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저녁 | You Can Imagine the Christmas Dinners (1/8)





식당은 저택의 다른 곳들처럼 광활한데다, 호랑가시나무와 색색의 화환에 리본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것들을 보아하니 완벽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칠면조는 너무나도 커서 존은 저게 한때나마 걸을 수 있었다는 걸 믿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고, 곁들이라고 놓여 있는 구운 감자와 베이컨말이 소시지구이[각주:1]의 거대한 무더기는 물론, 테이블 저 끝부터 끝까지 주르륵 늘어선 크래커들[각주:2]까지. 그는 어쩐지 꼬마 팀[각주:3]이 되어 디킨스의 소설 속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누군가 테이블에 이미 앉아 있다는 걸 알아챈 그는, 자신이 이 저녁식사 참석자 중 유일하게 가족 아닌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시아?”

마이크로프트의 비서는 열심히 두드려대고 있던 블랙베리에서 눈을 들더니 비죽 이지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은 아닌데요.” 그녀는 존에게 대꾸했다.

흥미로움을 느끼며, 그는 애러실리아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오늘 이름은 뭔가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메리 정도면…?” 그녀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 명백하죠.” 코트를 벗고 존의 맞은 편에 앉으며 셜록이 말했다. “빤하고 따분해. 게다가 그 이름 마음에도 안 들구요.”[각주:4]

마이크로프트가 품 한가득 와인병을 끌어안고 들어와서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매끄러운 동작으로 애러실리아가 앉을 의자를 빼어 주었다.

“도나(Donna)는 어떤가?” 그리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어 장난스럽게 한마디 한다. “아니면 블리첸(Blitzen)이라든가. 커밋(Comet), 아니면 큐피드(Cupid); 원하는 걸로 하지.”[각주:5] 

그의 비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소리내어 웃었다.

“홀리(Holly)로 할게요.” 그 말을 뒷받침이라도 해보이듯, 그녀는 테이블에서 잔가지 하나를 집어들며 딱 잘라 말했다.[각주:6] 

“홀리 좋군요.” 존 역시 동의했다.

“그럼, 홀리로 하자꾸나!” 애러실리아가 노래부르듯 대꾸하며, 마이크로프트에게 와인을 따르라고 손짓해 보였다. “이제 우리 다 서로 구면이겠네. 하지만 오늘 저녁만큼은 전화기는 치워두라고 하고 싶구나; 이 나라도 몇 시간 정도는 알아서 굴러가지 않겠니.”

홀리는 영 미심쩍은 듯 마이크로프트를 흘끔 쳐다보았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마지못해 블랙베리를 주머니에 넣었다.

“너도 마찬가지란다, 셜록.” 애러실리아는 조금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녀의 둘째 아들 역시 그 징글징글한 분홍색 아이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을, 존 역시 봐 버렸다. 수영장에서의 그 사건 이후, 그는 그놈의 폰을 저 멀리 집어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셜록은 문자를 보낼 때 익명의 번호 하나쯤 더 가지고 있는 게 유용할 뿐만 아니라, 존이 고작 폰 하나에 나쁜 기억을 떠올리며 불필요하게 감정적으로 구는 거라 주장했었다. 존은 그 기억에 몸서리를 치며, 내심 감정적인 게 실은 전혀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셜록은 얼굴을 구기며 자켓에 폰을 푹 꽂아넣었다.

“고맙구나. 자, 셜록, 좀 잘라 주겠니?”

마이크로프트는 와인을 따르다 말고 그대로 얼어붙어서는, 어머니가 완전히 정신이라도 나가버린 것 같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엄마.” 그는 입도 벌리지 않고 그녀에게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진심이세요?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각주:7] 

셜록은 불만스러운 티를 팍팍 내며 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들리거든, 마이크로프트. 나 바로 여기 앉아 있다구.”

“음, 셜록에게도 한번 더 기회를 줘야 할 때일지도 모르잖니.” 애러실리아의 대답. 하지만 존은 그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괜찮아요, 어머니.”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셜록이 대꾸했다. “저도 마이크로프트가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고 싶진 않거든요. 존이 해줄 거에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존에게로 쏠렸다.

“좀 해주시겠습니까?” 물어보는 마이크로프트는, 거의 애원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물론이죠.” 존은 미소띤 얼굴로 나이프를 집어들면서, 대체 셜록이 칠면조에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까지 치를 떠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는, 알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집에서 셜록에게 먹을 걸 자주 해주는 편이죠?” 애러실리아가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존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것 같네요. 네. 음, 셜록은 먹어야 한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기도 하고, 저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서…”

“당신 요리 솜씨가 진짜 좋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기쁜 듯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셜록이 챙겨줄 사람을 만났다는 게 너무너무 기쁘네요. 우린 슬슬 희망을 버리려던 참이었거든요.”

