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라져버린 도둑 | The Vanishing Thieves



뮤리엘(Muriel)은 한쪽 다리를 굽혀 욱신거리는 종아리를 발로 벅벅 긁으며 다시금 새 신발을 탓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불평은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직장에 나오면서 새 신발을 굳이 신겠노라 결정한 스스로에 대해서부터, 더 나아가 직업 자체의 흠을 찾고 - 보석을 파는 건, 직접 끼는 것만큼 끝내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 내년에 그만두고 나서 할 일들을 상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그 환상 속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두 다리를 뻗고 쉬는 것도 엄청나게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쪽 다리에 체중을 실으면서도, 그녀의 직업적인 미소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시계와 손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점심시간까지는 아직도 15분이나 더 남았다는 걸 재확인하는 중이었다. 언제나처럼 실비아(Sylvia)가 제때 와주리라 생각하면서. 물론, 결코 그럴 리는 없었다. 1월 장사에 임하는 뮤리엘의 자세는 거의 40년째 소매업에 종사하면서 무사히 넘기기 위한 극한의 투지로 굳어졌지만, 스물셋 실비아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뮤리엘이 2분마다 금전 등록기에 100파운드 지폐를 뭉텅이로 넣느라 반복사용 긴장성 손상 증후군에 걸릴 지경인 와중에도, 그녀는 치마 망상에 사로잡혀 비쩍 마른 허리를 벨트에 끼워넣느라 열심일 게 뻔했다.

“감사합니다, 손님. 영수증이에요.” 그날만 벌써 백번도 넘게 같은 인사를 중얼거렸다. “버려 드릴까요?”

다들 그대로 멈춰!

조용히 수근거리던 가게 안에 갑작스럽게 울려퍼지는 고함 소리에, 뮤리엘은 움찔, 놀라며 방금 손님에게 주려던 물건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물건은 그녀의 앞에 있던 책상에 떨어졌고, 상자가 열리며 안에 들어 있던 것이 쏟아져나왔다. 그녀는 얼굴을 구겼다. 십대 애들인데, 난리 치겠네.

시키는 대로 해야 다들 무사할 거야!

이게 무슨? 시야를 가리고 서 있던 손님들이 옆으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소동의 주인공이 뮤리엘의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막 들어선 두 사람은, 머리에는 방한모를 눌러 쓰고 온 몸을 거의 가릴 정도로 긴 우비를 똑같이 입고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들고 있는 건… 저거 인가? 그녀는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너!” 남자는 총으로 중앙 디스플레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조프리(Geoffrey)를 가리켰다. 일갈하는 수염 끝이 분노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거 채워넣어.” 그는 다른 강도가 들고 있던 카키색 여행가방을 가리키더니, 대여섯 명의 손님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직원 아닌 놈들, 저 뒤로 가 있어.” 시계를 전시해둔 작은 카운터 쪽으로 손짓하며 남자는 말했다. “무릎 꿇고, 땅에 머리 박아. 그리고 입 다물어.”

그는 두번째 여행가방을 칼(Karl)에게 던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은 유일한 다른 직원이기도 한 그는, 공포에 질린 채 손을 내리며 더듬더듬 가방을 받아들었다. “시계들 가방에 담아. 1분 준다.” 이제 두 손으로 총을 쥐고 칼을 겨눈 강도는 한층 더 위협적으로 보였고, 안경 너머 칼의 창백한 두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휘둥그레졌다. “좋은 건 다 넣도록 해… 안그러면 목에 총알 구멍을 내줄 테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뮤리엘의 시선은 다른 도둑 쪽으로 향했지만, 남자는 일당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프리 쪽으로 가서 중앙 카운터를 헤집기 시작했다. 되돌아보았을 때, 총구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고양이 문 잠가두고 왔는데.’ 어이없게도 이런 생각부터 떠올랐다. ‘미스토플리스씨[각주:1] 못 들어가겠다.’ 그녀는 총을 든 남자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들 내놔.” 남자는 총으로 가리키며 말했고, 그 끝을 따라 바라보자 그녀가 막 건네주려던 물건, 커프스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계산 안 했는데요.”

남자가 그녀를 곁눈질하며 한층 더 다가선다. “강도질이 뭔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은데, 아줌씨.”

뮤리엘은 총구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이지 총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라도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음… 남자의 천이라고 해야겠지. 시커먼 모직 천으로 둘러싸인 얼굴 가운데, 회색 눈동자 한 쌍이 형형하게 빛났다. 안달내는 듯한 눈빛.

남자는 가게 나머지 부분을 슥, 둘러보며 소리를 지르더니, “30초!”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아침에 꽤나 바쁘셨지?”

“엄청 바빴죠.” 뮤리엘은 상황에 전혀 안 맞는 ‘업무상 대화’용 미소가 자신도 모르게 걸리는 걸 느꼈다. “1월 세일인걸요, 어떤지 아시잖아요.”

“그 계산대엔 돈도 많이 들었겠는걸?”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전…”

“열어.”

뮤리엘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계산하지 않고서도 계산대를 열 수 있지? 방법이야 있겠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 좀 앉아야 할 것 같아요.”

열라니까!

초록색 버튼이었던가? 해볼 만 한 것 같은데. 신호등도 초록불일 때 가는 거니까. 그녀는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

“셋을 세겠어…”

버튼들이 흐릿해져갔다. 이렇게 흐릿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제 버튼을 찾아야 하지?

“하나…”

“그 여잔 내버려둬요!” 가엾은 조프리. 가게에 이런 난리가 나다니, 이거 가지고 평생 법석을 떨겠는걸.

