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진심이야?  | Are You Sure?  



“마지막으로, 기부금 내역을 조사해보시죠.” 안시아가 블랙베리를 타닥타닥 두드려대는 동안 셜록이 말했다. “기부처간의 연관성이 명백하진 않지만, 예를 들어 제이너스 카 같은 - 그런 회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내놓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절세 수준은 이미 넘어서고도 남은 것 같습니다만.”

그가 의자 뒤로 몸을 기대어 앉는 순간, 존이 부엌에서 걸어나왔다.

“정말 안 마실거에요?” 안시아에게 한번 더 확인하듯 물어보며, 셜록의 손을 잡아 머그를 감싸쥐게 해준다. 늘 앞을 못 본다는 걸 건드리지 않으려 하는 존인데 이건 꽤나 이상하군, 셜록은 생각했다; 항상 충분한 수준으로는 알려주었지만, 한번도 도를 넘어선 적은 없었다; 이끌어주는 것 뿐, 숨막히게 굴진 않았다. 그는 문득 의아해졌다. 이게 앞서 몇 가지 경험 때문에 그런걸까, 아니면 존이 얼마나 그에게 익숙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안시아가 말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답했던가보다; 존이라면 조심스레 피했을 것들 중 하나다.

“당신은 항상 블랙베리만 붙들고 있군요.” 계속 ‘타닥 타닥’ 소리가 이어지자, 존이 한마디 한다. “정말 그렇게 메시지가 많이 와요?”

“줄임말이라도 쓸 수 있다면 훨씬 더 빨라졌을걸요.” 안시아는 선뜻 수긍하더니, “하지만 홈즈 선생님께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셜록은 그에게로 향하는 부정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M 홈즈 선생님께서는 ‘문자 대화’를 무척 싫어하셔서요.”[각주:1]

“’철자가 엉망인 영어’라고 하겠죠.” 셜록이 한 마디 했다. “그나마 그게 서로 동의했던 몇 안되는 것 중 하나거든요.”

금세 서둘러 플랫을 나서려는 안시아를, 존은 매너좋게 데려다주러 갔다. 아랫층으로 내려가면서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셜록에게도 들려왔다.

그는 차를 홀짝이며 혼자 미소지었다. 오늘은 정말 최고의 하루였다; 긴장 해소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존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았던 거다. 존의 도움으로 - 바로 이전과도 비슷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해결한 후에, 셜록은 열 시간을 내리 잤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파일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시 파헤쳤고, 방금 안시아에게 건네주었던 - 몇 가지 가능성 있는 노선을 도출해냈다. 마음 속 일부분에서는 이것 때문이 아니라고 부정해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른 설명이라곤 없는 게 확실했다.

새로운 정보가 더 들어오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일도 더 이상 없었기에, 셜록은 지난 밤을 다시금 떠올려보기로 했다.

끝난 다음 존에게 했던 말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랑이란 건 그에겐 친숙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감정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존에게만큼은 그대로 알려주어야 할 거였다.

존이 잠시 멈추고 손을 잡아주었을 때, 셜록은 자신이 아래에 무력하게 누워 있다 하더라도, 그래야만 한다면 그가 멈춰줄 것임을 알았다. 설령 그게 그의 희망의 끝을 의미한다는 걸, 다음 기회란 건 결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존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때 그대로 믿었던 셜록이었지만, 그 순간에서야 그 말을 정말로 체감했고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더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했었지만, 그의 손을 그러쥐는 존의 손은 믿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셜록은 결국 믿음으로 답했다. 드디어 그 사랑을 받아들였으니까.

“그거 알아? 나 관찰하는 데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아.” 존이 방으로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안시아가, 방금 전에 마이크로프트의 이니셜을 언급하던 순간 눈꺼풀이 확실히 떨리더라구 - 그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한데?”

셜록은 현재로 관심을 되돌리며 흥, 코웃음쳤다. “그게 그 인간을 언급하는 방식이었겠지.” 대답했다. “네가 억지로 보여줬던 그 어이없는 영화들처럼 말야.”

“아, 그래. 본드의 밤(Bond night) 말이군.” 의자로 다가가 앉는 존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 셜록은 화륵 밀려드는 애정을 느끼며, 불현듯 의자 대신 소파에 앉을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안시아가 옆에 앉는 위험을 감수하긴 싫었지만 말이다. 

“있잖아, 고전 영화나 TV에 대한 네 지식들 쪽에도, 시각적인 부분 없이도 채울만한 공백이 있을 거야.” 존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드패럿 스케치(Dead Parrots)같은 건 어때?”

셜록은 이 이상한 질문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머릿속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중요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이거, 얼마나 지속되는 거야?” 그는 물었다. “그러니까, 그 긴장 해소란 거 말야.”

길게 숨을 내쉬는 존이, 걱정스러운 건지 기뻐하는 건지 셜록은 구분할 수 없었다. “뭐, 그건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크게 다르지.” 그가 대답했다. “보통보다 성욕이 강하거나, 이제 갓 사귀기 시작한 사람들은 요구 수준이 높을테니, 그 ‘해소’ 기간도 더 짧겠고.” 

셜록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넌 얼마나 가는데?”

존은 소리내어 웃었다. “어떤 걸 묻는거야, 평균적인 거? 너랑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니면 우리가… 좀더 가까워진 다음부터?” 그가 물었다. “답이 다 다르거든.”

