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저녁 | You Can Imagine the Christmas Dinners (2/8)





존은 커다란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쌀쌀한 바깥 공기를 크게 한 숨 들이마셨다. 홀리는 한 손에는 블랙베리를, 다른 한 손에는 궐련을 든 채 문가 양 옆에 있던 대리석 대좌 한쪽에 걸터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맙소사, 세상에.” 그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홀리 옆쪽 벽으로 쓰러지듯 기대섰다.

“마이크로프트씨와 셜록씨가 싸워대는 게 영 불편하던가요?” 그녀는 히죽, 웃었다.

“아뇨, 아니에요.” 그는 대답했다. “셜록이 절 추리할 대상 취급했던 것 뿐입니다. …개인 이상으로요.”

“아.”

그녀가 담배 상자를 내밀며 권했지만, 존은 손을 저어보이며 거절했다. 지난 몇 년간 피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혹했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셜록이 잘 끊고 있는 중이란 걸 알기에, 되돌아갔을 때 고약한 냄새를 피워대서 훼방을 놓고 싶진 않았-

-젠장, 대체 언제부터 모든 걸 저 바보 같은 플랫메이트 기준으로 결정하게 되어버린 거지?!

그는 이를 바득, 갈고는

“홀리,” 불쑥 말을 걸어보았다. “혹시 당신, 음, 제 말은. 언제 저랑 한잔 하러 갈래요? 우리 둘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예의 그 살짝 측은해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셜록씨는 어쩌구요?”

“셜록이랑 전 그런 사이 아니라구요!” 존은 두 손을 허공으로 내저으며 절규했다.

홀리는 눈만 데굴, 굴릴 뿐이었다.

“존, 당연히 그런 사이죠.”

“아뇨, 아니거든요. 우린 정말, 진짜로 아니에요. 셜록은 마이크로프트와 어머니가 우리가 커플이라고 믿게 내버려두고 있는 것 뿐이에요. 뭔가 말도 안되는 이유에서겠죠 -  정말이지, 그 인간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는 묻지 말아줘요 - 하지만 우린 사귀는게 아니라구요.”

“아, 아니에요. 둘이 사귄다고 말하진 않았는걸요.” 홀리는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 잠깐,” 존은 눈을 깜박, 했다. “방금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네, 두 사람 사귀는 건 아니니까요.”

“아, 다행이다.” 존은 벽으로 풀썩, 기댔다.

“그러나,” 그녀가 덧붙이려 들자 존은 끙, 싫은 소리로 응수했다.

“말하지 마요.”

“마이크로프트씨나 ‘엄마’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문제죠.” 마지막 한 마디는 마이크로프트의 유들유들 느린 말투와도 꼭 닮아 있었다. “당신이야 다들 알아차릴 거라 생각하겠죠. 솔직히, 그 둘이 그렇게까지 관찰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헛웃음만 나오는 존이었다.

“하지만 셜록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분이 실제로 누군가와 친해지려 한다는 데 들떠서 두 사람 다 조금은 앞뒤 안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전엔 진짜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요. 뭐, 한번은 있을지도요, 대학 때. 이런 식은 아니지만요.”

존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속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동시에, 질투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무언가로 인해 한구석 아릿하게 아파오는 걸 느끼면서. 이 짜증날 정도로 충격적인 남자의 애정을 얻어내기 위해 그 사람이 뭘 했는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 충격적일 정도로 짜증난다고 해야 하려나. 문득 궁금해지는 존이었다. 셜록과 있으면 감정적인 혼란마저 당연한 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 사실, 종합적인 혼란 역시도 그렇고.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게 완전 푹 빠져 있는 게 명백하다는 사실도 그렇고요.” 홀리가 말을 이었다.

“전- 무슨- 아니, 아니에요. 저는 그런 게 - 우린 커플 같은 게 아니라니까요!”

그녀는 히죽, 웃어보이고는 다시금 핸드폰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존은 그녀에게로 돌아서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봐요. 저 괜찮은 놈이에요, 정신 나간 동거남만 빼면. 당신도 괜찮은 여자구요, 정신 나간 상사만 빼면요. 완벽하잖아요. 우린 서로 이야기할 거리도 있다구요!”

홀리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당신, 저랑 데이트하고 싶다는 거죠… 내내 셜록 홈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뇨, 전-” 존은 혼란스러워지는 걸 느끼며 도리질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존.” 그녀는 주머니에 폰을 넣고 존의 두 손을 잡았다. “제가 당신과 사귄다고 치자구요 - 어쨌든 그럴 생각은 없지만요. 제 일이 훨씬 신경쓰이는데다 데이트할 시간 같은 것도 없으니까요. 관계라는 건 들어가는 수고에 비해 얻는 게 너무 적거든요.”