“둘…”

총구가 그녀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총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총은 계속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세…”

손을 뻗어보았다.

“어렵진 않지?”

뮤리엘이 눈을 떴을 때, 총을 든 남자가 열린 계산대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돈 가방에 넣어.”

그녀의 시선은 텅 빈 서랍으로 향했다. 엄청 바쁜 아침이었는데. 그녀는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전 가방 없는데요.”

슬로우 모션처럼 총이 휙, 날아와 그녀의 옆머리를 내리쳤다. 





“또 생겼다네. 셜록은 관심 있을까?”

존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소파에 거꾸로 누워있는 셜록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진짜 말 그대로 거꾸로라는 거다. 잠옷 차림인 두 다리가 벽을 따라 쭉 뻗어, 발 끝으로는 벽에 그려진 스마일을 긁고 있는데다 커피 테이블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머리와 어깨는 시트 쿠션 가에 대롱대롱 걸친 채니 말이다. 극도로 위태위태해보이는 자세를 하고서는 스스로에게 쿡쿡, 침을 찔러넣고 있는 중이기까지 했다.

존은 그대로 돌아섰다. “아, 관심 있죠, 그럼요.”

뒤에서 둔탁한 쿵, 소리가 들렸지만 존은 돌아보지 않았다. 의학적인 관심을 쏟아봤자 상처받은 자존심이 나을 리 없다는 것쯤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보라 마틴 사건 이후로 벌써 2주나 지났는걸요, 게다가 그놈의 휴일 기간 덕분에 조용하기 그지없었구요. 저 인간, 정말로 벽까지 들이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각주:2]

전화 너머로 레스트라드의 너털웃음이 전해져 왔다. “좀 기분 전환이 되겠는걸. 셜록 끌고 첼시로 오게나, 자네들 도착할 때까지 앤더슨이 손 못 대게 잡아둬볼 테니까.”

존은 내용을 메모하고는 전화를 끊었지만 흥,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돌아보지 않고 기다렸다. 흥분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는 표시겠다.

“네 그 ‘사라져버린 도둑’ 사건, 또 생겼다더군.”

온통 시무룩하던 셜록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훌륭해!” 그는 늘 신이 나면 하던 것처럼 존의 어깨에 손을 올릴 뻔 하다가 재빨리 치웠다. “금방 옷 갈아입고 올게 - 나갈 준비 됐어?” 말하면서 벌써 돌아서 가버리는 셜록이다.

“잠깐!”

셜록은 고분고분하게 멈춰섰고, 존은 그에게로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묘하게 불안한 표정이 셜록의 얼굴을 스쳐갔고, 그는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너 뭐 하는 거야?”

“가만 있어봐.”

“존, 난…”

“가만히 좀 있어 줄래?” 존은 그의 허리를 붙들어 가만히 세웠지만,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겁에 질린 듯 화들짝 놀라는 반응에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세상에, 요즘 너 너무 예민하잖아. 뭔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 목표물을 잡는 데 성공한 그는, 그대로 쑥 뽑아냈다.

“아야!”

“뭐, 그대로 양말 신겠다고 주저앉았다간 그 ‘아야!’ 보다 더했을걸,” 존은 침을 들어보였다. “이 위에 앉아버렸을 게 뻔한걸.”

셜록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한번 매섭게 노려봐주고는, 감히 자신의 엉덩이님을 다치게 하려 들었던 - 불쾌하기 그지없는 도구를 버려둔 채 방으로 성큼성큼 돌아가버렸다.





앤더슨보다 먼저 범죄 현장에 간다는 게 엄청난 회유책이었던지, 그는 존이 택시비를 내도록 버려둔 채 쏜살같이 튀어나가버렸다. 그가 뒤를 돌아볼 때쯤에는, 셜록은 어마어마한 특혜 입은 기운을 물씬 풍기는데다 가벼운 경멸까지 섞인, 예의 그 ‘전 구역 출입’ 태도로 이미 문가에 서 있던 젊은 경찰관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젊은 남자는 승인을 받고 나서야 들여보내주겠다는 결심을 한층 더 굳힌 듯한 태도로 어깨를 펴고 섰지만, 그때 보석상 안쪽에서 레스트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일행일세, 그리닝(Greening)! 들여보내줘.”

“알겠습니다, 경위님.” 그리닝 경관은 물러서며 의구심 가득한 눈길로 존을 훑어보았다. 존은 군인답게 목례를 건넸지만, 어쩐지 자신을 제외한 모두에게 훤히 보이게끔 ‘난 같이 다니는 남자들과 그렇고 그런 사이임’이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이라도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셜록은 보이지 않는 병 안에 갇혀 잔뜩 화가 치민 파리마냥, 중앙 디스플레이 카운터 근처를 쌩하니 지나가고 있었다. “그 필름 좀 봐야겠습니다.” 그는 레스트라드에게 지시하듯 말했고,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방 구석 위에 달린 보안 카메라가 존의 눈에 들어왔다. 위아래 양옆으로 들쑤시고 다녔던 건 아무래도 시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야드에 갖다놔야겠는걸. 길가의 CCTV 영상도 구하는 중이야. 목격자들은 뻔한 이야기만 하고 있지만 말이지.”

“뻔한 이야기가 어떤 겁니까?” 지금까지는 사건에 그닥 관심을 갖지 않았던 존이 물었다.

“도둑놈들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건물 앞에서 트럭이 와서 바깥쪽 카메라 시야를 딱 막아섰다는 걸세.” 레스트라드가 설명해 주었다. “놈들이 떠날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는군.”