셜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예를 들어, 어젯밤 이후로 하자구.” 구체적으로 물었다.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까지, 넌 얼마나 걸려?”

“이 정보가 너한테 유용할지 모르겠는걸.” 존은 대답했다. “왜냐면, 내가 너무 오랫동안 널 원했었으니 어느 정도는 쌓여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거든.” 짧은 침묵. “다시 할 수 있을 때까지 30분 정도겠네. 정말 절박해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일까. 네가 다 벗고 있다면 아마 더 짧아질 테고.”[각주:2] 

저 말에 놀라움이 숨김없이 표정에 드러나버렸을 게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셜록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버티는거야?”

존은 또한번 웃더니, “널 만나고부터는 별 수 없이 익숙해져야만 했는걸.”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괜찮아. 너한테 뭘 기대하는 게 아냐, 셜록;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내가… 도와주고 싶다면 어때?” 셜록이 물었다. 맞은편 의자에서 짧게 헛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널 알고 싶어, 존.” 일어나서 존에게로 다가가, 그의 무릎을 벌리고는 가운데 섰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존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쓸어올리며, 이거 하나면 뭐든 원하는 걸 다 얻어낼 수 있다고 추리해낸 - 예의 그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깔았다. “널 탐구하고 싶어, 내가 쓸 수 있는 감각들로만이라도.”

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셜록은 무릎을 꿇은 채 뒤로 물러나 앉으면서도, 손으로는 위아래로 어루만지기를 반복했다. “그렇지 않으면 더운 물도 남아나지 않을걸.”

헉, 하는 숨소리가 들리고, 존이 앞으로 몸을 기울여 두 손을 셜록의 머리카락 사이로 밀어넣었다. “샤워를 자주 하지 않을 수가 없다구,” 그가 입을 열었다. “플랫메이트가 이렇게… 흣, 맙소사.” 셜록은 손을 더 위로 올리며 이어지는 반응을 만끽했다. “완전 멋진 주제에 그런 줄도 모르면, 너처럼 말야.” 그는 황급히 말을 끝맺었다.

“그렇게 멋질 리가 없잖아, 존.” 셜록은 나무라듯 말하면서도 손가락으로는 맞닿은 벨트를 교묘하게 풀어냈다.

존이 손으로 감싸쥐며 제지하더니, “당연히 넌 멋져, 셜록.” 재차 말한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존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론을 실험이라도 해보든가.” 말을 이었다. “옷을 다 껴입은 거랑 벗은 거랑 비교해서, 날 가게 하는데 얼마나 걸리는지[각주:3] 보는거지.”

셜록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불만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반대표를 던졌다. “이제껏 내가 들어본 것 중에 제일 비과학적인 실험인데.” 하지만 이내 씩, 미소지으며 일어서더니 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네 말대로 해보자구.”

그들은 그렇게 침대에서 이틀을 보냈다.





첫째 날 오후, 존의 등뼈 모든 돌기들이 다 같은 맛이 나는지를 신중하게 확인하고 있던 셜록은, 여느때와 달리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어오는데 주의가 흐트러졌다.

“뭐 물어봐도 될까?” 이만큼 말을 꺼내기조차 엄청나게 어려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존이 물었다.

셜록은 마음속으로 지금까지의 결과를 분류하며 잠시 멈췄다. “해봐,” 선선히 승낙은 했지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당황스러운 표현이나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사건 현장에서,” 존이 운을 떼자, 셜록은 일단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너, 샐리에게 사과는 해야 하지만 말야,” 이어지는 흥, 코웃음소리는 못 들은 척 덧붙인다. “우리가 같이 자는 사이라는 걸 암시해줄만한 대사를 큰 소리로, 공공연히 해버렸잖아.”

“우린 같이 자고 있는걸.” 지적하며, 셜록은 슬며시 다가갔다 - 특히 흥미로운 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뭐, 적어도 그랬을 테지, 만약 자려고 애라도 썼다면 말야.”

존이 돌아눕자 한숨을 내쉬는 셜록이다. 이미 아침나절에 존의 몸 앞쪽 전체를 맛보았던 데다 다른 쪽을 다 끝내기 전까지는 그 실험을 반복할 생각이 없었던 탓이다.

손을 올려 존의 표정을 확인해보았다; ‘넌 대체 어느 별에서 온 거야?’ 표정이다.[각주:4] 

“그런 뜻이 아니란거, 너도 잘 알잖아.” 존이 한마디 했다.

셜록은 침대에서 꿈지럭거려 올라가서는, 존의 가슴에 머리를 올리고 규칙적인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주근깨 있어, 존?”

“미안, 뭐라구?”

“주근깨? 너 주근깨 있냐구, 있으면 어디에 얼마나 있는데?” 이런 정보 없이 어떻게 존의 알몸을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잘 좀 들어봐.”

존이 그를 뒤로 밀어냈다. 셜록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게 분명해 보였기에, 그는 얌전히 몸을 세우며 질문하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질문은 어쩌구?” 존이 따지듯 묻는다.

셜록은 히죽,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실제로 묻지도 않았는걸.” 콕 집어 지적해주었다. “그리고 너, 또 눈 굴리고 있지.” 덧붙이는 그의 말에도 존은 아무 대답이 없다. 결국 셜록은 고개를 다시 숙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존? 그 사람들이 뭘 알건, 뭘 안다고 생각하건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왜 신경써야 하는거지?”