“듣고 보니 당신이야말로 셜록과 사귀는 사람인 것 같은데요.” 존은 씩, 웃었지만 곧바로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셜록이랑 사귄다는 건 아니고요.”[각주:1] 

“어쨌든 그렇다고 해요. 우리가 술집이나, 저녁을 먹으러 간다든지, 극장 같은 데 간다고 치자구요. 나름 즐겁게 말이죠.”

“그래요? 그랬다고 치면요?”

“그러다가, 당신이 데이트 도중에 셜록 홈즈에게서 지금 당장 와달라는 문자를 받는다고 해보자구요. 당신은 어디 있고 싶어요?”

존은 얼굴을 찡그렸다.

“음, 셜록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잖아요. 위험한 건가요? 그러니까, 가정을 해보자면요.”

“아뇨, 위험한 건 아니에요. 가정하자면 그렇단 거죠. 하지만 요점은 그게 아니죠, 존. 말했잖아요, 어디 있고 싶냐구요.”

그녀를 말끄러미 바라보는 존의 얼굴 위로 상반된 여러 표정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고, 홀리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존의 생각들이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 빌어먹을.” 마침내 그는 저 한 마디와 함께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만다.

“시발, 우린 커플이었군요.”[각주:2] 

홀리는 안스럽다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알아요.”

그녀는 앉아 있던 대좌에서 일어나, 한번 더 블랙베리를 들여다보고는 현관을 밀어젖혔다.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는 부드럽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여기서 좀더 있으면 안될까요?” 존은 반쯤 우는 소리로 물었다. “부탁이에요.”

"이제 다들 디저트 먹을 시간이에요. 셜록씨라면 우리가 자기 이야기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걸요."

존은 맥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당신, 홈즈 가의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잖아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고분고분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실망시킬까봐 걱정되는 사람이 엄마 홈즈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웃음소리가 가득한 부엌으로 되돌아왔다. 마이크로프트와 애러실리아 홈즈 두 사람이 각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서 크래커를 당기는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꽉 붙들고 팽팽하게 힘을 주고 있었고, 애러실리아는 환호성을 질러대며 마이크로프트를 향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셜록은 보랏빛 종이왕관을 쓰고 있었다. 존은 한쪽 눈가로 비스름하게 기울어진 왕관을 쓰고 있는, 이 어이없는 남자에게로 향하는 미묘한 애정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잠시 바깥 추위에 떨다가 갓 들어온 그의 눈앞에 펼쳐진 크리스마스다운 광경에,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 있다는[각주:3] 따스한 감정만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방 안에 들어서는 두 사람에게 와서 꽂히는 순간 빠르게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이크로프트는 홀리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고, 존은 조심스럽게 셜록 쪽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운명에 뭔가 바뀌는 것이라도 있을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그를. 아, 젠장. 그와 홀리 사이를 남몰래 왔다갔다하는 저 시선,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대화 내용 전부를 읽어낸 게 분명했다. 곧바로 셜록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Artwork by 하이지달

“네 크래커 남겨놨어, 존.”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로 하나를 건네며 그런다.

어쩐지 이걸 받는 게 단순히 크래커 하나보다는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질 것만 같은 느낌에, 존은 잠시 굳었다. 셜록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섰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반대쪽 끝을 잡았다.

“고마워.”

뒤이어 , 터지는 소리. 여전히 별거 아니군그래, 존은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다. 크래커 같은 걸 왜 하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는 테이블 위로 떨어진 자신의 몫을 집어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행용 반짇고리라.” 그는 말했다. “거참 쓸만하겠네.”

그 말에 셜록이 키득키득, 웃는다.

“이젠 네가 내 양말도 기워줄 수 있겠는걸.” 말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존은 조금 전에 둘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내고는, 이번 달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집안일은 하지 않겠노라 내심 다짐하며 끙, 싫은 소리로 응수했다. 자신과 셜록이 어쩌면 커플일 가능성이 있다거나, 최소한 커플 비스무리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이 인정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인간의 아내라니 - 절대 사양이다.

“어떻게 해서든 네가 예외없이 크래커 큰 부분을 가져가게 되는 방법 같은게 있을거야. 너라면 연구라도 해봤을 거란 생각도 드네.” 그는 대답했다. “져준 거잖아!”

