회색에 놀라우리만치 가벼웠다.

“그건 대나무 섬유로 만든 거래.” 존이 설명해주었다. “많이 뛰어다니는 사람에게 좋은 거라기에, 자연스레 네 생각이 났어.”

셜록은 두 손가락으로 천을 문질러 보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도 재어보면서 회색 양말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만족스러울 만큼 관찰한 다음,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다음 걸 살펴보기로 했다. 두번째는 까만색으로, 역시 매우 가벼운 재질이고 - 그의 두뇌가 캐시미어라고 일러주었다 - 정말 부들부들한 느낌이었다.

“그건 캐시미어고,” 존이 말한다. “답답하진 않으면서 발을 따뜻하게 해줄거야.”

셜록은 대나무 섬유 재질의 양말과도 다름없는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며 두번째 양말을 관찰했다. 포장을 풀고 나서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존은 선물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점점 더 초조해지기만 했다. 잠시 후 두번째 양말 역시 첫번째와 같이 테이블에 놓였고, 셜록은 마지막 한 켤레로 관심을 돌렸다. 세련된 감청색의, 굵직한 털실로 짜여진 손뜨개 양말이었다.

“그건 정말 추운 겨울밤에 집에서 신는 거야. 네 파자마 바지랑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 가끔 네 발이 차가워지는 거 알거든. 넌 책상다리를 하고 앉든지, 내가 소파에 노트북 열어둔 채 내버려두면 꼭 그 밑에 발을 넣더라구. 하지만 말했다시피, 꼭 신지는 않아도 돼. 그냥 별거 아닌 선물이고, 네게 뭔가 갖다주기로 했었으니까…”

셜록은 마지막 한 켤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가, 마음을 바꿔 다시 모조리 다 집어들었다.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고맙고 또 기뻤다. 존이 자신을 위해 가게에 들러주었다는 것과, 어울릴 만한, 쓸만한 뭔가를 고르는 데 시간을 들여주었다는 사실이. 온 몸을 타고 퍼져나가는 온기, 마치 그의 대뇌변연계[각주:6]가 뜨개양말로 감싸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존…” 셜록은 입을 열었지만,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럼에도 존의 행동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했다. 지금 느끼는 이 따스함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방법 말고는… 아!

“꽤나 늦었네요, 요 며칠 피곤했죠. 당신 자러 가는게 좋겠어요.” 그는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존은 처음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셜록이 갈망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어떤 상황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닥, 끄덕여보이더니, 셜록이 양말들을 꼬옥 쥐고 부엌 한복판에 멀뚱하니 서 있는 동안 남은 음식들을 냉장고에 넣어두기 시작했다. 존은 정리를 마치자마자 가방을 집어들고는, 마음에도 없는 잘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두 사람 다, 존이 자러 가는 거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존이 욕실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셜록은 받은 선물을 들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어떤 양말을 먼저 신어보고 싶은지 고르는 데에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 일단 대나무 섬유 양말은 제외했다; 그건 달리거나 어딘가 타고 올라가고 뛰어다닐 때를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결국 그는, 존이 파자마 바지와 잘 어울릴 거라 했던 뜨개양말을 신어보기로 결정했고, 그 말이 맞았다. 셜록은 만족스러워하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고는, 핸드폰을 쥐고 침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윗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존이 침대에 누웠다는 게 명백해질 때쯤, 그는 문자를 보냈다. 


나 줄 선물을 고르는데 이만큼 생각해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럼, 그거 마음에 드는거지?

아주 멋져요, 고마워요.

음, 멋진 건 너야. 그런 말 자주는 못 들었을 것 같지만.

당신은?

몇번 있어. 거의 몸에서 총알을 빼내준 다음이긴 했지만.

내가 말해준 적 있던가요?

없었을걸.

당신 멋져요.


