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가 서로에게 | Learn to Wear Each Other Well (1/4)





레스트라드는 남은 한 주 내내 마이크로프트 홈즈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봤지만 허사였다.

그는 이렇다 할 일 없이 부엌과 소파를 오가며 기나긴 토요일을 흘려보냈다. 이것저것 해보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뭔가 많이 하긴 했는데 무엇 하나 해놓은 건 없다는 막연하게 불만스러운 느낌만 남을 뿐이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곁에 이야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 전 이혼한 이후 혼자서도 꽤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기에, 혼자가 외롭다고 느낀 적은 드물었다.

이건 그저, 몰래 제 동생 주변에서 맴도는 빌어먹을 마이크로프트 홈즈 때문이다. 레스트라드는 홈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처치곤란이란 말이다. 그의 생활을 지금보다도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릴 또다른 홈즈따위 필요 없었다. 게다가, 서류상으로 그의 인생을 속속들이 안다 해도 - 마이크로프트 홈즈라면 그러고도 남겠지 - 그게 실제로도 레스트라드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거기도 하고.

일요일 오후에는 술집에서 시간을 때웠다. 일주일 중 가장 신성한 날, 그것도 다른 사람들은 경기를 보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맥주나 퍼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응당 받게 될 경악에 찬 시선을 상상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면서.

레스트라드는, 일부러도 복잡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의 일이란 게, 사건의 우여곡절이라든가, 배배 뒤틀린 살인범의 심사같은 건 차치하고라도 가끔은 원하던 것보다 지나치게 복잡해져버리기도 했지만. 혐오감과 체념 반반인 심정으로 주시하고 있는 정치란 것도 있었다. 그도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그의 인생에 있어 복잡다단한 문제는 싸그리 다 한 혈통에서 기인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셜록과 왓슨 선생이 월요일 아침 새벽같이 그의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셜록은 여섯 달 전의 어느 사건에 대해 도노반과 앤더슨을 비롯한(두말하면 잔소리다) 몇몇 경관과 셜록에게 앙심을 품은 기술팀원들의 음모 때문에 그땐 제대로 조사해볼 기회마저 거부당했다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어쨌든간에 해결해낸 걸 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하지만 레스트라드는 그 말의 요지만큼은 충분히 이해했다. 셜록은 항상 틀리는 법이 없으니, 그들은 그저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한다는 게 그것인 셈이다.

“자네, 나쁜 놈처럼 구는 건 좀 살살 해도 되잖나.”[각주:1] 레스트라드의 담담한 충고에, 셜록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쏘아보았고 왓슨 선생은 풋, 코웃음치다 말고 쿨럭거리며 얼버무렸다. “어쨌든 우리도 그럴 가능성은 알았네. 그럼 자네가 알아낸 걸 한번 보자구.”

셜록은 실망감은 물론 지루한 티를 팍팍 내면서도, 한줄기 빛처럼 갑자기 해결책이 명명백백해보이게 만드는 사건에 대한 사실들을 공들여 제시해주었다. 가끔 그가 - 천재에게는 자명해보일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 결정적인 단계를 건너뛰면 왓슨 선생이 조언해주기도 했고. 레스트라드는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는 경찰이고, 그게 그의 할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일테다. 

하지만 그의 집중력은 어느새 흐트러지고 말았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도 족히 15분은 지나고 나서였다. 마이크로프트에 대한 것은 물론, 그가 레스트라드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있었음을 셜록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뭡니까?” 결국 셜록은 극도의 경멸을 표시하듯 눈썹을 휘며 물었다. “당신에겐 그 정도로도 확실하지 않단 건가요?”

“아니, 아닐세. 더할나위 없이 확실한걸. 놈을 데려와 대질 심문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겠네.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지 보자구. 수고했어.” 레스트라드는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전에는 단 한번도 셜록을 속이는 데 성공해본 적 없는 그였다. 혹시 마이크로프트라면 모르겠지만. 레스트라드는 셜록이 모르는 뭔가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레스트라드가 늦게까지 남아있는 습관이 들어버린 건, 혹시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야드에 들러주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인정하려 들진 않을 거였다. 애석하게도 진실은 그랬지만. 그는 자기 시간을 더 잘 쓰기 위한 거라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들어와 사는 흔적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작은 플랫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재미없는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찬장에 쟁여둔 차를 천천히 비워내는 것보다는, 사건을 해결하거나 범죄자들을 잡아넣으려 애쓰면서 오후 시간을 보내는 게 그는 훨씬 좋았다. 