존은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와 셜록을 번갈아 살폈다. 그녀가 실제로도 자신이 생각한 의미를 담아 이야기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넌지시 찔러대는 데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더는 뭐가 다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건지 궁금해지는 참이다.

“다루기 까다로울 때가 있긴 하죠.” 그는 사람들 그릇에 칠면조를 덜어주며 느릿느릿 시인했다.

“용감무쌍한 사람만이 그런 일을 떠맡겠지요.” 마이크로프트가 쿡쿡, 웃었다.

존은 어렴풋이 미소지어보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음식들을 가리켜보였다.

“맛있어 보이는 저녁 식사네요, 홈즈 부인.”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미소로 답했다. 셜록은 여전히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자기 몫의 구운 감자만 푹푹 찔러대고 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마이크로프트. 나와 존의 관계는 형이 뭐라 하는 것보다는 사실 훨씬 공평하거든.”

존은, 셜록이 이 상황에서 그들의 관계라는 걸 언급하는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전혀.

“어떤 면에서?” 마이크로프트가 반문했다.

“그러니까!” 셜록은 말하면서도 답을 생각해내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번에 내가 우유 사왔어.”

존은 와인잔에 대고 흥,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래놓고 거실에 내버려둬서 내가 그게 거기 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상해버렸지.”

잠시 창피해하는 것 같았지만, 재빨리 원래 페이스를 되찾는 셜록.

“지난주엔 정리도 했다구!”

“그래야 네가 그렇게나 조사해보고 싶어하던 그놈의 양 시체를 갖다놓을 공간이 생길 테니까 말이지.”

“음… 내가 맨날 저녁 외식 시켜주잖아!”

그거 하나만큼은 인정한다는 듯, 존은 씨익 웃었다.

“맞아, 그건 그렇지.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그치만 네가 언제 한번은 타이 음식점 주인을 도와줄 길이 있다면 반가울 텐데. 나 타이 음식 먹고 싶은지 좀 됐거든.” 

셜록은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말을 하지 그랬어.”

“보통은 그럴 필요가 없더라구, 너랑 있으면.” 존은 되받아 대꾸했다.

“물론이지.”

셜록이 바로 나가서 런던에 있는 모든 타이 음식점 주인들을 찾아가 뭔가 해줄 거나 풀어야 할 문제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다니는 게 아닐까 의아해지는 존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애러실리아는 그런 둘을 보며 인자하게 미소짓고 있다가 탄성을 올렸다.

“아, 둘이서 투닥거리는 것 좀 보렴. 정말이지 너희 둘, 딱 오래된 부부같잖니![각주:8]” 

“우린 그런 게-” 자동반응처럼 존이 입을 열었지만, 셜록이 끼어드는 바람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우린 오래되지 않았거든요, 어머니.”[각주:9] 

존은 눈을 가늘게 찡그리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흘겨보았다. 슬슬 이 사태에 대해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탓이다.

“에, 홈즈 부인. 저에 대해 많이 들으셨다구요.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이 말에 애러실리아가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고, 그와 동시에 셜록이 고개를 홱 돌려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서 두려움 비슷한 기색을 읽어낸 존은, 테이블 건너편으로 의문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와인-더-드실-분-계십니까?”[각주:10] 갑자기 셜록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한마디 하고는, 모두의 잔을 아무렇게나 꽉꽉 채워주기 시작했다. 열과 성을 다하다 못해 레드와인을 흘려 테이블보 위에 방울방울 자국을 남기면서. 존은 그 자국들을 바라보면서 몇주 전, 그와 셜록이 눈길을 헤치며 뒤쫓던 핏자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라진 칼 사건 말이다. 블로그 포스팅도 거의 마무리해가던 참이었다. 그는 범죄 현장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눈덩이를 한방 맞았을 때 셜록의 표정을 기억해내고는 빙글, 미소지었다.[각주:11]
 
홈즈 부인은 아들의 이상한 행동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다.

“음, 의사라고 들었죠. 그리고 전에는 군대에서 복무했다고 - 그것도 아주 제대로요. 셜록은 당신이 차를 많이 마신다고 하더군요. 네, 듣기로는 엄청나게 많이, 라던데요.”

존은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동생은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해준다더군요. 그리고 둘이 저녁 외식도 자주 하고, 가끔 집에 있을 때면 당신이 요리도 해준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때때로는 저앨 위해 목숨마저 걸어준다고도 했구요.” 마이크로프트가 조금은 마뜩찮게 덧붙였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정말로요, 존. 그러면 저 녀석 자신감만 커질 뿐이라구요.” 