“골칫덩어리 커다란 트럭 안에서 왔다갔다 했다면야 딱히 사라져버린 건 아니겠네요.” 존은 저쪽 작은 카운터 뒤로 사라져버리는 셜록을 바라보며 지적했다.

“하지만 놈들은 그러지 않았다네.” 레스트라드가 대답했다. “최소한 우린 그랬다고 생각 안 한다는 거지. 런던 거리는 북적북적하잖나 - 트럭 운전수가 다른 운전자들과 언성 높여 싸우게 되는 거야 당연지사 아니겠나. 가끔은 창 밖으로 고개 내밀고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더군. 사람들은 그 트럭을 주목하고 있었어. 누가 탔다면 알아차렸을걸.”

“그럼 뒤로는 어때요?”

레스트라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능이야 하지,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쯤 누군가 눈치챘으리라 봐야 할 걸세. 게다가 그 트럭들, 하나같이 도둑맞았지 - 이번 것도 한두시간 지나 어딘가에서 발견될 게 뻔해 - 그리고 지금까지는 택시들만 덮쳤고, 뒷트렁크 문에는 손댄 흔적조차 없었어.”

“흥미롭네요.”

“내가 말해줬잖아.” 존의 말에, 셜록이 혼자 구시렁거린다. 그는 확대경으로 뚫어져라 계산대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대략 지금쯤은 거의 마쳤는지 레스트라드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다친 여자는 어딨습니까?” 그가 레스트라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제껏 읽었던 바로는 이 도둑들, 사상자를 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셜록은 그의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계산대 쪽으로 고갯짓해보였다.

“피가 튄 자국이야. 비교적 경상이겠지. 아마 권총을 휘둘렀을 거야.”

“뮤리엘 호손. 지배인 사무실에 있네.” 레스트라드가 대답했다. “하지만 꽤나 충격받은 상태야 - 내 보기엔…”

셜록은 이미 자리를 떠나 시야에 들어오는 세 개의 문 중 하나로 사라져버렸다. 레스트라드는 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지배인 사무실이 어딘지는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그는 뒤따라가려는 존에게로 하소연하듯 물었다. “아니면 피해자가 여자라는 건 또 어떻고.”

존은 어깨만 으쓱해보이고는 그를 따라갔다. “셜록이잖습니까.”

그들이 들어섰을 때 뮤리엘 호손은 딱히 충격받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최면이라도 걸린 듯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셜록을 바라보고 있는 품이 꽤나 행복해 보였달까.

“놈들이 왜 쳤던 겁니까?”

셜록이 저 질문을 한 게 처음은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드는 존이었다.

그녀는 셜록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세상에, 당신 근사한걸요.”

레스트라드는 흥, 코웃음을 쳤고, 존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럴 걸요, 하지만 전혀 관계없네요.” 셜록이 팩, 쏘아붙이고는, 옆에 서 있던 구급요원을 바라보며 ‘이 여자 좀 고쳐봐!’ 라는 듯이 손을 저어보였다.

“충격에 시달리는 중이라서요.” 남자는 변명하듯 말했다. “머리의 상처는 외상인 게 분명하지만, 금방 병원으로 이송할 겁니다. 그 전까지는 이 여성분 이야길 이해하긴 어렵겠네요.”

셜록은 노려보기만 했다.

“진술은 나중에 받아도 되잖나.” 레스트라드가 지적한다. “그렇게 하는 게 어때…?”

“이건 의미있는 일이라구요.” 셜록이 그에게 대꾸했다. “전엔 한번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었는데, 왜 지금, 왜 저 여자에겐 그런거죠? 딱히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여잔데…”

“셜록.” 존이 한발짝 다가서서 팔에 손을 얹었지만, 셜록은 홱 뿌리치고는 레스트라드에게로 돌아섰다.

경위님이 해보시는 건 어때요?” 그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어쩌면 나이든 남자에겐 관심을 덜 가질지도요.”

존은 다시금 그의 팔을 붙들고는, 이번에는 놓아주지 않고 방 한구석으로 끌고 갔다. “네가 잠을 설쳤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굴 필요는…”

“무슨 뜻이야, 잠을 설치다니?” 셜록은 언성도 전혀 낮추지 않은 채 따지듯 되물었고, “나 완전 잘 자거든.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얼굴까지 찡그렸다. “무슨 뜻이야?”

존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음, 우린 네가 악몽을 꾸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 주변을 휘 둘러보았지만, 레스트라드는 여전히 셜록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호손 양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는 중이었다. “좋아, 이런 이야길 할 만한 시기도 장소도 아니긴 하지만, 네가 떠나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면 - 뭔가 신경쓰이는 게 있으면 말야, 알잖아, 넌…”

“신경쓰이는 거? 내가 대체 뭘 신경써야 하는데? 정말이지, 존, 네가 무슨 이야길 하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우리’는 또 누군데? 너랑 허드슨 부인은 이야기할 게 그렇게 없어?” 

그는 거의 화라도 낼 기세였기에, 존은 방어하듯 두 손을 들어보였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구. 진정해. 소리치는 게 들려서 그랬어, 특히 오늘 아침에 말야, 우리 생각엔…”

“이쪽 분들이 가고 싶으시다는데요, 경위님.” 아까는 보지 못했던 금발의 경관이 문가에 고개를 내밀었고, 셜록의 얼굴에 스치는 이상야릇한 표정에 대해 질문조차 하기 전에 존의 관심은 그쪽으로 향했다.