사람들이 눈치챘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부분 다른 누구보다도 그가 늦게까지 남아있는다고들 생각하는 탓이다. 책임자라는 위험과 기타등등 때문이겠지, 한낱 중간관리자일 뿐인데도 말이다. 묵은 파일들을 훑어보며 한두시간 정도 가외 시간을 투자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긴 했다. 야드의 다른 사람들과도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늘 간직하고 있는 미해결 사건들 정도는 서랍에 있기도 했고. 그때 그 살인범들의 낯익은 모습들을 살펴보는 건 사무실에서나 플랫에서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당연하겠지만, 시계바늘이 자정을 지나 집에 갈 채비를 하거나 책상 위에 엎어져 잠들게 될 때쯤이면 언제나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궁금하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마이크로프트의 차에 타게 된 건 부슬부슬 밤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자정이 막 지났을 때쯤, 레스트라드는 길을 따라 깔려 있는 짙고 묵직한 안개, 스며드는 한기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으며 야드를 나섰다.

하마터면 그는, 거리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노란 불빛을 비추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차를 못 보고 지나칠 뻔 했다. 그가 지나치는 순간 엔진 소리가 조금 커졌고, 레스트라드는 얼굴 위로 흩날리는 빗방울 사이로 가늘게 눈을 찡그리며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이내 어렴풋이 잘 보이지 않던 선이 익숙한 형태로 드러나보이자, 그는 내심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는 잠시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는지 둘러본 후 올라탔다.

“제 사무실에 어딘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는 코트 위로 내려앉은 물기를 떨어내며 물었다. 따스했던 차 안 공기가 그가 타면서 잠시 습기로 눅눅해진 느낌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핸들 위에 두 손을 포개 얹은 채로 앉아, 엷게 즐거움 어린 표정으로 레스트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럴리가.” 그가 대답했다. “비를 피하고 싶어서요.”

“늘 우산을 들고 다니시는 분이 그런 말씀이라니요.”

마이크로프트는 얼핏, 거의 웃음소리처럼 들릴 법한 소리를 내고는 차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결코 조용해지는 법 없는 런던이었지만 비, 그리고 따스한 차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즈넉했다. 히터 돌아가는 소리만 나직하게 웅웅거렸다; 레스트라드는 조수석의 부들부들한 가죽에 머리를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가는 내내 빗방울이 툭, 툭, 꾸준하게 차창을 두드리고는 미끄러져 흘러갔다. 레스트라드는 가슴께로 팔짱을 끼며, 조금 피곤하긴 해도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길고도 지독했던 한 주였다.

“이번 주엔 뭔가 흥미로운 사건이라도?” 마이크로프트가 가볍게 물어왔다.

레스트라드는 픽,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몇 건 있었죠. 하지만 제가 대답할 필요가 있긴 한 겁니까? 당신이라면 물어보지 않더라도, 원하기만 한다면 내 사건들 모조리 다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난 일개 말단 공무원이라서요.” 마이크로프트는 대답과 함께,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다른 대체 수단을 거치기보다 당사자에게서 직접 들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너 듣는 걸로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수도 있겠지만.”

저 마이크로프트에게도 유머란 게 있다니, 살짝 의외면서도 유쾌하기도 했다. 레스트라드는 나오려는 하품을 삼키며 차창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요. 당신 동생이 한 건 도와줬습니다. 진흙 자욱이랑 맞지 않는데다 범죄 현장에 두 사람이 있다는 걸 입증해주는 혈흔인지 뭔지, 대략 그런 걸로 결론이 났습니다. 저야 그닥 이해가 가진 않았습니다만, 법의학팀 친구들은 그 친구가 산타라도 되는 양 펄쩍펄쩍 뛰고 난리도 아니더군요. 그래서 말이 되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신호에서 멈춰섰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살짝 고쳐앉는 마이크로프트의 옆얼굴로 내려앉았다. “내 앞에서 당신 능력을 폄하할 필요 없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겠죠.” 그는 말했다. “난, 당신이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지 지극히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신가요?” 레스트라드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돌려 레스트라드를 잠시 바라보았다. “당신 대입 시험 점수[각주:2]를 읊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당신이라면 사람들 삶에 접근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생각하고 싶어하진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심지어 한낱 말단 공무원조차도 가능할 정도니까요. 게다가, 난 당신 대학에서의 성과도 비교적 철저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허접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정도로만 해두죠.”

신호가 바뀌고, 마이크로프트가 매끄럽게 출발했지만 그 사이 레스트라드는 완전히 까발려진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애써보았다. 아니면 약간 감명받았달까. 누군가에 대해 그만큼 알아내는 건 뒷조사만 해봐도 된다는 것쯤은 알면서도 말이다. 셜록이 처음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나, 그의 옆에 왓슨 선생이 나타났을 땐 그도 해봤었다. 마이크로프트에 대해서도 그랬을 거였다. 그랬다간 야드에서 버킹엄 궁전으로 경고 신호를 보내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당신 동생 주위에서 있다 보면 누구라도 조금씩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겁니다.” 다시 목소리가 나오게 되자마자 레스트라드는 대답했다.

