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폭로  | Revelation



(셜록 시점)


나는, 샐리 도노반을 찾아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해야겠다는 단 한 가지 일념에 사로잡힌 채 플랫을 나섰다. 그녀가 날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늘부터는 더더욱 그렇다는 것도. 하지만 그녀가 존에게까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간섭 때문에 존이 얼마나 상처받게 될지를 알려줄 수만 있다면, 아마 그녀가 들었던 게 사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줄 수도 있을거다… 확률이 높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해봐야만 했다.

우리가 떠나려던 때 창밖으로 보이던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마이크로프트와 내가 했던 이야기를 엿들은 게 분명했다. 그에게 솔직했었더라면, 오늘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설명했었더라면. 이제 와서 그런 바람 따위는 아무 소용 없겠지.

그리고 마이크로프트, 내 하나뿐인 형.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도움이 필요하다던 그 ‘문제’라는 건 그의 계략이었던 거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되돌아보면 그가 대화를 그쪽으로 몰아갔던 걸 알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그 빌어먹을 발언을 하게끔 만들었던 거였다. 지독하게 존의 마음을 아프게 할 거란 것조차, 난 이제서야 알게 되었는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아프게 죄어오는 걸 느끼며,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러시아워의 지독한 교통 체증을 뚫고 택시를 조금이나마 빠르게 움직이도록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경험상 이 시간 쯤에는 샐리가 스코틀랜드 야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그녀가 막 떠난 후였다. 사실상 전화로는 불가능한 - 직접 설득해야 할 만큼 어려운 문제라 생각했기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는 않았었지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통화중이었다. 나는 10여분간 로비를 서성이면서 그녀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중이었다 -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나 오랫동안 통화하는 거지?

이제 뭘 해야 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서성이다 말고 고개를 들었을 땐 레스트라드가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셜록?”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셜록, 무슨 일 있나?”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게, 또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샐리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녀의 직업을 감안하면, 그녀가 전화번호부에 집 주소를 남겨두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는 반 발짝 물러섰고, 조금은 불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내가 꽤나 평소답지 않게 보였던가보다. 나는 안절부절하며 머리로 손을 올리고는, “도노반 경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에게 말했다. “급한 일이에요.”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샐리는 퇴근한 것 같은데.” 쓸데없는 말이었다. 이미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면 내가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진 않았겠지.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

그가 정말 진심인 것처럼 보여서, 난 놀랐다. 그가 날 참고 받아주는 건 내가 그의 일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내가 로비에서 무언가 이상한 짓이라도 벌일까봐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 대부분은 날,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릴 순간만을 기다리며, 아직 터지지 않은 폭탄이라도 되는 양 취급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마치 그 날이 온 것만 같았다.

“셜록, 자네 화난거군. 명백하게도.” 그는 내 팔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발끈하고, “난 화같은건 내지 않습니다.” 대꾸했다. “그렇게 뻔하지도 않다구요!”

그는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날 이상하다는 듯 응시했다. “존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그 말에 동의했겠지만,” 그는 말했다. “지금 당장은 자네, 화난 게 맞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내근 경사가 전화해서 말해줄 만큼이나 뻔하게 보인다구.”

돌아서서, 날 외면하고 있는 내근직 경사를 신랄하게 노려보았다.

“좋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난 도노반 경사를 찾아야 해요.” 물론, 이미 언급한 거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움직이게 만들 때까지는 어느 정도 반복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샐리는 왜?” 그는 알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좋아, 알았다구.” 그는 동의했다. “내 사무실로 따라와. 어떻게 해야 할지 찾아보자구.”

그를 따라들어가 사무실에 서 있었다. 그는 의자 쪽으로 손짓해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그는 내게 물어왔다. 다시금 아무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셜록.” 그는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내 도움이 필요한 거면…”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 도움 따위 필요없다니까요!”

그는 곰곰이 생각하듯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필요할걸. 그렇지 않아?” 서로의 역할이 바뀌어버린 것 같은 이상한 순간이었다. 존이 ‘분홍색 연구’라고 이름붙였던 그 사건 때로 되돌아간 것처럼.