존은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고, 셜록 역시 그렇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애러실리아가 말을 받아 잇는다. “셜록이 나더러 뜨개질을 배워두라고도 하던걸요. 그래야 당신에게 새 스웨터를 떠줄 수 있을 거라나. 저앤 당신이 스웨터를 입었을 때 정말 사랑스러워보이는 것 같다더군요.” 

“맙소사.” 존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테이블 맞은편 셜록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맙소사.” 셜록 역시 따라했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면서 존의 시선을 피했다.

“홈즈 부인.” 존은 말을 꺼내보았다. “죄송하지만 한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엔 셜록과 저에 대해 잘못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우린 그런… 그러니까, 전 그렇게는…”

갑자기 셜록이 고개를 들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 바람에, 존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는 가슴에서 숨이 헉,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마른 침을 삼켰다. 나중에 이걸 후회하게 될 것 같다고도 생각하면서.

“정말 그렇게는 … 셜록이 제 스웨터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오후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걸 입지 못하게 했는걸요. 아하하.” 그는 억지 웃음으로 말을 마무리했지만, 스스로에게조차 어색하게 들리기만 했다.

셜록은, 그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눈빛을 보내왔다.

“아, 존. 미안해. 하지만 마이크로프트 집이라,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제일 근사하게 차려입지 않고서는 오게 하기 그랬거든. 우리가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바로 그 옷들 다 입게 해줄게.”

은근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셜록의 모습에, 존은 하마터면 감자를 푸컥, 뱉어버릴 뻔 했다. 테이블 한구석에서 홀리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자, 자, 얘들아.” 애러실리아가 주의를 주긴 했지만, 기분 나빠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실은 정반대로… 자랑스러워하는 느낌이랄까? 존은 살짝 도리질하며 저녁식사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냥 없어져버릴지도 모르니까.

“마이크로프트.” 셜록이 쿨럭, 헛기침하는 품을 보아하니 화제를 바꾸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 정부 일은 어때?”

마이크로프트는 내리깐 눈을 동생 쪽으로 돌리며, 예리한 눈빛을 쏘아보냈다.

“관심있는 척 하지 않아도 돼.” 

“가족 모임이란 건 그러라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셜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대꾸했다. 존은 자신의 저녁거리 쪽으로 흥, 코웃음을 쳤다; 저 형제 싸움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해리가 그리워진 그는, 이번 주말쯤 그녀를 보러 들러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셜록의 가족들 모두가 두 사람이 연애중이라고 얼마나 철썩같이 믿고 있는지, 그녀라면 존 자신의 이야기만큼이나 기꺼이 듣고 싶어할 거란 확신까지 드는 참이다.

“매우 좋단다. 신문들이 믿게 하고 싶어하는 것과는 달리, 정부는 완벽하게 잘 돌아가고 있지. 그러기 위해서 홀리와 내가 무척 바쁘게 일해왔기도 하고.”

그가 홀리 쪽으로 잔을 들어보이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연립 정부에서 일하는 건 흥미롭기도 해요.” 홀리가 거들었다. “물론, 수상님께서도 마이크로프트씨가 어떤 분인지, 어떤… 위치에 계신 분인지 이미 잘 아시기도 했구요. 하지만 이번에 새로 오신 분은 좀 골치아파요. 배우시는 중이긴 하지만.”

존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셜록을 흘끔, 바라보고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참았다.

“재미있는 거라도?” 마이크로프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어왔고, 셜록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존을 째려보았다.

“아하하, 으음. 네, 그냥요.” 존은 더듬더듬 대답하다 말고 킥,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셜록은 연립 정부는 커녕, 지금 수상님이 누군지도 모르거든요.”

홀리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말고 푸하, 웃어버리고 말았고, 존도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오늘 저녁, 지금까지의 상황을 볼 때 그의 웃음소리가 발작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 말도 안되는 소리. 셜록이라면 당연히 수상이 누군지 알겠지!” 애러실리아는 한 손을 저어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니, 얘야?”

셜록은 자기 몫의 저녁식사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포크로 브로콜리 한 조각을 잡아 틀더니, 불퉁하게 뇌까린다.

“당연히 알죠.”

마이크로프트는 재미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누군데?”

셜록의 시선이 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걸 보아하니, 두뇌 속 보관함에서 이와 관련된 정보가 있는지 찾아보려 애쓰는 모양이다. 공황 상태임이 여실히 드러나있는 이 친구의 얼굴에, 존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으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이크로프트를 쳐다보며 말을 꺼내는 게, 찍어보기라도 할 셈인게 분명했다. “…형?”