“셜록의 지적 능력이란 게 원래 그런 거잖습니까.” 마이크로프트는 맞받아 대꾸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은 전적으로 다른 거죠. 다르다고 해서 당신에게 약점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 이후 한달이 지났고, 레스트라드는 어쩐지 실망스럽기도 하고 약간은 고맙기도 했다. 다음날에서야 그들이 셜록에 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며, 레스트라드는 셜록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면 어째서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야드의 그 하고 많은 경위들 중 하나에 개인 시간까지 투자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정도의 대입 시험 점수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라도 말이다.

그도 그렇고, 그 달에는 셜록과 왓슨 선생, 그리고 새라라는 이름의 의사 선생이 알아서 국제 밀수 조직 하나를 와해시켜놓기도 했다. 덕분에 레스트라드는,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는 되새겨 생각해볼 만한 여유가 없기도 했다. 

“자네가 날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쯤은 알아.” 다음날, 그는 셜록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에게도 핸드폰이라는 게 있거든. 그리고 자네는 그 핸드폰 번호를 가지고 있지.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면 언제든 전화해도 돼, 받아줄 테니까.”

셜록은 데굴, 눈을 굴렸다. “당신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만, 경위님. 전부 잘 돌아가고 있었다구요.”

레스트라드가 리포트를 읽어 본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셜록에 대한 문제라면 왓슨 선생은 놀라울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신중한 태도를 고수했다. 게다가 다른 의사 한 명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저어댈 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거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였다구요.” 그녀는 말했다. “직접 겪어보면 재미는 커녕 훨씬 무섭다고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레스트라드는 파일을 덮고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셜록에게 제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마이크로프트에게 다 말해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하고픈 비이성적 충동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대신 낡은 공장제 카펫 위로 발이나 툭툭, 차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셜록이 안절부절 기다리게 두기로 했다.

이 모든 일에는 어딘가 거슬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집어낼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제대로 들어맞지 않게 만드는, 지워지지 않는 느낌. 그것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셜록이 해결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셜록은 휴, 한숨을 내쉬더니 조바심내며 꿈지럭거렸다. “다른 게 없다면, 내가 할 수 있을,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조심하라구.” 레스트라드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자넨 내 재량 하에 사건을 맡고 있는 거야, 셜록. 그러니 자네가 모두 다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나도 어느 정도는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네. 알다시피 자네 덕에 내 일이 위태로워진 셈이니까. 자네가 얼마나 도움이 되든간에, 자넬 위해서 파면까지 당할 생각은 없거든.”

셜록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할 말도 없다구요, 경위님. 난 예전 동급생 때문에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 거고, 논리적인 결말을 알아차린 것 뿐입니다. 다른 속셈같은 건 없어요.”

8월에 눈이 내리고 자신의 집 창밖에 돼지가 날아다니거나 한다면야 레스트라드도 그런 말을 믿어줄 거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가봐. 적어도 한주 정도는 밀수 조직이랑 엮이지 않게 노력이라도 해보라구.”





금요일 오후, 레스트라드가 도노반과 함께 밀려 있던 검시 보고서들을 정리하고 있는 도중 책상 전화가 울렸다. 몇몇 장비들이나 기타등등이 사흘 내내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고치려고 해봤지만 그러던 도중 덜덜거리다 말고 완전히 멈춰버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고쳐지긴 했지만, 덕분에 레스트라드가 돌아볼 때마다 갑작스레 책상 위에 보고서들이 한 무더기씩 밀려들어오게 되어 점점 인내심마저 바닥나기 시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집어치우라구.” 그는 전화기 쪽으로 한마디 뱉고는, 아마도 맞지 않을 파일 한 세트를 도노반의 손에 쥐어주며 투박한 수화기를 낚아챘다. 내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그가 플라스틱 케이스를 쳐서 떨어뜨리는 바람에 펜과 클립들이 와르르 신나게 떨어져내렸다. “레스트라드 경위입니다.”

도노반은 - 레스트라드는 상형문자라고밖에는 알아볼 수 없게 쓰여있는 이름들보다는 - 숫자대로 맞춰가며 무수하게 많은 파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레스트라드가 비워둔 책상 한 구석에 깔끔하게 한 무더기로 정리해 놓으며 그의 대화는 전혀 듣지 않는 척 해주고 있는 게, 레스트라드는 고마웠다. 물론 전혀 그럴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녀가 집중하지 않는다면 경사가 되었을 리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잠깐의 침묵에 이어,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건 모양이군요?”