존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마음을 정했고, 졌다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샐리가 들어선 안될 - 좋지 못한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정황상 맞지 않아서 오해할 여지가 있어요.” 어색하게 설명해 나갔다. “이제 존에게 그걸 말하려 할 텐데, 그러지 말라고 설득하고 싶은 거구요.”

레스트라드는 사건과 관계 없는 개인적인 문제라는 데 살짝 놀란 것 같았지만,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렇군.” 그는 이어 말했다. “무슨 이야기였는데? 샐리가 왜 존에게 이야기하려 한다는거지? 그녀가 존에게 이야기하려는 걸 자넨 어떻게 아는거야? 왜 막으려는 거고,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나는 조금 놀랐다 – 이 남자, 조리있는 생각도 할 수 있는 거였군. 이 모든 걸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가 옳았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난 그가 필요했다.

“내 형 마이크로프트와 내가 한 이야기는 존에 대한 거였습니다. 샐리는 가십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니, 존이 그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존에게 말하고 싶어할 테죠; 난, 그렇게 못하게 막아야만 합니다. 왜냐면 그게…” 나는, 불현듯 이어갈 말이 마땅치 않다는 걸 깨닫고 잠시 멈췄다. “그게, 존에겐 당황스러울 테니까요.” 그리고, 침을 삼켰다. “그에겐 무척, 당황스러울 겁니다.” 주변 온도에 비해, 이상할 만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레스트라드는 나를 가만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래서, 자넨 그녀가 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존에게 할 거라고 추측한다는 거지?” 그는 물었다; 그의 질문들을 모조리 빗겨갔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다시금 인상적인 인지능력을 보여주고 있군.

“우리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문자 3개를 보내고도 음성 메시지까지 남겼어요.”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걸 보면 그녀가 존에게 말하려 한다는 걸 알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 하지만 그녀가 왜 그러려는지는 알 수 없지.” 그는 관찰하고 있었다. “그럼 왜 존이 거기에 답을 하지 않은거지?”

“내가 빌려갔거든요.”

“자네가 빌려갔다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는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자네가 훔쳐간 거겠지, 아닌가?” 그는 분명 자기 신분증에 대해서도 전부 기억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더 이상 피할 방법은 없어보였다.

“좋습니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우리가 그 집에서 출발했을 때 샐리를 봤고, 바로 존에게 연락하려 할까봐 걱정돼서 핸드폰을 뺏어서 꺼버렸어요.” 내 기억으로는, 갑자기 끌어안았을 때 존은 꽤나 놀란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서는 존이 차를 타러 간 사이에 핸드폰을 확인했고, 내 의심이 맞았다는 걸 알았구요.”

“그럼, 메시지는 지웠나?”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는 다시금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은 없었습니다. 읽어보지도 못했어요.”

“핸드폰 아직 가지고 있어?” 그는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녀가 뭐라고 보냈는지 좀 보자구…”

다시금 고개를 저으며,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설명했다. “존은 내가 그의 물건들을 빌려가는 데 익숙하니까,” 레스트라드는 ‘빌려간다’는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그냥 넘어갔다. “자기 핸드폰을 쓰려고만 했다면 자기 것처럼 내 주머니부터 뒤졌을 게 분명하니까요. 아예 끄고 숨겨뒀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좋아, 그럼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봐줘.” 말하기 시작했다. “도노반 경사가 존과 자네를 떼어놓으려 들 만큼, 자네와 자네 형 이야기를 오해했다는 거지.”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것 같나요?” 그에게 물었다. “그가 날 떠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양 손을 들어보이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나?” 외치다시피 대꾸했다. “내 생각엔 자네가 걱정하는 게 그걸 것 같은데 – 그게 이 야단법석을 떠는 이유 아냐?”

“그가 상처받을 테니까요.” 그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걸 떠올리자, 나는 침을 삼키는 것조차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상처받는 건 원하지 않아요… 그에게 그래선 안되는… 그런게 아니고…” 나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막아야만 해요.”

레스트라드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내게 물어왔다. “대체 자네 형이랑은 무슨 이야기를 한 건가?”