“난 신경써, 셜록.” 존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나한테는 중요하거든.” 그리고는 셜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너랑 공개적으로 사귄다면 난, 자랑스러울 것 같아. 그렇다는 건 너도 알겠지. 하지만 지금 우린,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잖아. 안그래?” 묻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넌 아직 확신이 없잖아. 네게 강요하려는 게 아냐.”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난 그냥, 네가 마음을 바꿨을 때 동정하는 시선을 한 몸에 받지 않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야기하는 거야. 한편으로는 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해보려 애쓰는 거기도 하고.”

셜록은 잠시 무슨 말인지 생각해보고는 물었다. “이거, 우리가 먼저 이야기해야 했을 것들 중에 하나인 건가?” 한편으로는, 이거야말로 그가 늘 이런 식의 관계에 얽히는 걸 피하려 들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너무 복잡하기만 하니까.

“지금은 좀 편해보이는데, 신체적인 쪽으로?” 이어지는 존의 말에, 셜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미소지었다. 둘 다 홀딱 벗은 채 거의 24시간을 보낸 걸 생각해보면, 다시 굳어지기나 할 수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매우 절제된 표현일 테다.[각주:5] 심지어 영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말이다. 

존은, 셜록의 몸에서 어느 한 구석조차 매력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제대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물론, 아주아주 작은 곳까지도 놀라운 관심을 보여주어 남아있던 수줍음마저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 셜록은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는 설명하려 시도했다.

“나, 감정이 있는 건 맞아.” 천연두나 아침드라마를 언급할 때 쓸 법한 말투로 ‘감정’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그다. “하지만 머리를 다치기 전에도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래서 이게 실재하는 건지 의심이 들어.”

존의 손가락이 여전히 머리카락를 헤집고 있었다. “그럼 넌, 시력을 되찾으면 이게 휙 사라져버리고 어느 순간 원하지 않았던 관계라는 걸 깨닫게 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가 물었다.

“그걸 신경쓰는 게 아냐, 존.” 셜록은 재빨리 대답했다. “너와 했던 것들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라 확신해.” 그는 서로 눈높이가 맞을 만큼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난, 널 아프게 하기 싫은 거야. 그러니까… 뭐라고 하더라? 마음도 없으면서 유혹해버린 게 될까봐.”

“지금 당장은, 이 감정이 없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워.” 그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하지만 갑자기 생겨난 거라. 그래, 나타난 것만큼이나 갑작스레 사라져버릴까봐 걱정되나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의식이 없을 때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존은 아무 말도 없었다. 말을 하려다가도, 대신에 목을 가다듬고 만다. 셜록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기만을 바라마지 않았다. 마침내 존이 다시금 시도해본다. “그럼, 이 감정이라는 게 머리 부상으로 생겨난 일시적인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건 확실히 이해했어. 그럼, 어떤 건지 나한테 설명이라도 해주지 않을래?”

셜록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로 머리를 파묻었다. “난 이런거 안해.” 입을 열고는, “난 사랑같은 거 몰라. 그런 걸 이해해본 적도 없었고.” 두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알아, 당연히, 그게 동기요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 나와 연관지어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어. 네게 느낀다거나, 아니면 느낀다고 생각하는 이게 사랑인 건지, 난 모르겠어. 내 경험에서는 비교해볼 만한 것도 없는걸.”

존이 옆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더니, 목소리가 약간 윗쪽에서 들려왔다; 옆으로 돌아누운 건가보다. “그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볼까.” 그가 제안했다. “확실히 규정할 수 있는 감정은 어떤 건데?”

좀 쉽군그래; 존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데 탁월하다. “소유욕.”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자, 결코 나누는 걸 싫어하는 그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유대감.” 이어 말했다. “정확히 감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난 너와 이어져 있다는 걸 느껴. 사실 그게 제일 강력하기도 하고. 그래서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거야.”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켜주고 싶어.” 현재로서는 그가 누굴 보호해줄 만한 상황이 아니란 걸 감안하면 이상할 노릇이다. “감탄, 존중, 애정, 좌절, 혼란, 짜증…”

“난 앞에 나온 것들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아.” 존이 가로막으며 말한다. “내가 너무 나가버리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셜록은 들은척 만척, 이어나갔다. “욕구, 의지, 매력, 욕정, 좌절…”

“좌절은 두번째잖아.” 다시 중간에 끼어드는 존이다.

“그게 이상해?” 셜록은 따지듯 되물으며, 갑자기 몸을 일으켜 존을 뉘이고는 자신의 몸으로 덮는다. 그는 존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넣어, 닿을락 말락한 거리까지 입을 가져다 댔다. “두번째가 좀더 구체적이라구.” 콕 집어 말하며 부러 존의 입술 양 옆에 키스했다.

다시 고개를 들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사랑이란 건 이타적이어야 하잖아, 그렇지?” 물어왔다. “널 보면 확실히 그렇기도 하고.”

한쪽 팔꿈치에 기댄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존의 얼굴 옆을 어루만졌다. “누구라도 나한테 그런 말을 쓰진 않을 것 같아.” 시인하는 그다. “널 사랑하는 거라면, 난 널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거잖아. 안그래?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네가 날 떠나고 싶어한다면, 나 없이 더 잘 지낼 수 있다면 - 내가 널 보내줄까? 널 막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기꺼이 그걸 택하지 않을까?”