전혀 이성적인 생각은 아니겠지만, 레스트라드는 마이크로프트가 저리 완벽한 관료인데도 셜록은 대체 어떻게 - 아주 잘해봐야 - 성마른 원숭이 급의 사교성을 가지게 된 건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안되는 거 아닌가. 레스트라드는 낡은 책상 의자에 털썩 기대며 어깨와 귀 사이에 수화기를 끼웠다. “바쁜 거죠, 안좋은 건 아닙니다.” 불현듯 도노반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뭘 도와드릴까요, 선생님?”

마이크로프트는 소리내어 웃었다. “듣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봅니다? 상관없습니다, 이런 대화는 어쨌든간에 녹음되고 있으니까요. 난 당신이 실제로도 일기장에 셜록 형님과의 일정을 잡아두고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만.”[각주:3] 

“아마 낼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 레스트라드는 대답했다. 그는 도노반의 날렵한 손가락이 페이지들을 클립으로 한데 모아 엮으며 제 서류철에 꽂아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요?”

“오늘 오후, 당신이 괜찮다면요.”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 “물론 당신이 안된다고 해도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땐 괜찮을 겁니다.”

“좋습니다. 8시 정각에?”

“그러시죠.”

“좋아요, 이따 오후에 뵙죠, 레스트라드 경위.”

도노반은 정리를 마친 서류철 무더기를 정리하며,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건가요, 경위님?”

레스트라드는 도리질하며 대답했다. “실은 잘 모르겠어. 어디까지 했었지?”





레스트라드는 그날의 마지막 시간까지 사무실 문을 닫아두고 엄청 바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하진 못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던 검시 보고서들도 도노반의 지원 하에 거의 일반적인 수준까지 잦아들었고, 나머지는 사람 순으로 정리해두었다. 운이 따라 준다면 사건 해결률을 높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평소의 20% 해결률을 조금 상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혼자였지만, 간간이 둘씩 짝지어 나가기도 했다. 도노반이 유리벽 너머로 그를 마주보더니, 인사하듯 가볍게 목례를 보내왔다. 레스트라드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손을 흔들었다. 의외의 선물이라니까, 도노반 경사는.

10분도 되지 않아 사무실과 책상 앞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범죄 같은 거야 잠들 줄 모르는 법이니, 늦게 연락을 받았던 사람들이야 그저 재수가 옴팡지게 없는 것 뿐, 대부분 집에 가기 전까지는 몇 시간이고 지리멸렬한 일을 잡고 있는 거니 말이다.

레스트라드는 한 눈으로는 계속 시계만 쳐다보며 책상을 정리했다. 파일들을 들어가야 할 서랍과 캐비닛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나머지는 단정하게 책상 한가운데 쌓아두었다. 그는 쌓아두다 말고 탁상 달력을 2월부터 한번도 넘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으며, 여러 날에 걸쳐 얼룩덜룩하게 적혀 있는 일정과 예전 약속들 중 조금 흥미로운 점을 찾아냈다. 대부분의 사건 참조 표시들은 기억이 났지만 생각나지 않는 몇 가지가 묘하게 거슬렸다. L.K.존스가 누구고 그쪽 화학분야 담당자와는 왜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거지?

그는 쓸모 없는 예전 정보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2분 후 코트를 걸쳐입고는 야드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고개는 푹 수그리고 손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그는 서늘하지만 사람들과 차들로 여느 때보다 더 활기차보이는 밤 거리로 나섰다. 마이크로프트는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트라드가 인파 속에서 그를 발견하기까지는 몇 분 정도 걸리긴 했지만.

레스트라드는 누군가 볼까 신경을 곤두세우며 차에 탔다. 그의 행동은 무척 어색하긴 했지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문을 닫자, 마이크로프트는 미소라도 짓는 것처럼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안녕하신지요.”[각주:4] 정중함이 느껴지는 인사에 레스트라드는 자칫 소리내어 웃을 뻔 했다.

“안녕하세요.”[각주:5] 그는 대답하며 좌석 벨트를 채웠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기에[각주:6] 나쁜 선례를 남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확실한 목적지가 정해진 것마냥 운전했고, 레스트라드는 그 표현을 떠올려 보다 다시금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간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계속, 두서없이 이곳저곳을 빙빙 돌아다니기만 했었던 거다. 레스트라드는 새벽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 자신의 플랫에 다다르기까지, 마이크로프트가 운전해가는 크고 불규칙한 원형 궤적을 대충 그려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초조했지만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다리를 떨어대는 모습이 누가 봐도 명백해 보이지만 않기를 바라며, 들리지 않게 조용히 콧노래라도 부를 수 있게끔 라디오가 켜져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면서 정서불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 수는 없었기에, 그는 이혼하기 전까지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던 왼손 약지를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는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 어딘가 가고 있는 겁니까?” 그는 불쑥 물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른침을 삼키는 기색이 너무도 역력한 나머지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레스트라드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레스트라드는 재차 물었다.