프로젝트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난, 사랑같은걸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뭐, 그건 이론의 여지가 있어보이는군. 그렇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 그가 말했다. “가자구, 샐리가 존을 찾아서 몽땅 털어놔버리기 전에 말이지.” 내가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가엾은 샐리가 자네한테 당하는 꼴은 못 보겠거든.” 그리고 말했다. “나랑 같이 가든가, 아님 말구.”

나는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왜 날 도와주려는 겁니까?” 그 말에, 그는 조금 딱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셜록,”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가 친구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고는 해도, 자네에게도 친구는 있는 법이거든.”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고, “그건 그렇고,” 그는 약간 겸연쩍어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항상 해피엔딩이 좋더라구.”

지하철이 좀더 빨랐을지도 모르겠다. 샐리의 아파트까지 가는 데 차로 거의 한 시간이 걸렸으니까. 우리가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레스트라드는 베이커가로 가려 했으나, 난 그녀가 그쪽으로는 가지 않을 거란걸 알고 있다 - 그녀는 분명, 날 빼고 존만 따로 만나려 들 테니까. 그녀가 앤더슨과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레스트라드 말로는 앤더슨이 우리보다 먼저 현장을 떠난데다, 아내와 다시 잘 해보려고 주말 내내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하니 같이 있는 건 아닌 게 확실하고. 나는 계속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보고 있었지만, 이젠 아예 꺼 버린 것 같다.

우리가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하고 있었을 때, 뒤쪽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샐리였다. 너무도 괴로운 표정의.

당신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녀는 내게 쏘아붙였지만, 평소보다는 강도가 약했다.

레스트라드가 한 발짝 다가섰고, “샐리, 괜찮나?” 그녀에게 물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잖아!”

그녀는 훌쩍거리며, “저 사람 잘못이에요.” 비난하듯 말했다. “저 사람이 그렇게나 완벽한 싸이코패스만 아니었다면, 나도 절대 그러진 않았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고, “절대 그러진 않았을 거라구요…”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울기 시작했다.

레스트라드는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고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주며 조심스럽게 토닥여주었다. 그는 그녀가 꺼내든 열쇠를 부드럽게 받아들고 아파트 문을 열었고, 내가 뒤따라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었다.

“샐리.” 레스트라드는 그녀를 소파에 앉히며 부드럽고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샐리, 뭘 한 거지?”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설마 그녀가 벌써 존에게 이야기해버린 건 아니겠지? 존은 집에 있겠다고 약속했었고, 내가 나갔다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가 집으로 갔을 리는 없으니까.

“그가 전화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퇴근하자마자, 존이 전화했었어요.”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존이 핸드폰을 찾아낸 거다. 생각이 미친듯이 앞서갔다; 그는 내가 마이크로프트와 한 이야기를 샐리가 말하는 대로 들었을 거다. 그는 일부러 내가 그의 핸드폰을 뺏어갔다는 것도 알았을 거다. 그가 알아내는 걸 막으려 드는 것도 알아차렸을 테고, 내가 거의… 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그가 그런 말을 해서 날 놀라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난 그를 안았을 거다. 그 바닥에서. 내가 그를 안았을 테고, 아마 지금쯤은 이러고 있지 않아도… 생각이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다. 나는 신음하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샐리와 레스트라드가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샐리는 레스트라드에게 대꾸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존을 어떻게 이용하려 들었는지,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것도 아니면서, 이기적인 생각으로 그를 교묘하게 속여왔는지 -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그를 아끼지 않았다면, 대체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내게 무슨 일이 생긴걸까? 머리는 핑핑 돌았고, 마치 정말 아프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를 보라구!” 레스트라드가 외치는 소리가 머릿속 희뿌연 안개를 뚫고 들려왔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둘 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샐리는 아예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들어버린 거잖아.” 그는 그녀에게 타이르듯 말했고, “뭐였든간에, 부탁이니 내게도 좀 알려줘 봐.” 잠시 멈추었다. “이 남자가 자기 형한테 항상 사실대로 말하던가?” 그가 더욱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으며 “특히,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한 거라면?” 내 쪽으로 손을 저어보였다. 샐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난…”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잠시 멈추었다. “난… 난 내가 좋은 일을 하는 거라고, 존이 알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구요. 그런데 그가… 그는…” 그녀는 소파에 주저앉았고, “그는 정말… 괴로워했어요.” 다시금 울기 시작했다.