“흠, 거 참 유감이군.” 레스트라드가 대답하더니, “직원실일세,” 셜록에게 말했다. “그때 여기 있었던 손님 여섯에 다른 직원 둘, 그리고 점심 먹고 돌아온 세 명까지. 가보지 그래.”

셜록은 로켓마냥 뛰쳐나갔고, 미처 문을 나서지도 못했던 자그마한 경관에 부딪힐 뻔 했다.

“이봐요!” 그녀는 셜록에게로 소리쳤다. “작다고 해서 안 보이는 건 아니라구요!”[각주:3] 

존은 바로 그녀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레스트라드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로스 경관, 호손 양에게서 진술 좀 받아주겠어? 특히, 왜 공격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야.”

“알겠습니다, 경위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어 보였다. 진짜 매력적인 여자인걸, 존은 생각했다. 그는 남몰래 그녀 쪽을 훔쳐보았다. 몸매도 좋네. 정신 나간 플랫메이트나 생각하고 있을 이유는 전혀 없지 않겠는가; 게임으로 되돌아갈 때다. 그는 레스트라드를 따라 문을 나서며 그녀에게 따스한 미소로 답했다.

두 사람이 직원실에 다다랐을 때, 셜록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더니 다른 놈이 총을 든 놈에게 욕을 했구요…”

“아니, 안 그랬어요. 먼저 시작은 했지만, 그때 그 놈은…”

“분명히 소리를 질러댔다구요 - 총든 놈이 여잘 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 수 있었을 거잖아요…”

“내 생각에 놈은…”

“입들 좀 다물어요!” 셜록은 사람들을 몽땅 눈빛으로 제압했다. “여기 중에서 그때 실제로 있었고, 카펫에 머리 박지 않았던 사람은 누굽니까?”

남자 둘이 꾸지람 들은 어린애마냥 손을 들었다. 셜록은 흐늘흐늘한 턱수염 기른 남자를 가리켰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습니까?”

“어… 음, 저는… 그게…”

“너무 굼떠요.” 그는 두꺼운 안경을 낀 좀더 젊은 남자 쪽으로 손가락 방향을 바꾸었다. “당신, 칼…” 존은 뒤늦게서야 이름표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야기해 봐요!”

셜록의 지시에, 칼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음, 조프리가 뮤리엘 쪽으로 가려 했는데, 남자가 조프리에게 총을 겨눴어요. 할 수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구요.” 그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놈들이, 우리더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카운터 뒤에 가서 무릎꿇고 있으라고 했어요.” 

“놈들이 가는 거 실제로 봤던 사람 있어요?”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린 다 카운터 뒤에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50까지 세라고 했구요.” 한 여자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내 말은… 그 사람들이 가긴 갔을 거잖아요, 안그래요?” 다른 여자가 소리내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셌을 때쯤엔 가고 없었다는 거죠.”

셜록은 그녀에게로 돌아섰다. “당신들 모두 동시에 끝냈습니까?”

그의 시선에, 여자는 조금 위축되는 듯 했다. “음, 네에.”

“그 사람들이 소리내어 세라고 했거든요.” 옆에 있던 사람이 거들었다. “우리 다 같이 끝마쳤어요.”

“흥미롭군.” 셜록은 두 손을 모으고 검지 끝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뮤리엘은 괜찮나요?” 완전 짧은 치마 차림의 젊은 여자가 사람들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괜찮을 겁니다.” 위로하듯 말하면서도, 내심 눈이 즐거운 존이었다.

“아, 정말 다행이에요.” 여자는 그에게로 고마움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분이 저랑 점심시간을 바꿔주지 않으셨더라면, 그 계산대에 있던 게 저였을 뻔 했거든요. 미안해서 어쩌죠.”

“적절하기도 하시군.” 셜록은 그녀를 향해 한마디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진짜로?’라는 물음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에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보이는 그를 향해, 존은 ‘배째’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각주:4] 

레스트라드가 끼어들었다. “그럼, 호손 양이 왜 당했는지에 대해서 아시는 분 없습니까?”

다들 고개만 더욱 저어보일 뿐이다.

“엄청 화난 것 같았어요.” 칼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보통 그랬다구요. 총 든 남자요. 굉장히 난폭했거든요. 다른 한 사람은 좀더 차분했고요.”

그 말에, 다들 끄덕거렸다.

“다 했습니다, 경위님!”

존은 등 뒤, 로스 경관에게로 돌아섰다. 그녀는 수첩을 펼쳐보이려던 중이었으나, 곧바로 손에서 빼앗기고 말았다.

“이봐요!”

“냅둬.” 레스트라드는 페이지를 휙휙 훑어보는 셜록을 보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끝까지 다 본 그는 한마디 했다. “말도 안돼.”

그리고는 존에게로 수첩을 넘겨주었고, 존은 레스트라드에게 건네주어 로스 경관이 메모한 내용을 함께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글씨도 참 잘 썼다.[각주:5]

“여자가 놈을 열받게 한 것 같은데.” 존이 한마디 했다. “극한 상황인데다, 놈은 이미 긴장도 할 만큼 했고, 난폭하기까지 했으니 - 꼭지 돌게 만드는 게 그닥 어렵진 않았을거야.”

“내 생각도 그렇네.” 레스트라드는 대꾸하더니, 셜록을 쳐다보았다. “물론 전에는 폭력을 쓰지 않았었으니 점층적으로 보이리라는 것쯤은 아네만, 그렇게까지 의미있는지는 확신이 안 서거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누구든 안좋은 때가 있는 거 아닌가.”