불현듯, 마이크로프트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정부의 살인 현장으로 자신을 데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는 차창 너머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은 런던 어디든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처럼, 어렴풋이 익숙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고가의 명품 매장 같은 것들이 몇 곳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자주 가는 곳들과는 거리가 먼, 그런 곳들 말이다.

레스트라드가 생각하기에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은, 마이크로프트라면 이런 호화로운 상류층 동네에서 살인을 저지를 것 같지는 않다는 거겠다.

마이크로프트가 차를 세우더니, 시동을 끌 생각도 않고 조수석 문부터 열어주었다. 레스트라드는 홈즈 형제 둘 다 - 똑같이들 그런 듯하다 - 이런 식으로 드라마틱하게 선보이는 경향따위 하루빨리 졸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멀뚱, 바라보고만 있다가 서둘러 따라나섰다. 차 덮개 너머로 단정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주차원에게 열쇠를 넘겨주는 마이크로프트와, 그 뒤로 우아한 레스토랑 현관이 보였다. 레스트라드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내려서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인가요?” 

“그렇죠.” 마이크로프트는 문 쪽으로 한 손을 부드럽게 내어보였다. “가실까요?”





레스토랑은 그야말로 고급이었다.[각주:7] 

지배인이(이 남자가 너무나도 반듯하게 잘 다려진 턱시도를 차려입고 있었기에 레스트라드는 그정도 지위일 것이라 생각했다) 중앙 홀을 따라 안내해주는 내내 레스트라드는 머릿속으로 저 단어를 굵고 진하게 덧써두었다.[각주:8] 발 밑에 깔린 절제되고 고상한 문양의 카펫은 톡톡하고 비싸보였고, 똑같이 호화로운 벽이나 묵직하고 단단해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에도 같은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머리 위엔 부드러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수천개의 크리스탈로 된 어마어마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기도 했다.

비싼 정장에 드레스 차림인 손님들도 다를 바 없어보였다. 자신감마저 없어질 만큼 모든 게 완벽했다. 저들은 완벽한 머리스타일에 완벽한 화장, 완벽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몸짓 하나하나마저 우아하고 편안하면서도, 완벽해보이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거다. 레스트라드는 종일 구겨져 있던 자신의 옷과 점심때 묻은 얼룩이 남아있는 셔츠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음식들마저도 실제라기엔 너무도 우아해보여서, 미술품들이 작고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묵직한 도자기 그릇에 담겨져 가느다란 다리의 와인잔과 함께 나오는 것만 같았다. 레스트라드의 요리 실력이라고는 달걀쯤은 해볼 수 있지만, 전자렌지의 타이머를 맞춘다거나 플랫에서 다섯 블록 이내의 모든 포장음식 전문점 직원들과 안면을 트고 친하게 지내는 정도인데 말이다.

지배인이 아치형 입구를 지나 좀더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주는 동안 그는 마이크로프트 한발짝 뒤에서 따라갔다. 방은 중앙 홀과 같은 테마로 꾸며져 있었지만, 조금 작고 더 분위기있게 변형되어 있었다. 남자는 의자 두 개를 빼주었고, 마이크로프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남자는 마실 것을 고르고 있는 동안 금방 돌아와서 주문을 받아주겠다며 돌아갔다.

레스트라드는 다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팔짱을 꼈다. 와인 메뉴를 집어들고 쭉 훑어보는 마이크로프트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금방이라도 레스트라드가 눈을 깜박, 하면 이 모든 것들을 그저 대단한 꿈이었던 양 떨쳐버리고 자신의 플랫에서 깨어나게 될 것처럼.

혹시 이게 꿈이 아닐 경우를 대비해서, 그는 음식 얼룩을 숨기려 자켓 단추를 여몄다.

"레드와 화이트 중 어느 걸 좋아하시는지?" 마이크로프트가 물어왔다.

레스트라드는 눈만 깜박였다. "레드나 화이트 뭐를요?"

"와인요." 마이크로프트가 메뉴 위로 시선을 들었다. 그의 자세에는 여전히, 레스트라드는 해석할 수 없는 긴장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어둑어둑한 차에서보다는 레스토랑의 황금색 불빛 아래 그의 모습이 훨씬 더 부드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렇군요." 레스트라드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정교하게 잘 접힌 냅킨을 풀어보려 만지작거렸다. "선호하는 건 없습니다만." 그는 무릎 위에 냅킨을 펼쳐놓으며 눈을 내리깔면서도 마이크로프트를 흘끔 바라보았다.

두툼한 가죽으로 제본된 메뉴가 그릇 옆에 놓여 있었고, 레스트라드는 가격을 보고 먹을 수 있을만한 걸 골라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소박한 음식을 좋아하고, 먹을 때 들어간 재료 중 몇 개 정도는 알아두는 걸 좋아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는 메뉴판을 펼쳐, 두툼한데다 글자가 도드라지게 인쇄된 종이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려 보았다.