가슴이 죄어와 숨을 쉴 수조차 없었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 레스트라드는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았지만, 샐리 옆에 앉아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주고는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줘, 샐리.”

조금 시간은 걸렸지만, 결국 모든 걸 다 이야기했다. 존이 전화했을 때 그녀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만나려 했지만, 그가 플랫에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에 숨이 멎어버렸다. 그는 내가 나갔다며,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오라고 했고, 그녀는 재빨리 그쪽으로 향했다. 내 머릿속 일부분에서는 내가 레스트라드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쯤 그녀가 집에 갔을 것임을 계산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자마자, 나와 마이크로프트가 이야기했던 내용을 모두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는 처음엔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이야기했다. “내게 화를 냈죠, 하지만,” 그리고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뭔가가 있는거다. “곧 받아들였고, 그는…” 그녀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고,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지금까지 그런 표정은 한번도 본 적 없었어요.” 그녀는 조용히 덧붙이고는 “그러니까, 끔찍한 것들도 여러 번 봐 왔었잖아요.” 이어나갔다. “직업상, 익숙해지게 되기도 하구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난, 한번도…” 그녀는, 말을 끊고 나를 다시 노려보았다.

당신이 잘못한 거야.” 그녀는 내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만든 건 당신이라구. 이젠 되돌릴 수도, 바꿀 수도 없어. 난… 난 그의 표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구…” 그녀는 앞을 가리기라도 하듯 양 손으로 눈을 꾹 누르고 조용히 흐느꼈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목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지만,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레스트라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 존은 어디 있지?”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 베이커 가에 있나?”

샐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몰라요.” 말했다. “내가 나갈 때까진 있었지만, 누나가 오고 있었으니까…”

“누나라구?” 나는 반문했다. “존의 누나가 뭘 하겠다는 거죠? 누나와는 사이도 별로 좋지 않은데.”

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그냥 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핸드폰에 해리 메시지가 와 있었어.” 그녀는 대답했다. “그걸 봤을때…” 말을 끊더니, “전화걸 만한 친구냐고 물었더니, 누나라고 하더군요. 그가 누나에게 전화해달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잠시 멈추었다. “도저히 그를 그대로 두고 나올 수가 없었어요.” 샐리는 고개를 저었고, “누나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존이 찾는다고만 했어요. 그녀가 금방 가겠다고 했고…” 시계를 흘긋 보고 대답했다. “음, 지금쯤이면 도착한지 좀 되었겠네요.”

그녀의 말에, 난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가야겠습니다. 적어도 설명이라도 해봐야겠어요.”

레스트라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태워다 줄게.”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는, 샐리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샐리?”

그녀는 여전히 훌쩍이고 있었지만, 따라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팔을 건드리며 말했다. “난, 당신이 싫어.”

뭐, 놀랍진 않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은 위험한데다 제멋대로인 개자식이라고 생각해.” 레스트라드는 대꾸하듯 뭐라 하려 했지만, 그녀는 계속했다. “하지만, 미안해.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잠시 멈추었다. “당신 때문은 아냐. 전부 당신이 만든 문제니까; 그렇지만 존에 대해서는, 미안해.”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침을 삼키고는 다시 나를 마주보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존에게 약속했거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아파트에서 달려나왔다. 레스트라드도 뒤따라왔다.





몇 시간 동안 존을 찾아 온 런던을 돌아다녔다. 당연히, 제일 먼저 베이커가로 갔었지만 비어있었다. 존의 물건들만큼은 다 제자리에 있었다; 거실 테이블에는 그가 마시던 차가 담긴 머그컵이, 부엌 싱크대에는 접시가 놓여있었다. 샌드위치를 먹었던가보다. 우리는 그가 자주 들르는 술집과, 근처 모든 곳을 뒤져봤지만 어디에도 없었고, 그를 봤다는 사람조차 없었다.