온 몸을 다시금 기대며 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그러고도 남을거야.” 존이 들을 수나 있을지 확실치 않을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였다. “널 머물게 할 수만 있다면 난 뭐든 할 것 같아. 내가 못할 게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걸.” 말을 멈추면서도, 자신이 이 모든 걸 시인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네겐 무서울 이야긴데. 그렇지 않아?” 결국 묻고 말았다. 누가 알겠는가, 스스로도 무서워지려 할 정도인데.

“난 그렇게 쉽게 겁먹지 않아.” 존은 놀란 듯한 목소리였지만, 셜록의 몸을 감싼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나 어디도 안 가.”

“난 이런 거 안해, 이런 감정 같은 거 안 키운다구.” 셜록은 고개를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깨어났는데 있었던 것 뿐이야, 그게 뭔지 인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하지만 뭔지 알아차리기 시작한 지금도, 어디에서 생겨난 건지, 믿을 수 있는 건지 난 모르겠어.” 존이 볼 수 있을만큼 얼굴을 들어보였다. “진심인지 확신이 안 서, 존. 미안해.”

존이 어깨를 으쓱하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그가 말하며, “방금 네가 해준 말은… 음, 내가 기대했던 거 이상이었는걸.” 손을 올려 셜록의 얼굴을 감싼다. “네가 마음을 바꾼다 해도, 난 후회하지 않아.”

“그거, 사실 키스 금지 사유 중 하나긴 해.” 존은 잠시 후 털어놓더니, “네게 말했던 건 사실이야.” 서둘러 덧붙였다.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나, 네가 그냥 휩쓸려버리는 걸 바라진 않으니까 - 생각해볼 만한 이유를 주고 싶었던 거야.”

셜록은, 진지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우리, 다시 주근깨 질문으로 되돌아가도 될까?”





두번째 날 오후 느지막히, 셜록은 존의 핸드폰 알림 소리를 들었다. 존이 손을 뻗어 잡기엔 지금 자세로는 무리인데다, 셜록은 그가 일어나게 둘 생각도 없었으니 그냥 두기로 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존이 차와 토스트를 준비해서 침대까지 가져와 문자를 읽어줄 때에서야 셜록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레스트라드가 아침에 스코틀랜드 야드로 와줬으면 좋겠다는데.” 존이 말했다. “급한 건 아닌데, 몇 가지 사건에 대해 네 조언이 필요한가봐.” 그는 바로 앉아 침대맡 테이블에 머그와 접시를 내려놓고는, 토스트 한 조각을 셜록의 손에 쥐어주었다. “기운이 있어야 할 테니까.” 미소띤 목소리다.

셜록은 토스트를 접시로 다시 던져버리고, 대신에 존을 끌어내려 목덜미를 앙, 깨물었다. “나 기운 있거든.” 몸을 뒤집어 존을 아래에 눕히며 대꾸한다. 

“뭐라고 해줄까?” 존은 핸드폰을 쥔 채로 물었다.

“나한테? 계속 ‘응’이라고만 하면 돼.”[각주:6] 셜록은 친절하게 충고해주며 가슴까지 입맞춰 내려갔다. 

존은 끙, 신음소리를 흘려냈다. “레스트라드한테 말야, 셜록.” 가볍게 꿈틀거리며 대답한다. “레스트라드에게 뭐라고 해줄까?”

셜록은 고개를 들더니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우리가 아침에 가겠다고 해.” 존이 메시지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잠시 멈췄다. “괜찮은 건이어야 할 거라 일러두는 거 잊지 말고.” 존이 따라잡기를 기다려 덧붙였다. “우리가 옷을 챙겨입어야만 할 만큼 말이지.”

존이 헛, 하더니 두번째 문장을 지우려 삭제 버튼을 계속 눌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정말 이렇게 나랑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면, 그런 건 괜찮아. 셜록.” 존이 마침내 전송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뭐 딱히 더 재미있는 할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정말?” 셜록이 묻는다.

샅샅이 파헤쳐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잠시, 이내 핸드폰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없어, 특별한 건.” 셜록을 아래 눕혀 가두며 존이 대답했다. 새 문자 알림소리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나한테도 뭔지 이야기해줄거야?” 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답을 요구한다기보다는 그저 묻는거다. 누워 있던 셜록은 얼굴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몇 분 전쯤 불현듯 깨어나, 너무 늦은 시간이었음을 알기에 존을 방해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던 참이었다. 어쨌든 그 때문에 존이 깨어버린 것 같긴 했지만.

“아직도 악몽을 꾸는 거 알아.” 손가락으로는 달래듯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존이 말을 이었다. “한번에 두세시간 넘게는 못 자는 것도, 밤에 날 깨우는 게 사실은 네가 은근슬쩍 풍기려 드는 이유 때문이 아니란 것도 알아.” 그는 더 가까이 다가오며 덧붙였다. “뭐, 어느 정도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각주:7] 

“꼭 나한테 말해야 하는 건 아냐.” 그는 말했다. “하지만 네가 머리를 다쳤다는 걸 감안하면,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거지 - 다른 건 몰라도 꿈은 좀더 관련 있을 수도 있으니까.”

셜록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넌 무슨 꿈을 꿔, 존?” 대답해야 할 시점을 늦추며 물었다. “아직도 악몽을 꾸는거야?”