이것도 프랑스어였다.

“그렇군요.” 레스트라드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와인 메뉴로부터 눈을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레스트라드는 굵고 화려하게 인쇄된 아페리티프[각주:9]라는 단어를 손끝으로 만져보았다. “아니, 죄송합니다. 거짓말이에요. 전 프랑스어 못하거든요.” 그는 메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팔로 덮으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조금 배우긴 했지만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이거 못 읽겠어요.”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레스트라드는 마이크로프트의 볼에 설핏 붉은 기가 돌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레스트라드가 봤던 누구보다도 순조롭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레스트라드가 볼 수 있도록 자신이 들고 있던 메뉴를 테이블 건너로 펼쳐 보여주며 물었다. "어떤 걸 좋아하십니까?"

굳이 해야 한다면야, 레스트라드도 마이크로프트가 기대할 만한 반응 몇 가지 정도는 해줄 수도 있었다. 사교성이라는 겉모습 안에는 마이크로프트 역시 셜록만큼이나 진정으로, 대단히 영리하니 주변 사람들의 한계에 짜증을 느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었다. 셜록이라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앞에 있어도, 그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이해시켜야 하는게 아닌 한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모르겠습니다.” 레스트라드는 반쯤 미소지으며 말했다. “전 일주일에 6일 저녁을 포장음식으로 때우거든요.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달걀 프라이 넣은 샌드위치를 해먹는 정도겠구요.”

마이크로프트는 이해했다는 듯 으음, 소리를 냈다. “내가 골라드려도 되겠습니까?”

레스트라드가 마음 속 한구석에 묻어두고도 열심히 외면하고 내심 비웃기까지 했던 느낌이, 훨씬 더 구체적인 형태로 몽글몽글 올라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을 거다.





뭐시기 브헤제를 곁들인 플랑베한 건지 뭔지와 레스트라드가 자신의 플랫 한달 집세보다 더 비쌀 것이라고 선뜻 내기를 해도 좋을 화이트 와인으로 저녁 식사는 끝났다. 꽤나 좋았다. 외계 행성에서 온 거나 다름없을 만큼이나 레스트라드의 일상에서 멀찍이 떨어진 것만 아니라면 말이겠다.

마이크로프트의 식사 매너는 예상대로 완벽했다. 레스트라드가 근본 없이 자란 것도 아니고, 어머니나 할머니가 가능한 한 예의바르게 식사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어떻게 했는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여벌의 두세개 포크들이, 레스트라드의 그릇 양 옆에서는 손 한번 닿지 않은 채 고스란히 놓여 있기만 했다. 게다가 마이크로프트의 나이프는 우연히라도 절대 그릇을 긁는 법 한번 없었다.

레스트라드는 그들이 작은 개인실 안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는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친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디자인된 것 같다는 사실까지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조명은 어둡지는 않았지만, 촛불처럼 은은한 금빛으로 따스하게 비춰줄 정도로는 낮춰져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은 절대 좁지는 않았지만 작은 편이었다. 단 둘이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레스트라드가 와인을 한모금 마시고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건,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덕분이었을 거다. “이거, 셜록과는 전혀 상관 없는 거죠?”

마이크로프트는 그대로 굳었다.

레스트라드는, 자신에 대해서라면 그 어떤 정부 파일에서도 알아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가 부끄러워하는 것들이 아닌, 이혼한 후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지만 놓지 않고 있던 것들 말이다. 그가 자신의 자존심을 최우선으로 내세우지 않는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들은 간직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 역시 - 레스트라드의 사무실에 처음으로 나타난 그날 이후 아마도 유일하게 - 서툴지만 진심어린 표현으로서 자신을 여기 데려올 만큼은 알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마이크로프트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레스트라드의 눈을 마주보았다. “내가 너무 주제넘었던가요?”

레스트라드는 손가락 사이로 와인잔을 천천히 돌리며, 황금빛 와인 너머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아뇨,” 그는 대답했다. “전혀요.”





그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와, 레스트라드의 플랫 앞에 대어놓은 마이크로프트의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때, 마이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당신 핸드폰 잠시 주시겠습니까.”

저녁 식사로 조금은 들떠 있던 레스트라드는, 멍하니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마이크로프트에게 건넸다. 마이크로프트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몇 화면을 넘기며 입력하는 모습을,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가만 보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그 모습이 첫날 보았던 예쁘장한 비서와도 묘하게 겹쳐보여 레스트라드는 미소짓지 않으려 입안을 깨물고 있어야 했다. 마이크로프트가 그렇게 승진해서 영국 정부의 말직을 맡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보면서.

“여깄습니다.” 마이크로프트는 핸드폰을 되돌려주었다.

레스트라드는 딱딱한 플라스틱 표면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바이러스 같은 거라도 설치해둔 건가요?”