존의 핸드폰은 켜져 있었지만 신호만 갈 뿐이었다. 난 추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레스트라드는 경찰 공권력 남용이라며 말렸다. 하지만 해리 왓슨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것에는 동의했고, 실제로 그녀가 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내가 누군지 말을 꺼내자마자 끊어버렸다 - 어쨌든 나는 주위의 소음들로부터 대략적인 장소를 규명하려고도 해보고, 다시금 노력을 집중해서 잠시 후엔 흩어져서 더 많은 장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들은 유행을 타는 바가 아닌, 옛날 스타일의 - 이야기하기 좋은 조용한 술집에 있는게 분명했다.

결국,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많은 얼굴들 사이를 찾아 헤매다 존과 닮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의 코와 모래색 머리카락을 빼닮은 그녀는, 반대편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살짝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존이 늘 하던 그대로. 확실히 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나는 그를 찾아냈다.

몇 시간을 찾아 헤매다가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느껴졌지만, 그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불안감은 커져갔다. 그는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그는 앞에 놓인 술을 마시지도 않고 있었다 - 사실, 건드리지조차 않았다. 그는 누나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진짜로 바라보는 게 아니란 건 분명했다;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몇 분여가 지난 후, 그녀가 일어나서 그의 팔을 짧게 건드리고는 화장실 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다 - 내게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빠르게 바를 가로질러 해리의 빈 자리에 앉았다. 존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몇 초간 바라보더니 갑자기 뛰쳐나갔다. 존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나는 잠시 놀라 움직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곧 일어나 그를 재빨리 뒤쫓았다. 그는 건물 뒤쪽으로 향했고 나는 화재용 비상구로 빙 돌아가 지저분한 골목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그를 찾아냈다. 그는 가쁜 숨을 고르려는 듯, 허벅지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존,” 나지막히 그를 불렀다. “존, 나랑 이야기 좀 해요.”

그는 낮게, 가쁜 소리를 뱉어냈다. “뭐라고 이야기해줄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하나도 좋지 못했다. “난 네 애완동물이자 프로젝트일 뿐이잖아.” 그는 내뱉듯 말했다. “네가 시키는 게 아니면, 난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그녀가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물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의도적으로 널 사랑하게 만들려 했다더군. 그런 감정 따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내가 결혼해서 떠나버리면, 넌 편리한 파트너를 잃게 될 테니까.”

그가 말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내가 이걸 괜찮은 생각이라고 여겼었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뭐, 잘 되긴 했지. 그렇지 않아?” 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신랄한 말투였다.

“널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그 말에, 가슴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단 한 가지만 빼면…” 난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게 환상이었다는 거 - 날 위해 꾸며내준 자네의 연기였어. 이제 난, 내 마음에 보답해줄 리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누군가를 사랑하는게 된 거야. 심지어 실재하는 사람인데도 말이지.”

그에게로 손을 뻗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만, 스스로를 억누르며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사실이 아니에요, 존.”

그는 웃었지만, 그건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사실이 아니라구?” 그는 되물었다. “샐리가 이 모든 걸 꾸며내서 내게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건가?” 입을 열었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그 빌어먹을, 유쾌한 업무 관계를 위해서 자네 몸을 희생했다고 하던데, 그게 거짓말이라구?”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불현듯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존과의 관계는 희생 따위가 아니었다. 단 한번도 그런 적은 없었다. 꼭꼭 가둬두었던 내 숨겨진 일부분 어딘가 -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면, 어째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계획을 생각해냈었겠는가. 그를 원하고 있었기에, 내 두뇌가 의식적으로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낸 거였다. 한줄기 빛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깨달음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그에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래요, 존. 거짓말이었어요!”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 당연히 그건 거짓말이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명백했는데!