셜록은 찌푸린 얼굴을 펼 줄 몰랐다. “하지만 어째서 전혀 위험해보이지도 않는 여자가, 총을 든 남자한테 그렇게 터무니없이 선동적인 대사를 날렸던 거죠?”

레스트라드는 휴, 한숨 한번 내쉬고는 대답했다. “사람들의 반응이나 대응 방식이란 게, 지독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는 동안에는 이례적일 수도 있는 거라서.” 아무래도 ‘감각 훈련’ 안내서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 네가 근사하다고…”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레스트라드의 입 꼬리가 움찔거렸고, 존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한 것 같던데… 어… 그것도 흥미롭지 - 보통 상황이었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 같거든!”

셜록은 그대로 굳어서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섰다. 존 정도만이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고, 이내 생각들이 정리된 것 같았다. “우린 가봐야겠습니다.” 그는 존의 등, 허리께에 손을 얹고 문 쪽으로 힘주어 밀면서, “비디오 영상 찾으면 문자 주시죠.” 어깨 너머로는 레스트라드에게 지시하며 존을 문 밖으로, 앞으로 쭉 떠밀었다.

“어디 가는 건데?” 존은 종종걸음치다시피 밀려나와 보도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베이커가.”





셜록은 회오리바람처럼 휘리릭 플랫에 들어서며 코트와 목도리, 자켓을 이곳저곳에 내팽개쳤다.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셔츠 맨 윗 단추마저 풀고는, 곤혹스러워하며 문가에 서 있던 존 앞으로 되돌아온다.

“좋아. 다시 한번 키스해줘.”

존은 입이 떡 벌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셜록이 얼굴을 구긴다. 존은, 눈만 깜박이고 섰다.

“제발.” 셜록은 한마디 덧붙였지만, 부탁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눈을 감아도 봤지만, 다시 떠봐도 셜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것도 한층 더 조급해하는 것처럼. 그게 가능이나 하다면 말이다.

“봐, 존. 뭐가 대수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 - 전에도 해봤잖아, 너한테는 문제도 되는 것 같지 않고 말야.” 그는 찡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전혀 말이지.”

존은 다시금 입을 떡 벌린 상태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다. 덧붙여 강조하는 대사에 멍하니 뻐끔거리기까지 하면서.

“아, 쫌!” 셜록이 오래 마음고생이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습을 보며, 완전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존이었다. “좋아 - 내가 먼저 하지.” 그는 몸을 기울여 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더니, 곧바로라고 해도 될 만큼 금방 물러섰다. 그리고는 손을 휘휘 젓는다. “이젠 네 차례야.”

이제 그만. 존은 셜록의 팔을 붙들고, 소파 팔걸이에 오금이 부딪힐 때까지 뒤로 밀어내 그대로 주저앉혔다.

“좋았어.” 그는 기쁘다는 듯이 한마디 하더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계속해.”

“아니, 네가 계속해봐. 이야기 계속해 보라구. 그러니까 - 난 장난감이 아니거든, 셜록. 너 지금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그러게 두기 전에 제대로 설명해보라구.”

셜록은 팍 째려보며 일어서려고 했지만,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존 때문에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존은 차츰 손 아래 잡아둔 팔 근육에 힘이 풀어지는 걸 느끼고는, 손을 풀어주고 뒤로 물러나 팔짱을 꼈다. “해봐.”

여전히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셜록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얼마가 더 지났을까, 셜록은 깊이 숨 한번 내쉬고는 마음을 다지는 듯 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설명이라. 알았어, 좋다구.” 그는 벽난로 쪽으로 다가서서는 뒤돌아섰다. “감정적인 스트레스랄까.”

존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반응이나 대응 방식이란 게, 지독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는 동안에는 이례적일 수도 있는 거라서’ 말야.” 셜록은 아까 레스트라드가 했던 대답을 그대로 읊었다.

존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쓰려고 아껴두었던 어깨 으쓱 / 눈썹 치켜올리기 콤보를 펼쳤다.

“2주 전에, 네가 나한테 키스했을 때. 그땐 네가 총에 맞은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잖아. 난… 우리 파트너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됐어. 네가 죽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요약하자면, 그날 오후가 내겐 감정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험 중 Top 5 안에 꼽을 만한 순간이었다는 거지.”

존은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 무슨 소리야?” 

그러자 셜록이 무시하듯 한 손을 저어보였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그 상황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의 특정 측면에 있어, 이어지는 내 집착이… 음… 너보다는 더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는 거야.”

저 문장에는 꽤나 많은 단어들이 있었지만, 스트리퍼가 양쪽에 서 있는 - 게다가 둘 다 적극적으로 가리키기까지 하고 있는 - 라스베가스의 네온사인 간판처럼 존에게 확 와닿는 것은 딱 한 마디뿐이었다. “집착?” 그는 멍하니 되물었다.

셜록은 화가 치밀어오른다는 듯한 눈빛을 쏘아보내고는, “어떻게 눈치도 못 챌 수가 있어?” 따져물었다. “나한테 배운 게 하나도 없어? 일주일 내내 피해다녔는데? 테이블에서도 빙빙 돌기나 하면서? 네가 내 어깨 너머로 문자 읽는 바람에 펜을 두 동강 내버렸던 사실은 어떻고?” 그는 넌더리난다는 듯이 도리질쳤다. “네 관찰력이란 건 케밥 수준이구나.”

“딱히 이해되진 않는데.”

셜록은 두 손을 치켜들었다. “진심이야? 지난 2주간 내 행동에서 이상한 걸 전혀 못 느꼈어?”