“한동안은 없었어.” 셜록이 얼버무리고 있다는 건 불보듯 뻔했지만, 존은 빠져나가게 내버려두고 대답해주었다. “아프간에 있던 때 같던데. 네 자아에 그때의 자극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말이지.” 셜록의 말에, 존은 스스로를 비웃듯 작게 웃더니 “솔직히 말하면, 내 꿈은 너한테 키스하는 게 거의 다야.” 시인했다. “그것도 계속.”

“꿈 속에서 나한테 계속 키스했다는 거야, 아니면 나한테 키스하는 꿈을 계속 꿨다는 거야?” 셜록은 되물었다. “네 말, 심각하게 애매하다구.”

“두번째.” 존이 대답했다. 다시금 데굴, 눈을 굴리는 게 분명하다. “이젠 네 차례지.”

셜록은 느릿하게 숨을 고르더니, “두 가지야.”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나는 악몽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역시… 신경쓰여.” 존을 돌려세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만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거기선 처음부터 눈이 먼 상태고. 주위에 다른 사람들도 있어 - 레스트라드나 기타등등 내가 아는 사람들, 적은 아니고… 뭐, 마이크로프트를 제외한다면 말이지.” 존은 쯧, 혀를 찼지만 말을 가로막진 않았다.

“난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야. 뭔가 찾아내야 하는데, 그게 뭔지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는거지.”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했다. “그게 다야. 무서운 것도 아니고, 나쁜 일 같은 것도 없어. 그냥… 무력한 기분이 들게 한달까.” 소리내어 말하니 한층 어이없게 들렸다. “어이없지.” 그가 덧붙인다.

“아냐,” 존은 재빨리 대꾸했다. “어이없는 게 아닌걸. 무슨 말인지 알겠어. 뭔가로부터 달아나는 꿈 같은 거잖아. 잡히면 절대 안되니까 죽을 만큼 열심히 도망치긴 하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는거지. 그저 뛰어야 한다는 것만 아는 거고. 그건 뭐랄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거겠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라.” 셜록은 느리게 되풀이했다. “그래, 그게 적절한 설명이겠군.”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젓는다. “다른 건 전에 이야기해준 거고, 바뀌지도 않았어.” 그건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첫번째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땐 꿈 속에서도 앞이 안 보인다는 게 괴롭다고 느꼈지만, 선택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두번째 꿈에서도 앞을 볼 수 없었으면 좋았을 거다. 잠들때마다 존이 총을 맞는 걸 보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돌아누워 존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른 생각 하게 해줘.”

존은, 그렇게 해주었다.





다음 날, 스코틀랜드 야드에 도착했을 때 셜록이 제일 먼저 들은 건 샐리 도노반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존이 슬쩍 찌른다.

“아, 도노반 경사. 반가운데.” 그는 입을 열었다.

“괴물.”

존이 다시금 쿡, 찔렀다. “지난번에 봤을 때 내가 유감스러운 말을 해버린 걸 사과해야겠군.” 셜록은 말을 이었다. 확실히 사실 그대로다. 사과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존이 앞으로 올 보고서들을 모조리 북부 방언으로 읽어주겠다며 협박했으니까. 심지어 정말 설득력있게 들려주기까지 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르르, 떨리는 걸 애써 참으며 셜록은 샐리에게 활짝 미소지어보였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가 반드시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그땐 무척 긴장해 있었어.” 말을 이으며, 갑자기 손이 꽉 죄어오는 걸 느꼈다. 존이 경고라도 하듯 그가 붙들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던 탓이다. “존이 내… 상황의 원인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미안하다는군요.” 존이 불쑥 끼어들더니, 레스트라드의 사무실 쪽으로 셜록을 밀어붙여 그 안으로 던져넣다시피했다. “빌어먹을 남자같으니라구.” 그가 낮게 뇌까렸다. “대체 내가 왜…”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셜록은 재빨리 존의 팔을 놓고, 이 남자가 계속 입겠다고 고집해대는 보기싫은 스웨터 아래로 손을 밀어넣어 등 아랫쪽을 둥글게 어루만지며 그에게로 기대어섰다. 물론, 유리벽 너머로 부적절해보이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꼭 갚아줄게, 존.” 약속하는 낮은 목소리에 존은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이어 밭은 숨소리가 들려온다. 이 힘이란, 정말이지 매혹적이라니까.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군.”[각주:8] 존은 가쁘게 말했지만, 레스트라드가 들어오자 재빨리 정신을 추스렸다.

“와줘서 고맙네, 친구들.” 레스트라드가 입을 열었다. 셜록이 키득거리자, 존은 그의 발을 꾹 밟아주었다. 그는 ‘웃’ 하려던 걸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다.

“샐리가 자네와 할 이야기가 있다던데. 괜찮은가, 존?” 레스트라드는 이 이상한 행동을 무시하기로 했는지, 존에게 물었다. “난 셜록과 이 사건들 좀 살펴보고 있겠네.”

“물론이죠,” 존은 대답하고 바로 빠져나와 문 쪽으로 향했다. 그는 문을 막 나서다 말고 멈춰섰다. “당신 혹시 사투리 할 줄 알아요?”

“서두르라구, 존.” 셜록은 잽싸게 대꾸하며 따라가 문을 잡아주었다. “경사님 기다리시게 하고 싶진 않을거 아냐.”