마이크로프트는 고개까지 뒤로 젖히며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평소에 그렇게나 차분하던 사람치고는 터무니없게 큰 소리네, 존은 생각했다.

“아니란다, 셜록. 난 아냐.” 그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나서야 대답했고, 셜록은 실망했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난 수상님이 아니지, 아니고말고.”

“하지만 거의 비슷하긴 하죠, 사실대로 말하자면요.” 홀리는 존에게로 몸을 숙이며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소근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그는 소리내어 묻고 말았다.

“아,” 그녀는 히죽, 웃었다. “위대한 남자 뒤엔 위대한 여자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리고 여자의 블랙베리도요.”

존은 그 말에 쿡쿡, 웃다가 셜록이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묘하게 날카로운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셜록은 갑자기 테이블을 가로질러 팔을 뻗더니, 마치 자기 거라는 듯 존의 손을 덥석 잡는다. 존은 켁, 기겁하며 셜록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조용히 미소지으며 꼬옥 힘주어 잡아줄 뿐이었다.

“그래, 수상이 누군지는 몰라.” 그는 마이크로프트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대답했다. “중요하지 않잖아; 중요한 건 일이라구. 나머지는 다 지나치는 것일 뿐이야.”

마이크로프트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중요한 건 일 이라는 거니?”

셜록의 시선이 존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되돌아간다.

“가끔 특정한 가외 활동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봐.”

존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상황이 완전히 자신의 손을 떠나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러실리아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마이크로프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부엌에서 디저트를 차려오는 데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구나, 마이크로프트.” 그녀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크래커랑 선물 나눠야지.”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식당을 나섰다. 그러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종업원들이 꾸역꾸역 들어와서는 그릇들을 치워 나르기 시작했다. 도우미에 대해서만큼은 잘못 생각한 게 아니었네, 존은 생각했다.

홀리는 애러실리아가 사라지자마자 잽싸게 블랙베리를 꺼내들고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타닥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흐르는 침묵. 존이 셜록을 노려보자, 셜록 역시 마주보았다. 조금은 - 죄진 듯한 눈빛이랄까?

불현듯 홀리가 알 수 없는 이메일에 대고 욕을 퍼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 한마디 남기고는 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로 밖으로 쌩 나가버렸다. 마침내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존은 셜록이 잡고 있던 손을 빼내고는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셜록, 이게 대체 무슨 사태야?! 너 그동안… 너, 가족들에게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했어?!”

“아니.” 셜록은 못마땅한듯 조용히 대꾸했다. “당연히 아니지.”

황당해진 존은 손만 휘저을 뿐이었다.

“그럼 무슨-”

“난… 그렇게 생각하는 걸 정정해주지 않았던 것 뿐야.” 셜록은 시인하고 말았다. “처음엔 중요한 것 같지 않았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다음엔 뭐야, 셜록?!”

“다들 날 너무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어. 드디어 내가…” 셜록은 잠시 말을 끊으며 앞에 놓인 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대로 말하긴 싫었다구.”

셜록이 저렇게 불안해 보일 때면 화를 내고 있을 수도 없는 존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셜록은 셔츠 소맷부리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나한테 얘기라도 해줬어야지.” 존은 결국 입을 열었다.

셜록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걸 감지했는지 곧바로 사악하게 씨익 웃어보였다. 그 미소에, 존은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물론 저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 안 했을 때의 이야기겠지, 그는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셜록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때면 좋은 일이 생기는 꼴을 못 봤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어찌되었든간에 우린 근본적으로는 커플이라구.” 셜록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니, 우린 그런- 셜록! 어째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커플인 건데?!”

존은 저도 모르게 끽, 째지는 목소리로 말해버렸다는 건 열심히 모른척하려 애써보았다.

“우린, 내가 관찰했던 다른 - 적절한 커플들과도 같은 행동을 꽤 많이 하고 있거든.” 셜록은 너무나도 명백한 범죄 사건을 레스트라드에게 설명할 때와도 똑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다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우린 어마어마하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잖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암묵적으로 이해하는 부분도 있고; 그리고 우린 친하기도 해, 상대를 꽤나 쉽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오기도 했고. 내가 그렇게 읽어내기 쉬운 사람은 아니니, 넌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테지. 반면에 넌 단순해서 알기 쉽고, 그래서 그냥 넘겨버릴 만도 한데. 그런데도 난, 이상하게 그럴 수가 없더라구.”