존은 문가에 서 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진짜 솔직히 말하자면, 셜록. 네 행동 중에서 ‘이상하다’고 할 만한 건 적어도 70%는 된다구.” 그는 개수대에서 찻주전자를 집어들고 물을 채워넣었고, 셜록이 그를 따라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너한테는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는 것 같은 단서들이라 해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속삭이는 소리 정도로도 안 들릴걸. 물론…” 그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져 주전자를 다시 받침대에 올렸다. “…그게 사실은 꽤나 정상적인 반응이기도 하지만 - 네가 스스로 느끼기엔 훨씬 더 현저하게 와닿을 거라 보면 말야.”

그는 마침내 돌아보았다. 문가 언저리에 선 셜록은, 자신과 ‘보통’이라는 단어를 연관짓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미는 듯한 얼굴이었다.

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쨌든, 난 그저 네가 기분이 별로라든가, 내가 네 어깨 너머로 훔쳐본다든가 하는 걸 싫어하는 거라 생각했는걸. 네가 다른 사람들 개인 공간이라는 걸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감안하면, 자기 일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구는 거라구.”

셜록은 분노의 한숨을 뱉어냈고, 존은 이제 차는 됐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조리대에 기대섰다.

“어쨌든 전엔 나도 궁금해하긴 했어, 지금 와서야 네가 이야기를 꺼낸 거고.” 존은 시인하더니, “네… 거기 꽂혀 있던 침도 그렇고.” 시선을 내렸고, 셜록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려 그때 그 부분을 문지르고 있었다. 존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건 그렇고, 신경쓰여? 내가 좀 봐줄까?”

셜록은 흥,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래놓고 나한테 타이밍 운운하는 건가!”

존의 머리가 화들짝 깨어났다. “아, 그렇지.” 그는 의사 모드를 대기 상태로 되돌려놓고 유감스레 반쯤 미소지어보였다. “미안.” 그는 아까 셜록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았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되돌아보게 됐어. 네가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널 추행한다든가 뭐 그런 짓을 하려 들까봐 말야.”

“날 추행한다구?” 너무나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셜록을 보고, 존은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런 일이 있었으니 내가 선을 넘으려 든다거나, 뭐 그런. 널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거지.”

셜록의 시선이 부엌 테이블로 향하더니, 잠시 게슴츠레해지는 것 같았다.

“너 괜찮은 거야?” 존은 한발짝 그에게로 다가섰다. “이봐, 무슨 일인데, 셜록? 네가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게 대체 뭐야? 난 이 상황이 전혀 이해 안 간다구. 지금 내가 또 하려 들까봐 걱정하는 거야? 뭔가 더 기대할까봐? 난 그런…”

“쫌! 존, 방금 내가 다시 해달라고 부탁한 거잖아!” 좌절 섞인 신음을 흘려내며, 셜록은 뒤돌아서서 제 뒷통수 머리카락을 한움큼 움켜쥐었다. “넌 대체 어떻게 그렇게… 그렇게…?” 그는 화난 듯 손을 저어댔다. “그렇게 조금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는거야?” 셜록은, 존의 목소리처럼 들리게끔 비꼬는 말투로 내뱉었다. “아, 셜록에게 키스했었지, 그래서 뭐? 별거 아냐. 걍 잊어버리고 넘기자구. 딱 평소 그대로 되돌아가는 거지.” 딱히 좋은 인상을 주는 말투는 아니기도 했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돌아섰다. “뭐, 난 그렇게 잘 까먹을 수가 없더라구, 덕분에 돌아버리겠어. 그러니까 내 반응이 그런 특정 상황 때문에 일어나는 일회성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알아야겠다구. 그래야 이 엉망진창인 상황을 넘겨버리고, 더 이상은 말도 안되는 이…”

아래를 바라보는 셜록. 존 역시 자동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갔지만, 셜록이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차리자마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 셜록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고 있었다.

존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다가서서, “저기, 괜찮아.” 머뭇머뭇 손을 뻗어 셜록의 팔을 토닥여주었다. “네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거라면, 그럼 괜찮아. 그저… 진정하라구, 알았지? 그렇게까지 화낼 건 없잖아.”

셜록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벅벅 비비더니, “화내다니,” 따라 내뱉었다. “내가!” 그리고는 역겹다는 듯 대꾸한다. “난 ‘화내는’ 데 익숙하지 않거든.”

“그렇지, 난 그것도 문제라고 봐.” 존은 한마디 대꾸한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한테 키스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안그래?” 그는 시선을 돌리며, 그 후에 자신이 얼마나… 치유되었다고 느꼈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난…” 얼굴을 구기긴 했지만 - 이러면 나쁜 놈인 걸까? - 그는 결국 시인하고 말았다. “…난, 미안하진 않아.”

그 말에 셜록이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2주 전,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알게 되었을 그 모든 것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나도 그래.” 셜록의 나직한 목소리.

조금이나마 개운해진 존은, 그에게 미소지어보이며 “좋아, 그럼. 음, 이걸로 네가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거면, 그럼…”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나, 네 마음대로 해봐.”

그대로 기다려봤지만, 셜록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동의하고 있잖아.” 존은 그를 채근했다.

“어…” 눈을 내리까는 셜록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네가 해야 해.”

“아.” 조금 놀라긴 했지만, 존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해했어 - 실험 조건이구나. 같은 조건을 유지하는, 뭐 그런 거.”