레스트라드가 첫번째 사건부터 이야기해나가는 동안, 셜록은 관심을 일부분 사무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기울이고 있었다. 존의 말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샐리의 목소리는 조금 더 귀에 들어왔다. ‘그 침대 이야기’나 ‘잇자국’, ‘미소’ 정도는 알아들었고, 일부러 문이 잘 닫히지 않은 양 하며 몰래 발로 문을 좀더 열었을 때 ‘이용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 인간 지금 정상이 아니라구요, 존.” 샐리가 말하고 있었다. “당신도 그건 알잖아요? 맙소사, 그 인간 실제로 사과까지 했다구요!” 셜록에겐 더이상 레스트라드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정상으로 돌아가면 이걸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난 당신이 저 사람 친구인 줄 알았는데요.”

셜록은 속에서 분노가 울컥 치미는 걸 느끼며, 당장 사무실을 뛰쳐나가 저 빌어먹을 여자의 입을 닫아버리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존은 미칠듯이 고결하기 짝이 없다; 샐리는 그가 두번 생각할 기회를 줄 요량으로 말다툼을 걸어온 건데 말이다.

존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며, 필요해질 경우 끼어들 태세를 취했다. 이제 존이 자신에게서 물러나버릴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당장이라도 스코틀랜드 야드 모두에게 그들의 관계를 알려버리고 뒷일따위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미안해요, 샐리.” 존의 말이다. “당신이 하려는 말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요.” 셜록이 바랐던 것보다도 괜찮은 듯한 목소리였다.

“셜록은 어떤 면에서 바뀌긴 했죠, 그래요.” 존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을 못 본다는 거 말고는 그 - 부상 다음에 바뀐 거에요. 그 결과로 생긴 것도 아니구요. 그건 그렇고, 우리 사생활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셜록은 문이 다시 닫히게 두고는 다시금 레스트라드에게 관심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문이 벌컥 열리고 존이 들어오더니, 셜록 옆으로 재빨리 다가와서는 팔을 잡았다. 셜록은 그의 긴장까지도 느낄 수 있었기에 그에게로 기대섰다.

레스트라드는 잠시 멈추고 전화를 받던 중이었다. 셜록은 존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 사랑.” 존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다, 들려오는 방향을 볼 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다.

셜록은 그를 쿡 찌르며 중얼거렸다. “너 또 그랬어.”

“미안, 뭐가?” 존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미안해.”

“말했잖아, 그건…” 셜록은 자제하기로 했다. “난 그거 좋아.” 그의 말에, 존의 관심이 쏠리며 고개가 자신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이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다. 불현듯 집으로 돌아가, 둘 사이에 아무 것도 없고, 걱정할 만한 외부 영향도 없도록 - 존에게 감싸안겨 있고픈 강력한 열망을 느꼈다. 자신이 존에게로 기대기 시작한 걸 알아차리고는 이런 생각들이 얼굴에 드러나보이는 게 아닌지 의아하며 스스로를 억눌렀다. “미안.”

존은 길게 숨을 내쉬더니, 스트레스를 덜어낸 것 같았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에는 다시금 미소가 배어났다.

크흠, 헛기침 소리에 셜록은 레스트라드가 전화를 끊은지 좀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레스트라드에게로 돌아서며, “그리고?” 물었다. “계속해요.” 그는 ‘서두르시죠’ 하듯 팔을 휘저어보이며, 티나지 않게 존의 발 옆에 스스로의 발을 맞대었다. “우린 종일 여유로운게 아니니까요.”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쯤에는 셜록의 인내심도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존은 레스트라드와 잡담을 하면서 자켓을 건네주었다. 하고 많은 이야기들 중 하필이면 제임스 본드라니; 지루하기 그지없던 그 영화보던 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다음엔 몬티 파이튼 시리즈(Monty Python)라도 보자고 해볼까 생각중이에요.” 음흉한 말투로 레스트라드에게 그런다. 

“치즈 장인에게 복이 있나니!”[각주:9] 레스트라드의 외침이 존에겐 이상하게도 재미난 모양이다.

“유제품 생산자들 모두를 말씀하시는 거겠죠.”[각주:10] 그의 대답에 이젠 둘 다 낄낄거리고 있다. 셜록은 온통 불만스럽기만 했다.

어서 가자구, 존.” 문 옆에 선 채, 셜록은 성급하게 채근했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멎더니, “행운을 빌어주지.” 레스트라드가 말했다. “저 인간이 그럴 거라고는 상상이 안되는데, 난.”

“아, 놀라실 거에요.” 존이 대답했다. 이젠 그래도 문 쪽으로 오고 있긴 한 모양이다. “코니 프린스 건 이후로는 형편없는 텔레비전 프로도 보게 만들었다구요.” 그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때만 빼면…” 완전히 멈춰서더니 숨소리도 함께 멎었다.

젠장.

셜록은 앞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꽉 붙들고는 문 밖으로 끌어냈다. “좋은 하루 보내시죠, 레스트라드.” 저항도 하지 않는 존을 끌고 나가며 내뱉듯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며, 존이 건물을 나설 만큼은 정신차리고 있어주기만을 바랐다. 이건 분명히 문제 상황인 것 같았다. 택시를 탈 때까지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까.