“피해망상이 지나친데요. 알고는 있어요?” 마이크로프트는 비꼬듯 응수했다. “그렇게까지 해로운 건 아닙니다. 내 번호 추가해둔 거니까요.”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이는 듯한 느낌에, 레스트라드는 잠시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가슴을 강하게 울리며 목까지 타고 올라오는, 자극적이면서도 지극히 두려운 느낌. 그는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힘주어 핸드폰을 꼭 그러쥐었고, 마이크로프트는 그런 그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상컨대,” 레스트라드는 결국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제 번호를 주겠다고 해봤자 별 필요 없겠죠?”

그 말에 마이크로프트는 놀랍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고, 그제서야 레스트라드는 죄어오던 가슴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실은 레스트라드가 가장 최근에… 누군가를 만났던 거라고는 전 부인 정도였던 데다, 그땐 채 서른도 되기 전이었다. 경찰국장으로 임명되어 수상과 차를 마시는 건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창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때였달까. 

그나마도 - 당연하겠지만 - 스스로 믿고 싶은 시점보다도 몇 년은 더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그때조차도, 엘렌은 마이크로프트처럼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존재는 아니었단 말이다. 그녀는 다홍빛 곱슬머리에 환한 미소를 가진, 그의 제복을 좋아하는 도시계획자였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레스트라드에게도 동료와 친구가 있었고, 부모님도 두분 모두 살아 계셨었다. 할머니께서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원 산책을 다니신다며 희푸르게 센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다니셨더랬다. 이젠, 모든 게 다 지난 일이지만.

솔직히 그가 제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자면, 부하를 제외하고 떠올릴 수 있을 이름이라고는 셜록과 왓슨 선생, 그리고 마이크로프트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의 고민에는 전혀 도움 안되는 생각인 셈이다.





그 다음, 셜록이 (옆에 존을 끼고, 드라마틱하게 코트를 휘날리며) 범죄 현장에 등장했을 때 레스트라드는 서슴없이 손을 흔들어 맞으며 몇분간 마음껏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어느 정도는, 까만 유성펜으로 피해자의 팔다리에 누구 하나 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언어를 휘갈겨 써놓고는 골목에 단정하게 뉘여둔 이유가 뭘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잠시 물러서서 자기 할 일을 하는 셜록을 바라보며 마이크로프트와 비슷한 점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둘 다 멀대같이 크다는 것 외엔, 외모는 그닥 닮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가 보기에 셜록은, 원래 길이보다 조금씩 더 길쭉한 팔다리에 관절이라도 조여줘야 할 것처럼 키만 멀쑥했지 비실비실해 보였다.

셜록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정말 말 그대로 외계인같이 보였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정장 차림에 머리숱이 조금 적어진 보통 남자일 뿐이었다. 어쩌면 오른손에는 우산이 영구적으로 부착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레스트라드는 생각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두통을 없애려 코끝을 찡그려 보았다.

몇발짝 떨어져 서 있던 존이 레스트라드를 한쪽 눈으로 흘긋 살피더니, 말아쥔 주먹을 코트 주머니로 푹 꽂아넣었다. 그때 셜록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신으로 다가서서는 무릎을 꿇었고, 근접 관찰이 필요해질 때마다 쓰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돋보기를 휘리릭 꺼내어 살펴보았다. 그가 뭔가를 건드릴 때마다 앤더슨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쏘아보냈지만, 레스트라드는 알고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인정하려 들지는 않겠지만, 셜록이라면 얼마든지 그만큼 잘 해낼 수 있으리란 걸 앤더슨 스스로도 알고 있을거란 사실을.

“괜찮은 건가요?” 존이 왔다갔다 자세를 바꾸며 나직하게 물어왔다. 그는 셜록만큼이나 모든 사람의 미움을 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셜록 때문에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 정도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로 마음을 놓는 법이 없었다.

레스트라드는 시신에만 집중하고 있다가 가볍게 도리질치며 관심을 돌렸다. “그럼요, 난 괜찮습니다. 우리가 당신 자는 걸 깨운 게 아니기만을 바랄 뿐.”

존은 으쓱하더니 어깨를 돌려 풀었다. “새벽 세시밖에 안되었는데, 제가 자고 있을 리 있겠나요?”

셜록은 문제의 시신으로 민첩하게 달려들어서는 허리께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그는 죽은 남자의 셔츠 단을 잡아당겨서는 몸을 기울여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 모습에, 셜록의 조사 방법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레스트라드와 존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조금 움찔하며 물러서고 말았다.

“저 인간이랑 같이 산다니, 상상도 안되는군.” 레스트라드는 한마디 뱉고야 말았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긴 했지만, 하지만 묘하게 즐거운 듯 눈꼬리를 찡그리는 존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존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레스트라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게 묻지 마시죠, 저 역시 모르니까요. 그저 저 인간이랑 같이 살지 않는다는 생각이, 같이 사는 현실보다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뿐입니다.”