셜록은 동의하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여전히 눈은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존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테이블이 거의 비어 있다. 보기에 깨진다거나, 불이 붙는다든지 부식될 만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그거면 됐지. “조금만 뒤로 가봐.”

셜록은 뒤를 확인하더니 시키는 대로 따랐다. 테이블 위에 온전히 앉은 건 아니었지만, 서로 눈높이가 맞도록 모서리 끝에 기대앉았다. 존은 그의 앞으로 다가섰고, 손을 들어 그의 목 옆을 손가락으로 달래듯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맥박은 터무니없이 빠르기만 했다.

“긴장 풀어, 물진 않을 테니까.” 진부하기 그지없는 ‘…네가 원치 않는다면 말야’라는 대사가 존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기로 했다. 이미 온통 빨개져버린 셜록인데, 한층 더 의식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는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지만 다시 머뭇거렸고, 바로 조급함 가득한 눈빛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미안한 듯 찡그리긴 했지만, “미안 - 이거…” 이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위험한 것 같아서.”

그 말에 셜록은 마음이 놓이는 것 같더니, 이내 쓰게 웃었다. “전엔 안 멈췄잖아.”

“그래, 그건 그렇지?” 존은 숨을 가다듬었다. “알았어, 그럼. 눈 감아봐.” 셜록은 그 말대로 따랐고, 존은 다른 손으로 셜록의 얼굴을 감싸며 잠시나마 관찰당하지 않는 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기다리고 있는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마지막인 것 같지가 않았다.

존은 문득 이놈의 실험 때문에라도 마지막인 것처럼 해야 하는 게 아니었을지 궁금해졌지만, 정말이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입술이 닿는 순간, 셜록이 떨리는 숨결을 뱉으며 두 손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 그러다 벨트 어딘가와 연결쇠, 스웨터 한 움큼을 - 그러쥐었으니까. 

그래, 그럼.’ 존은 생각했다. 모든 걸 손에 쥐고 흔들고 싶어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쪽 분야에서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공정하게 주고받는 것쯤은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는 셜록의 고개를 기울여 다시 키스하고… 또 다시 키스했다. 그럴 때마다 키스는 점점 더 길게 남아, 결국에는 한데 이어져 모호해져갔다. 그리고 그가 물러나려 하지도 않았는데, 셜록은 어느새 긴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며 다른 손을 스웨터 아래로 밀어넣어 등에 얹는다. 셜록이 키스 한번 하자고 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거나, 금방이라도 일을 치를 듯한 분위기는 물론 정말 그러려는 것 같다고 여기는 일 없이 애정 표현하는 방법같은 건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존은, 비록 매우 부적절한 스킨쉽을 동반하고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그저 키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셜록의 혀가 밀고 들어오는 순간마다 ‘안아줘’ 라고, 셔츠 위를 할퀴듯 그러쥐는 손가락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셜록이 그의 입 안쪽에 대해 - 축척 모델이라도 만들 수 있을 만큼 - 정보를 얻어내는 데에만 온통 몰두해 있는 듯한, 존의 온 몸이 너무나도 확실하게[각주:6]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이런 결정을 내린 게 분별력 있는 행동이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보기 시작했다. 2주 전, ‘그 키스’로 - 머릿속에서는 사실상 트레이드마크처럼 박혀버렸다 - 흥분했었던 그였다. 당연히 그랬다. 누구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셜록 홈즈에게 키스하면서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런 문제만은 아니었고, 그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불안의 9고리[각주:7]씩이나 시달리지 않고도 벗어날 수 있었던 거겠지. 그 키스™가 그에게 친구를 되찾아주었고, 그거야말로 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였다.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몇 달간에 이어, 의구심 가득한 몇 주를 보내고 난 뒤로, 다른 걱정들 따위는 우스우리만치 상관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부엌 한가운데 서서,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멋지기만 한 남자에게 안겨, 그간 가지고 있던 모든 ‘원하고/갈망하고/갖고픈’ 본능을 발산하고 있는… 존 왓슨은, 더이상 망가져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본능들은 계속 자라왔던 것만 같았다. 셜록을 돌려세워, 테이블에 밀어 눕히고 그대로 그를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손바닥이 근질거리기 시작했으니까.

그는 셜록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대로 몸 앞을 쓸어내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아래로 내려, 곧바로 그의 허리를 꼭 붙들었다. 셜록의 한 손이 뒷통수로 다가오는 순간, 존은 팔에 힘을 주고는 다리를 살짝 굽혔다 펴며, 셜록을 들어 테이블 위에 앉혔다.

아, 세상에.” 셜록이 고개를 뒤로 젖혔고, 동시에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존의 어깨에 얹혔다. 이어지는 미소가 나긋나긋하지만은 않다는 걸, 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비워낸 공간으로 바짝 다가서서 몸을 숙였고, 유혹적으로 드러나 있던 - 희미하게 땀에 젖은 셜록의 목덜미에 입을 댔다. 그의 등에 얹혀져 있던 셜록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며, 다시금 - 지난번에도 계속 그랬듯 - 소리죽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존은 힐책하듯 목 옆을 깨물며 손으로는 그의 등, 어깨 사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들려줘.”

품 안에서 셜록이 전율하는 게 느껴졌다. “존, 난…” 그의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존이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몸의 특정 부위에 바로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빠르게 자가진단을 해보았지만, 어쨌든 아직 평정을 잃지 않은 상태라 생각하기로 했다. 간신히.

그는 셜록의 귓가로 타고 올라갔다. “듣고 싶어.”

셜록의 신음.

“좋아.” 존은 칭찬하듯, 귓불을 빨고는 놓아주었다. “더 크게.”