나는 그에게 이걸 설명해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핸드폰이었다. 그는 버튼을 몇 번 누르더니,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나는 의아하다는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 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섹스를 얻고, 나는 내 파트너를 얻는 거지. 내가 보기엔 완벽하게 논리적인 것 같은데.”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샐리가 말하지 않은게 이거였다. 이것 때문에 그가 내게 먼저 이야기해보지도, 반박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다 받아들인 거였다. 나는 빠르게 되새겨보았다. 샐리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닫자마자 녹음하기 시작했던 거다.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쾌한 업무 관계를 위해서 육체까지 희생한다니, 오직 너만 그걸 논리적이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 그럼 여전히 존이 너를 사랑하게 만드는게 네 목표란 말이지?”

저 말들! 바보같으니라구! 샐리가 기억하고 있거나, 한마디 한마디 읊어주었을 리가 없었다 - 존이 저 말을 하자마자, 녹음된 게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야만 했다. 샐리가 존의 핸드폰으로 옮겨주었던 거다. 해리의 메시지를 본 게 그때였겠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던 순간, 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우리가 합의한 바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그게 최선이겠지.”

내 목소리가 항상 저렇게나 차가웠던가? 그땐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감정들이 내 가슴에서부터 비어져나오려 할퀴어대는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물었다:

“그러면, 너는 그 댓가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줄 건가?”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는 물론, 알고 있었다. 존 역시 알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부인하는 순간 우리 둘 다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난 소시오패스야, 마이크로프트.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 텐데.”

존은 메시지를 끄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날 보지 않은 채, 평소에 말하는 것과 다름 없는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평생 자네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살아갈 수도 있었어, 너도 알겠지만.” 혼잣말처럼 이어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난 행복했을거야.” 그는 잠시 멈추었고, 갑자기 가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젠,” 이어지는 그의 말투는 점점 불안해져갔다. “이젠 너무 늦어버렸어. 난, 되돌아갈 수 없어.”

갑자기 그의 초점이 돌아오며 나를 마주보았고, 그의 시선이 내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 네가 뭘 했는지 알면서도 - 널 바라보고 있으면, 네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밀어넣고 네 입술을 맛보고 싶어져. 네 온 몸을 어루만지며 네가 전율하는 걸 느끼고 싶고, 잠들었을 때 내 목덜미에 와닿는 네 숨결을 원하게 돼.”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고통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모든 건 거짓말이었어. 넌 어떤 것도 원한 적 없었겠지. 날 옆에 두려고 섹스를 이용했던 것 뿐이니까.” 이제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모든 숨결과 신음소리, 내게 손을 뻗어오던 그 순간들 모두, 그저 꾸며냈던 것일 뿐…” 그는 갑작스레 돌아서서, 골목길 구석에 토해대기 시작했다.

그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그는 날 막으려 손을 내밀었다. “건드리지마!”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시는, 내게 손댈 생각도 하지마.”

내가 물러선 그때, 비상구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해리였다. 그녀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내게로 달려들었다. 당연히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알 수 있었지만, 피하거나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울 만큼 힘이 셌고, 달려들면서 가속도까지 붙었다; 나는 벽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즉시 내게 덤벼들었고, “이 미친 자식!” 내게 소리쳐댔다. “세상에 어떤 악랄하게 꼬인 새끼가 이딴 짓을 할 수 있어? 그것도 내 동생같이 다정하고 너그러운데다, 네놈 일이라면 세상 만사 다 제쳐두고 달려올 사람한테?”

나는 존을 찾으려 그녀 쪽을 돌아봤지만, 그는 주정뱅이마냥 휘청거리며 골목을 나서고 있었다. 해리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으르렁거렸다; 소리쳐대는 걸 그만두고 그를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한게 분명했다.

“꽤나 자랑스러우시겠군그래.” 그녀는 쓰게 말했다. “아프간 전군조차 하지 못했던 걸 해내셨으니 - 네놈이 내 동생을 망쳐놨어.”

내가 움찔하며 물러서는 틈을 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네 멋대로 내 동생을 들었다 놨다 한 덕분에, 이제 내 동생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더이상 알 수 없게 되어버린거야.”