셜록의 핸드폰은 다시 울리지 않았고, 그는 당황하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존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데 대한 답이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는데, 침실 문에서 들려오는 작은 노크 소리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셜록은 애원하듯 문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럴 수는 없단 말이다.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건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쪽으로 와. 열진 않아도 돼.


그는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틈 사이로 바닥에 앉아있는 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판 옆에 무릎을 꿇고 그대로 기다렸다.

“부탁이야, 셜록.” 존이 속삭이는 소리. “말로 해줘. 난 꼭 들어야겠어.”

셜록은 어렵게 마른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았다. 눈을 감고 가슴을 진정시키려 - 최소한 숨이라도 고르려 애써보았다. 존은 문 건너에서 그대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몇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당신, 멋져요.”[각주:7] 속삭이는 그의 대답에, 반대편에서 존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있을 때,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네게 하고 싶은 말들을 계속 생각했었어. 네가 옆에 있는 게 너무 익숙해져버렸나봐, 네게 말을 걸려고 돌아섰는데 네가 없는거야.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 그저 돌아오고만 싶더라.”

“나도 보고 싶었어요.” 셜록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말을 소리내어 하려니 이상한 느낌이긴 했지만, 생각했던 만큼 불편하진 않았다.

“내가 놀래킨 건가?” 존의 물음에, 셜록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 괜찮아요.” 

“그럼, 이제 곧 놀래킬지도 몰라.” 존이 말했다. 셜록은 그가 심호흡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나, 널 사랑하는 것 같아.”

“그런 것 같다구요?” 그는 핸드폰을 더 꽉 그러쥐며 물었다.

“그래.” 존이 나직하게 속삭였고, 셜록은 얼굴을 찡그렸다. 존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니. 틀림없이 좋은 거다, 사실 정말 좋은 일인 거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거다. 분명 알아낼 방법이 있겠지; 질문을 한다거나, 테스트를 해볼 수도.

“알아내면, 나한테 이야기해줄래요?” 다른 할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기에 그냥 물었다. 그러자 문 반대편에서 존이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맙소사.”같았지만 확신은 서지 않았다.

“네가 문을 열어주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존이 말했지만, 셜록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문을 열어줄 걸 알고 있었다. 존이 부탁한 거니까, 존이 열어달라고 한다면 자신은 그 어떤 문이라도 기꺼이 열어주고 말 테니까. 하지만, 머뭇거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건너편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전직 군의관이 있고, 그것만으로도 문을 열어줄 이유가 되기엔 충분했다.[각주:8] 존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는 했지만, 문을 열었을 때 문득 셜록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걸 깨달아버리면 어쩌지? 열심히 스스로와 싸우고 있는데(한번도 이만큼 강력한 논쟁 상대는 만나보지 못했다) 핸드폰이 울려, 그는 존의 문자를 읽으려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알 수 없는 암호같은 문자였다.


:-*


“존? 이거 무슨 뜻이죠?” 셜록은 물었다.

“문 열어봐, 바보야.” 존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셜록은 결국 자신이 문을 열게 될 걸 알았기에, 피할 수 없다면 미루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존이 바보라고 했다. 존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알아내고 싶다고도 했다. 존은, 문을 열어주길 바라는 거다. 셜록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고, 문 너머로 움직이는 존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자신의 플랫메이트를 마주보았다. 그의 친구, 그의 존을.

“안녕.” 존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안녕.” 셜록은 대답했지만, 인사 끝자락에는 보이지 않는 물음표가 달려 있었다.