최근 레스트라드의 삶이 바뀐 걸 생각하면, 그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고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밤중에 레스트라드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때 그는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어 있던 상태였다. 몰려오는 피로와 지겨운 텔레비전 프로그램 덕분에 의식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침대로 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래서 핸드폰이 귓가에서 울려댔을 때에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다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뻔 하고야 말았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뿜어져나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아냈고, 음성메시지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서야 간신히 제 버튼을 눌러서는 귓가에 들이댔다. “네, 레스트라드입니다.” 그는 잠결에 사포에 갈아낸 것마냥 거칠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소파 가장자리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는 모양이었다. 자칫했다가는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서 커피 테이블을 들이받고 말지도 모른다.

“내가 깨운 겁니까?” 마이크로프트가 부드럽게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레스트라드는 대답했다. “지금 몇 시죠?”

“두시 막 지났네요.”

조심스럽게 꿈지럭거리긴 했지만, 레스트라드는 소파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 한쪽 귀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로 모로 눕는데 성공했다. 그는 텔레비전을 흘끔 쳐다보았다; 앤틱 로드쇼[각주:10]가 하는 모양이었다. 깃털장식 모자를 쓴 나이든 여자가 보기 좋지만은 않은 동상을 들고 서서 자기 어머니가 70대이실 때 자선 바자회에서 그걸 어떻게 찾아냈는지에 대해 더듬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군요.” 그는 다시금 눈을 감고 하품하며 대꾸했다. “당신은요?”

“잘 있죠.” 마이크로프트의 대답이다. 전화 상태가 그의 피곤한 상태를 느끼게 해줄 만큼 안좋아지긴 했지만, 레스트라드는 눈을 꿈벅거리며 다시 떴다. 짜증부터 낼 생각도 전혀 없었지만,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남아있던 것마저 싹 사라져 버렸다. “시간이 좀 났거든요. 그래서 당신이 이번 주말에 할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마 2시, 3시, 아니면 5시쯤 교대가 있긴 하겠지만, 레스트라드는 그닥 개의치 않았다. “시간을 내보죠.”

잠시 조용해졌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나지막한 소리와 끊일 줄 모르는 거리 위의 차 소리들 뿐. 전화기 너머로 마이크로프트가 서류들을 뒤적거리는 것부터 펜에서 나는 달칵,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아직 일하는 중이군요?” 그는 물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거리의 차들은 밤이라고 멈추지 않으니, 교통부 역시도 그런 셈이죠.”

“그렇군요.” 레스트라드는 다시금 하품하며 손두덩으로 눈을 벅벅 문질러댔다. “터무니없는 시간까지도 일하십니다.”

“당신도 그렇잖습니까. 다시 주무시죠.”

“그러죠, 좋은 밤 되시길.” 레스트라드는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잠에 취해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의 대답은 듣는둥 마는둥, 그는 다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마이크로프트식 작업과 레스트라드식 유혹(?)이 한데 섞여, 어정쩡하지만 진심 그대로인 직구 승부! 
귀여우면서도 정말 연애의 정석다운 면이 있어서 좋다. 이런 서투른 어른들 같으니라구.
그런 그들이 좋아서 다른 동네 와서까지 이러고 있는 1人. 잊지 않아주시는 여러분께도 감사를 : ]



  1. “You could try being a bit less of a bastard.” - 어른께서 말씀하시잖니… 셜로기 떼끼~ [본문으로]
  2. ‘A levels’ - 영국에서 쓰이는 GCE Advanced Level을 일컫는다고. 자세한 내용은 여기. http://goo.gl/ZkBqi [본문으로]
  3. 전편에서 레스트라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 묻는 것. 센스쟁이 마형님 :D [본문으로]
  4. “Good evening.” - 묘하게 격식차린 인사. 마형님답지만. : ) [본문으로]
  5. “Hello.” - 레경위님은 캐주얼하게 한마디로 응수! [본문으로]
  6. ‘an officer of the law’ - 경찰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문맥상 느낌 살려서. [본문으로]
  7. ‘The restaurant is Classy.’ - 아래 주석에 이어서. [본문으로]
  8. ‘Lestrade capitalizes the word in his head’ - 강조하는 의미에서 Classy라고 굳이 대문자를 쓴 거지만, 한글에는 없는 방식이라 굵게 쓰는 걸로 대체한다. [본문으로]
  9. ‘aperitif’ - 식전주라고. [본문으로]
  10. ‘Antiques Roadshow’ –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골동품 감정해주는 프로. 우리나라의 진품명품… 정도일까? 자세한 정보는 여기. http://goo.gl/IzTBf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