얼마가 지났을까, 존이 입을 열었다.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 당연하겠지만.” 창문에 반사되어 울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럼, 넌 날 속였던 거겠네. 그날 텔레비전에 - 그 낮시간 프로그램이 뭐였든간에 - 푹 빠져있는 척했던 거야. 그래야 내가 나갈 테고, 넌 모리어티를 만날 수 있게 될 테니까.”

셜록은 어쩐지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에게 메모리스틱을 줬다고 거짓말했던 것도 알았지.” 존은 말을 이었지만, “이런 건 별거 아냐, 정말.” 스스로도 수긍하지 않는 말투였다.

“미안해, 존.”

“괜찮아.” 그가 말했다. “그냥 좀 다른 속임수일 뿐이잖아. 안그래?”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잇는다. “왠지, 거짓말이 더 진짜같이 느껴져.”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더 이상했다. 존이 점심을 준비했고, 셜록은 배고프지 않았지만 어쨌든 먹었다. 그가 마이크로프트에게서 온 최신 업데이트 자료들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셜록이 소파에서 곱씹어보는 내내 그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느지막한 오후쯤 되자 셜록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졌다. “그냥 나한테 소리라도 지르고 그만하면 안돼?” 결국 따져묻고 만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존이 다가섰다. “그거야 할 수 있지.” 그의 말투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셜록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놀래키지 않으려 워낙 조심스러워하는 존이기에, 이 남자가 얼마나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다.

“어떻게, 씨팔, 그런 바보짓을 할 수가 있어?” 존이 몸을 숙이며 묻는다. 소리치는 게 아닌데도 어쩐지 더 심하게 느껴졌다.

“가버리다니, 너 혼자. 누구나 다 알아주는 싸이코패스에다 살인마를 만나러. 그것도 씨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말야. 네녀석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도 말 한 마디 안 하고, 네 빌어먹을 제일 친한 친구 따위는 쏙 빼놓고서.”

그는 셜록의 머리 양쪽 - 소파 등받이에 두 팔을 버티고 섰다. 점점 더 낮게,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그의 목소리에 셜록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정말 적절한 현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네 제일 친한 친구인데, 널 위해서라면 죽어줄 수도 있고, 널 위해서 씨팔, 죽여주기까지 했는데. 널, 씨팔, 사랑하는 사람한테. 너, 이 고집센… 자기밖에 모르는… 거만한… 같으니라구.”

무거운 침묵. 그 사이로 들리는 건 오직 스스로를 제어하려는 존의 숨소리뿐이었다. 그간 한참을 억눌러왔던 게 분명했다.

“좀 나아?” 셜록은, 스스로의 맥박이 평소보다 상당히 빨라진 걸 느끼며 물었다.

“침대로 가자.” 존의 대답이었다.[각주:11]  


Artwork by 하이지달





몇 시간 후, 그들은 잠옷 차림으로 소파로 돌아와 있었다. 존은 저 끔찍한 탐정물을 보고 싶어했으니까 - 그는 셜록에게 침대에서 좀 자 두라고 했었지만, 셜록은 지금 존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기에 생각할 게 있다고 둘러대며 따라왔었다. 그런 그에게, 존은 쇼를 보는 재미를 망쳐버리지 말라고 약속까지 받아둔 상태였다. 

셜록은 정말 생각하고 싶었다. 존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 - 그리고 둘 사이를 이렇게나 단단하게 이어주고 있는, 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어디에서 생겨난 건지 생각하고 싶었던 거다.

그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대고 누웠고, 존은 그의 앞에 포옥 파묻혀 있었다. 왼팔은 존의 목 아래에 두고 가슴을 감싸안았지만… 유두를 지분거리진 않았다. 지난번에는 손목을 찰싹 얻어맞았으니, 이번엔 존의 심장이 뛰는 바로 위에 그저 얹어두기만 했다.

오른손으로는 존의 허리께를 감싸안았지만… 잠옷 아래로 밀어넣으려 들진 않았다. 존이 TV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게 뻔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에 전까지는 없었던 감정이 생겨났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머리를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존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다. 가끔은 둘 사이에 확연한 긴장감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복도에서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생각하다 이내 정신을 차려본다. 하지만 이게 셜록을 괴롭히는 문제도 아닐 뿐더러, 둘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이 그래왔던 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까.

되돌아보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다음으로 기억해냈던 건, 불현듯 존이 공기처럼 느껴졌다는 거다.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그의 일부분. 이어져 있는 느낌.

이런 감정들이 없는 상태로 아침에 눈을 뜨는 걸 상상해보려 했다. 존이 그의 침대에 있는 게 갑자기 거슬리게 될까? 그런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아직 제대로 섹스조차 해본 적 없지 않은가 - 그걸 할 때 존이 어떤 소리를 낼지 알아보는게, 매력적인 프로젝트로 느껴지지 않을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물론 시력을 되찾게 되면, 존에게 이만큼 의존적이진 않게 될 거다; 예전에 그랬던 대로 돌아가게 되겠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니, 앞을 볼 수 있기를 가장 지독하게 갈망했던 순간은 사실 일과 관련된 게 아니라, 존을 보고 싶었던 순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표정을, 반응을, 더 이상 숨기려 들지 않는다던 그의 얼굴을 - 셜록은 허드슨 부인이 설명해주었던 그 표정을 보고 싶었던 거다.