존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서서히 느껴지는 공포 - 그리고 또다른 무언가? 셜록은 끝나려면 멀었는지, 그대로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먹는 거. 먹는 건 어떻지? 우린 자주 저녁 외식을 가잖아, 커플들이 그런 걸 즐겨 한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구. 그리고 계산은 내가 해. 전통적인 남성의 역할인 거지; 반면에 집에서 먹을 때면 넌, 내 저녁을 차려주는 걸 좋아하지. 그러므로 넌 내 아내인 거야.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성역할을 정의하는 걸 삼가는 편이지만, 증거가 있잖아. 게다가 우린 재정적 의무도 분담하고 있고. 물론 내가 주로 가장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존은 항의하려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존. 내가 관찰해온 바로는, 내가 근처에 있을 때면 언제나 네 심박수가 조금씩 상승하더라구; 그 당시 우리가 어떤 모험 상황에 놓여있든지간에, 단순히 그 스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더 높아; 슈퍼마켓 가서 장을 본다거나 하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걸 할 때조차도 자주 그래. 또, 내 근처에 있을 때면 네 동공이 확장되곤 하는걸. 딱 지금처럼 말야. 이런 특성들을 놓고 볼 때 결론은, 네가 내게 끌리고 있다는 거지. 단순한 우정 이상으로.”

존은 끙, 신음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셜록, 우리 우정이란 건 단순한 거랑은 전혀 거리가 멀다구.”

“게다가 나, 내 자신에게서도 달리 설명할 방법을 찾기 힘든 - 비슷한 증상들을 발견했어; 예를 들면, 지금 내 심장 박동은 무척이나 불규칙한데다 손바닥도,” 그는 이 대목에서 조금 움찔했다. “지독할 정도로 축축하잖아.”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어리벙벙해진 존은 그를 바라보며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네가… 내게 끌린다는 거야?” 그는 느릿느릿 되물었다.

“네가 내게 끌린다는 거야.” 셜록은 잘라 말했다.

“난… 셜록-”

순간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애러실리아와 마이크로프트가 다시 들어와 크리스마스 푸딩과 민스파이 트레이들을 내려놓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애러실리아가 명랑하게 말을 꺼냈다. “홀리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람?”

존은 셜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기분만큼이나 꿈꾸는 듯한 표정이었던 건 아닐지 의아해하면서.

“좀전에 잠깐 나갔습니다.” 존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가서 찾아올게요.”

그는, 그곳에서 잽싸게 도망쳐나올 수조차 없었다.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둘둘둘둘 잘~ 말리고 있는 존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완전 초딩, 투덜투덜 투정하고 심술부리는 셜로기가 참 귀엽다. >_<
물론 중간중간 엿보이는 마형님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지적인데다 유머러스하다니, 이런 멋진 남자를 봤나 : ]



  1. ‘pigs in blankets’ - 못 먹어봤으니 맛은 알 리가 없… 대략 이런 녀석이라고. http://goo.gl/oWXpQ [본문으로]
  2. ‘crackers’ -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때 챙기는 것. 둘이서 양쪽을 잡아당기면 선물이 퐁~ http://goo.gl/VDphc [본문으로]
  3. ‘Tiny Tim’ -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병약하고 작은 꼬마아이. http://goo.gl/leht4 [본문으로]
  4. 왜 마음에 안들까? 왜 그럴까? >_<;; [본문으로]
  5. 클레멘트 무어의 시, [성 니콜라스의 방문(A Visit from St. Nicholas)]을 일부 인용한 것: http://goo.gl/bu4pv 원문은 산타가 순록들을 부르는 구절인 “On, Comet! on, Cupid! on, Donder and Blitzen!”이다. (Donna는 Donder를 여성형 이름으로 바꾸어 말한 것으로 추정) 방금 막 왔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시로 유머를 던지고, 여자에게 사슴의 이름을 붙여줄 줄 아는 마형님, 진정 섹시한 남자다. >_< [본문으로]
  6. ‘Holly’ = 호랑가시나무. 부드럽게 거절하면서도 분위기는 맞춰주는 센스만점 답변. 그 고용주에 그 고용인! [본문으로]
  7. 1편에서 마이크로프트가 언급했던 ‘스터핑 사태’를 기억하시라. [본문으로]
  8. ‘You’re just an old married couple, aren’t you!’ - 정확하십니다, 어머님. 각주9에 이어서. [본문으로]
  9. “We’re not old, mother.” - married couple이 아닌, old를 부인하는 셜로기♡ [본문으로]
  10. “Would-anyone-like-some-more-wine?” -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라, 어색함을 살려;; 정중한 말투로 :P [본문으로]
  11. 현장에서 눈싸움(이라 쓰고 연애질이라 읽는다)을 하다니;;;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