“아아, 존, 나는…”

“더 크게.”

셜록은 온 몸을 떨었다… 하지만 존의 손이 그의 목 뒤를, 머리카락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내내 신음 소리를 억누르지는 않았다.

셜록의 고개를 돌리며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신음을 삼키던 순간, 확장된 동공, 커진 눈이 다시 감기기 전 존의 시야를 스쳤다. 금방이라도 그만둬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 입술의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셜록이 키스해오고 있으니까. 세상 그 어디에도 이보다 더 원하는 건 없고, 다른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의 민감한 반응이 존의 머리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셜록이 괴로워했고, 그래서 부탁했기 때문에 이걸 하겠노라고 동의했던 존 왓슨이 이 남자에게서 ‘안돼’라는 대답을 들을 리 없다는 걸, 그를 벗기는 방법까지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존 왓슨을 저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런 존 왓슨이 차츰 위로 올라와 위험하리만치 의식하게 되어버리는 참이기도 했다.

5초만. 그는 결심했다. 반 발짝 더 다가서서 셜록을 조금 밀어냈고, 균형을 잃은 그는 존의 몸을 휘감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4초… 그는 셜록을 조금 더 뒤로 젖혀, 한 팔로 그의 상반신을 감싸안아 지탱했다.

3초… 다른 손은 셜록의 목 뒷덜미로 옮겨,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2초… 헉, 하는 밭은 숨소리와 함께 셜록이 입술을 떼며 기대오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1초… 셜록을 바로 세워주며,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다시금 물러나 자신의 입술을 찾으려 드는 셜록을 제지하며 그대로 잡아 두자, 투정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이가 목덜미를 깨물어온다.

존은 그의 머리 옆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하지만 풀어주지는 않은 채, “우리 이젠 멈춰야 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경고하듯 타일렀다.

셜록은 여전히 저항하려 들었지만, 다행히도 엉성하기만 했다. 손으로나마 존의 몸을 밀어내보려 했지만 결국 스웨터만 그러쥐고 말 뿐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안그러면 이 테이블에서 안아버릴 테니까.” 그 말에, 존은 기억 속에서 뭔가 떠오르는 걸 깨닫고 반쯤 웃었다. 그는 셜록의 어깨를 잡고, 서로를 마주볼 수 있을 만큼 뒤로 살짝 밀어냈다. “난 딱히 네가 애원하길 바라진 않지만, ‘두 번’ 정도는 확실히 그러게 만들 수 있어.” 그런 식으로나마 아이린에 관한 농담을 던질 수 만큼은 자신감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셜록이 지금 이 순간 존에게 보여주는 것 같은 눈빛을, 결코 그녀에게는 보여주지 않았기에 마음 아프지도 않았다.

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실험이라는 건 말 그대로 실패였다. 셜록에게로 끌리는 마음을 거의 포기 상태로 만들어주었던 ‘절대 우정’[각주:8]을 끊임없이 되새기던 단계로 되돌려놓았으니까. 상상같은 건 하지 않고 이 남자를 쳐다보기 위해서는 애써 노력해야만 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저 긴 다리나 자신의 손 아래 창백한 등이 떨리는 모습을, 계속…

존은 스스로의 숨을 고르는 데 집중하며 진정하려 해봤다. 이렇게 온통 흐트러진 채 열정으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둔 채로는 전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셜록이 마지막 순간에 - 존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한껏 취해있었다는 건 의심할 여지도 없었지만,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는 지금 자신에게서 그걸 - ‘그게’ 뭐든간에 - 얻어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필요했던 만큼의 정보를 다 얻어서, 넘겨버리고는 경멸해 마지않던 ‘보통’으로 되돌아갈 준비가 된 것일지도.

“어때?” 존은 물었지만, 여전히 목소리에서는 흥분으로 낮게 거칠어진 기색이 완연했다.

“젠장.” 셜록의 대답이었다.



  • 원문: Given In Evidence - 7. The Vanishing Thieves 
  • 역자 주석: 대놓고 애타는 남자와 속으로 애타지만 아닌척 하는 남자의 밀고 당기기?
       이걸 뭐 좋아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 알쏭달쏭하다. :P
    ※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요.;;
     
  • 소개합니다: 하이지달님께서 6편의 해맑은 존안절부절 셜록을 그려주셨습니다. 구경해보세요 :D


  • 6. 문제 발생 | Matters Arising  [ 목록 ]  8. 기회 | The Window of Opportunity ▶



    1. ‘Mister Mistoffelees’ - T.엘리엇 시에 등장하는 마법사 고양이. 뮤지컬 [캣츠]에도 나온다. http://goo.gl/fVriK [본문으로]
    2. ‘He's actually managed to drive himself up the wall.’ - 짜증이 극도에 달했다는 표현(drive up the wall)이면서 정말 벽에 붙어버린;;(up the wall) 셜록을 놓고 하는 말? :P [본문으로]
    3. “Short doesn't mean invisible!” - …자연스럽게 존부터 생각나는 그런 어떤;;; [본문으로]
    4. ‘Seriously?’ vs ‘So sue me’ - 질투섞인 질문에 남자답게(?) 응수하는 존 :P [본문으로]
    5. 존… 좀;;; [본문으로]
    6. ‘in no uncertain terms’ - 이중부정이라 강한 긍정으로 옮긴다. [본문으로]
    7. ‘the nine circles of angst’ - 단테가 지옥을 9개 circle로 규정한 것을 응용한 것. [본문으로]
    8. ‘friendship stick’ - 느낌 살려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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