그저 친구였던 때로 되돌아가는 것도 생각해보았다. 존이 그를 사랑한다는 걸 알지 못하고 그저 넘겨버리던 그때로. 그리고는 존이 얼마나 인기있는지,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지를 생각해보았다. 바이라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거란 사실과, 얼마나 현실적인 사람인지도… 셜록이 거절한다면, 그는 오는 사람을 막지 않을 거였다. 결국 어딘가에서 올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겠지, 그것도 꽤나 많이. 셜록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고는 생각을 재빨리 다른 쪽으로 돌렸다.

존을 떼어놓으려던 샐리의 말과, 그에 대한 존의 대답을 들었을 때 느꼈던 분노를 생각해 보았다. 셜록 스스로는 모든 게 달라졌다고 인식한 것과는 달리, 존은 성격적인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한 게 분명했다. 어디에서 왔든간에 - 이 감정들을, 그저 조금씩 알아차린 게 아닌, 그간 키워왔다는 게 실제로 가능이나 한가?

셜록은 오랫동안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둘이 함께 소파에 누워있다는 게 떠올랐다. 마치 그날 밤처럼 - 존이 잠결에 그에게 첫키스를 선사했던 그 밤 말이다. 그들의 자세는 그때와 거의 흡사했다.[각주:12] 

그는 왼쪽 팔꿈치로 기대어 몸을 일으켜 앞으로 숙였다.

“존,” 속삭이듯 말했다. 답은 없었다… 존은 거의 두 시간동안 이 어이없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누가 범인인가’(whodunit)를 알아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존,” 이번에는 존의 귀를 살짝 깨물며, 셜록은 다시금 속삭였다.

“5분만, 셜록.” 그가 어깨를 움츠리며 대꾸한다. “5분만 기다려주면 안돼?”

“창문닦이라구, 존. 확신해.”

“창문닦… 셜록!” 존은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고작 몇 분도 기다려줄 수 없는거야? 그리고 무슨 소리야, 확신한다니? 당연히 너야 확신하시겠지! 첫번째 광고 시간쯤엔 모든 걸 다 파악해버렸을 테니까, 저들이 재채기하는 것만 보고도 말야.”

“내 말은, 확신이 섰다구. 존.”

존은 얼어붙은 듯 굳었지만, 이내 더듬거려 리모컨을 잡아서는 텔레비전을 껐다. 완전히 돌아누울 만큼의 공간은 없었기에 그는 셜록에게 기대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완벽했다. 셜록은 그날 밤에 그랬던 것처럼 존의 손이 목덜미에 와닿는 걸 느끼며, 어딘지 알 수 있도록 존의 얼굴에 한 손을 가져다 댔다. 이것까지 딱 맞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어차피 존은 알 리도 없을 테고.

“진심이야.” 속삭이듯 말하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 원문: The Heart in the Whole (14/20): Are You Sure? 
  • 역자 주석: 몸으로 배워가고, 고민하면서 차근차근 마음을 깨달아가는 셜록이 사랑스럽다. 계속 ‘응’이라니 XD
      존이 북부 방언으로 읽어준다던 부분에서는, 벤이 테닥 따라하던 말투가 생각나서 마틴으로 상상해보니 웃기더라.
      게다가 중간에 간지폭발(?) 존의 비속어… 고민하다 쓰긴 했는데, 왠지 위화감이 없어서 2차 고민;;
       …그나저나, 조금 늦은 업데이트에 기다리셨던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 감사합니다. : ] 
  • 그림: 하이지달님께서 거친 남자 존을 그려주셨습니다. 이건 반드시 [전체 장면]을 보셔야 해요!! >_<;;;


  • ◀ 13. 자제력 | Control  [ 목록 ]   15. 친밀감 | Intimacy ▶ 



    1. “Mr M Holmes abhors ‘text speak’.” - 전화 많이 해드릴 수 있으니 제게 그 번호를… [본문으로]
    2. Aㅏ… 존은 진짜 남자였어… [본문으로]
    3. ‘how long it takes you to get me off’ - 이렇게밖에 옮길 수 없는 더러운 마음;; [본문으로]
    4. ‘what planet are you from?’ face - 님 제정신이니? 로 옮기려다 귀여운 존을 생각해서… [본문으로]
    5. ‘being tense’ - 굳어진다고 옮긴 이유는 ‘절제된 표현’ 때문. 앙큼한 셜록 XD …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본문으로]
    6. ‘Just stick with the 'Yes' thing’ - 꺄 XD 천만번이라도!! [본문으로]
    7. 악몽 때문이 아니면 밤에 왜 깨우는 걸까? 희한하네~ [본문으로]
    8. “I’ve created a monster.” - 셜로기는 천재잖아요, 존 어머님. [본문으로]
    9. “Blessed are the cheesemakers!” - 몬티 파이튼 시리즈 중 Life of Brian의 유명한 대사. 예수가 하는 말을 주인공이 잘못 알아듣고 cheesemakers라고 한 것. [본문으로]
    10. “I think you mean any manufacturers of dairy products,” - 이어지는 영화 대사 따라하기. 원래 대사는 ‘it’s not meant to be taken literally; it refers to any manufactureres of dairy products.’로, 예수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면서 어이없게 해석해버리는 개드립. [본문으로]
    11. Aㅏ… 역시 존은 진짜 남자였어… [본문으로]
    12. 7편 참조.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