존은 셜록에게로 한발짝 다가섰고, 셜록 역시 본능적으로 존에게로 한발짝 다가섰다. 존이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목을 감싸오자, 그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건, 네게 키스하고 싶다는 뜻이야.” 존의 속삭임. 그건 셜록이 보기에도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는, 존이 자신의 입술까지 더욱 다가올 수 있도록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는 존의 등 아래를 끌어안았다. 존이 초조한 듯 입술을 핥자 애타게 만드는 혀 끝이 아주 잠깐, 유혹하듯 드러나보였다. 그리고는 셜록이 미처 뭔가 해보기도 전에, 존은 거리를 좁히며 다가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문 탐정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이 탐정은, 존의 키스를 한껏 만끽했다. 그의 입술은 따뜻하고, 살짝 촉촉하고 탄력있는데다 뭘 하는지도 정확히 잘 알고 있었다. 곧바로 존의 손이 셜록의 머리카락 사이로 밀고 들어와 한층 더 가까이 그를 끌어당겼다. 저 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셜록은 거의 신음소리나 다름없이 들릴 -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고, 존은 키스하던 걸 잠시 멈추고 소리내어 웃었다.

“확정할게: 나, 널 사랑해.”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고, 그 미소는 셜록의 얼굴에도 그대로 옮겨갔다. “맙소사, 널 사랑한다구.” 덧붙이기가 무섭게, 셜록은 다시 한번 키스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날 밤 늦게, 둘은 소파에 함께 앉아 있었다. 셜록은 팔걸이에 기대 있었고, 존은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이 탐정님은 존의 살갗 구석구석을 만지고, 키스하고, 냄새맡고 맛볼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며, 그때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비어져나오는 신음소리를 신중하게 분류해보는 중이었다. 존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플랫메이트의 입술이 와닿을 수 있도록 살갗을 더욱 드러내주고 있었다. 이 순간 셜록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길고 창백한 팔에 꼭 안겨 있는 존의 상체, 한데 얽힌 두 사람의 다리. 얇은 회색 면바지 차림인 셜록의 말도 안되게 긴 다리 사이에 끼어, 존의 낡은 회색 트레이닝 바지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소파 반대편 끝에서 새 뜨개양말을 신은 셜록의 발을 나른하게 부벼대고 있는 존의 맨발. 셜록은 저 엄청 따스한 선물을 바라보며 씩 웃고는, 존이 정신을 못 차리게 해준 다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입력했다.

사랑해요.



+)
짧은 문자에 담긴 수많은 말, 그리고 그보다 큰 마음.
아아아, 이런 귀여운 남자들을 봤나. 달달 폭탄이다! 피해!! : ]
  • 그림: 개구리님께서 문을 사이에 두고 기대선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주셨습니다. [여기서] 한번 보셔요~! 



    1. ‘he sat on the sofa with his legs folded under him’ – 이런 자세를 뭐라 하는지 몰라서;; 익숙한 표현으로 옮긴다. [본문으로]
    2. “A few.” - 정말? -_- [본문으로]
    3. ‘I get smashed’ - 아래 각주에 이어서. 이건 사실 중의적인 유머인데, 우리말로는 옮길 방법이 없어 그대로 쓴다. [본문으로]
    4. 각주3에 이어. 췌장염을 일으키는 원인들의 머릿글자를 따서 ‘I get smashed’인 거다.(태정태세문단세… 류의 암기법이랄까. 의미는 순서대로: 특발성, 담석, 에탄올, 스테로이드, 유행성 이하선염, 자기 면역질환, 전갈이나 뱀에게 물리는 것, 고칼슘혈증/고지질혈증/저체온증, 역행성 췌담관조영술, 마약.) 하지만 저 문장 자체는 ‘완전 꼴았다’ 정도의 의미이기도 하다. 췌장염으로 고생하면서 알콜중독이기도 한 해리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인 셈이다. [본문으로]
    5. ‘I crown thee Google King’ - 우리 존은 시크한데다 유머까지 갖춘 남자 >_< [본문으로]
    6. ‘limbic system’ - 감정, 욕구를 제어하는 신경계라고. http://goo.gl/lqf5E [본문으로]
    7. “You’re wonderful,” - >_<;; [본문으로]
    8. ‘there was an ex-army doctor who thought he loved him and if that wasn’t a good enough reason to open the door, nothing was.’ - 부정에 부정을 더한 표현이지만 매끄럽게 의미를 전하기 위해 이렇게 옮긴다.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