이젠 존이 거의 거리까지 다다랐기에, 그녀가 뒤따라가야만 했다. 그녀는 뛰어가려 돌아서면서 나를 돌아보았고, “내 동생한테서 떨어져.” 내게 경고했다. “할만큼 해먹었잖아.” 그녀는 그대로 달려가, 골목 거의 끝에서 존을 잡고는 코너를 돌아 데려갔다.

나는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멍하니 주머니에서 끄집어내 화면을 쳐다보았다 - 레스트라드였다. 나는 전화를 무시하고 내 위치를 문자로 보냈다. 5분 후, 미끄러지듯 달려와 내 앞에 멈춰서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그는 소리쳤다. “싸우기라도 한거야?”

나는 눈가로 손을 올려보았다. 쓰라렸다. 내일쯤에는 퍼렇게 되겠군. “아뇨.” 그에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해리가 그런겁니다.”

“그럼, 그를 찾은거군?” 한숨을 내쉬며 확인하듯 묻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 안 된거라 생각하면 되나?”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는 괜찮아?”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해리가 같이 있어요. 내 생각엔 그녀가 자기 집으로 데려갈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는 말했다. “그럼, 자넬 집까지 데려다주는게 좋겠군.” 그가 날 부축해서 일으켜주었다. 우리가 거리까지 나왔을 때, 내 다리는 뻣뻣하게 굳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레스트라드는 날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다 잘 될거야’나 ‘아침이면 나아질거야’ 같은 진부한 헛소리들을 가끔 중얼거리면서. 나는, 그가 떠날 때 고맙다고 인사한 것 외에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내게 그가 친구 이상이었다는 걸 - 내가 기대하거나, 내게 있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 알게 되긴 했지만.

소파 근처에는 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다양한 책들과 실험들을 의자에서 치우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의자 뒤에는 얼마 전에 내가 존을 눕혀두었던 깔개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나는 단 몇 시간 전까지 보았던 그의 모습을 그려보며 손을 대 보았다. 한기를 느꼈다. 담요를 끌어다 덮었다. 존의 냄새가 났다.

다신 여기 누울 리 없는, 존.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지독하게 상처입히고 말아버린, 존; 내 목적에 맞춰 멋대로 이용하고 비틀어댄, 그 충정을 이용해서 망쳐버린 사람. 아픔만이 가득했던 존의 눈빛.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날 안은 것처럼, 강간범이라도 된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버려서, 몸으로도 아파하던 존. 내 얼굴은 젖어들었다.

이제 존은, 다신 여기로 돌아오지 않겠지; 테이블 위 머그컵의 차를 마시지도, 나란히 앉아 어이없는 텔레비전 쇼를 보며 내 머리를 쓰다듬지도, 내게 키스하지도 않겠지, 다시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침대에서 끌어안고 잠드는 일도, 같이 샤워하자며 졸라댈 일도, 소파에서 애무를 나누는 일도 더 이상은 없겠지. 목이 메어왔다.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발소리가 아니다. 존의 발소리가 아니다. 가끔 다리를 저는, 반찬거리 봉투를 들고 오는 존이 아니다. 더 이상은, 다시는…

마이크로프트가 방으로 들어섰다.

내게로 다가서는 그의 진심어린, 미소띤 표정이 날 20년 전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는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여기 있었구나.” 내 악몽을 잘 설명해서 풀어주고, 내 첫번째 현미경을 고쳐주었을 때의 그 목소리였다.
“다시 만나길 오랫동안 기다렸단다, 동생아.”

저 목소리만큼은 절대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약속을 지켰고, 결코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걱정마, 우린 그를 다시 찾아올테니까.”

나는 형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울었다.
 


  • 원문The Road Less Traveled (15/19): Revelation
  • 저자 주석: Soma Chiou님의 그림 → 허물어지다 
  • 역자 주석: 아파서, 아파서, 아파서 힘들었다.
    번역하려면 한 문장을 몇 번씩 되새기며 읽고 생각하고 써야 하는데, 이번 편은 참 아프더라.
    그만큼 절실하게 마음을 깨닫는 셜록과 너무 크게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존-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사람이니까, 더 강하게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 당연히 원문을 읽으시는게 좋습니다만, 못 보신 분들께 스포가 되지 않도록 조금만 조심해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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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