“물론이지. 하지만,” 셜록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며 말했다. “난 이미 내 상품을 받았는걸.”[각주:4] 

존은 목덜미부터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시선 한켠으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고 있는 홀리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그는, 원래보다도 몇 음정 높은 목소리로나마 간신히 대답해내는 데 성공했다. “뭔데?”

셜록은 심술궂게 씩 웃어보이고는 자켓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초소형 돋보기야!”[각주:5] 그리고는 보란 듯이 그의 눈앞에 대고 흔들어댄다.

“정말 딱이지, 그렇지 않아, 존? 물론 평소 내 장비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유쾌한 장신구인걸. 앤더슨 스타일에 가까울 것 같긴 하지만.”

존은 설레설레 힘없이 고개만 저었다. 셜록 주변에 있으면서 그놈의 지적 수준 때문에 충격을 받는 데야 이골이 날 만큼 난 그였지만, 거기다 “감정”까지 더해지다니… 뭐, 말 그대로 어이없는 거다. 그러면 어이없겠지. 이미 그러고 있으니 어이없기도 하고.

그는 큰 잔 가득하게 와인을 더 따르며, 다른 사람들의 잔도 채웠다. 마이크로프트는 수뇌부에서 있었던 웃기는 일화들을 애러실리아에게 이야기해주는 중이었기에, 존은 맞닿아 있는 셜록의 허벅지에서 전해져오는 온기는 결연히 무시하려 애쓰며 테이블로 주의를 돌렸다.

“…알고 보니 바나나가 점심 메뉴였던 거 있죠!” 마이크로프트가 이야기를 마치고는 큰 소리로 웃어제낀다.

존은 이야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은 물론, 거의 대부분을 못 들었지만 어쨌든 따라 웃었다. 플랫메이트의 가족과 크리스마스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나, 그러는 내내 방금 말한 그 플랫메이트와 사귀는 사이인척 하는 것 정도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상황인 양 행동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조금 전에서야 실제로도 사귀어야 할 사이라는 걸 깨달아 버리긴 했지만, 이 방에 있는 다른 모두가 이미 그렇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방금 말한 그 플랫메이트에게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플랫메이트라면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자기보다 다섯 단계는 앞서 있을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한 것도) 이미 그는 아까 이야기했던 모든 내용따위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완전 이해할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뭔가 다른 것들로 머릿속을 채워보기로 했다.

“말도 안돼.” 존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셜록이 날카롭게 그를 쳐다본다.

“역시 그렇죠!” 자신이 이야기한 바나나 일화에 대해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마이크로프트가 껄껄거리며 대꾸했다.

“민스 파이 드실 분?” 그리고는 일어서서 과장된 몸짓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 얘야. 난 네 일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구나.” 애러실리아는 와인을 홀짝이며 말을 걸어왔다. “네가 좀 이야기해주면 좋으련만, 셜록.”

셜록은 얼굴을 구겼다.

“한번도 제 일을 달가워하신 적 없으셨잖아요, 어머니.”

“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진 않았지. 하지만 네게 중요한 거라면… 너도 내가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있는 걸 좋아하진 않았잖니.”

셜록은 무시하듯 흐음, 소리를 냈다.

“온통 연보라색인걸요.”

애러실리아는 셜록이 그런 걸 알 리가 있겠냐는 듯한 태도로 눈만 도륵, 굴리고 만다. 셜록이 생각하는 장식이라는 게 고작 벽에다 샛노란 페인트를 칠해놓고 거기다 총질해대는 것 정도란 걸 생각하면, 어쩐지 그녀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지는 존이었다.

“음, 저기 계신 선량한 의사 선생님께서 네 모험 이야기 몇 가지 정도는 흔쾌히 이야기해주실 것 같구나.” 그녀는 존을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셜록을 흘끔, 쳐다보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 만다.

“물론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거실에서 민스 파이와 셰리주를 곁들이는 걸로 할까요.” 애러실리아는 불쑥 일어서서는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방을 나섰다. 드라마틱하게 퇴장하는 것도 집안 내력이군그래, 존은 생각했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애러실리아를 따라 복도를 가로질러갔고, 그 와중에도 셜록은 나직하게 뭐라뭐라 고시랑거리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던 사이 방안 곳곳에 켜둔 촛불과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벽난로 덕분에, 거실은 따스하고 잔잔한 빛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셜록이 비웃는다 할지라도, 애러실리아가 이런 쪽에 꽤나 식견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완벽하게 담아낸 엽서 속으로 걸어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존.” 모두들 자리를 잡고 앉아 기분 좋게 민스 파이를 맛볼 수 있게 되자, 애러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 막내아들과 함께 했던 모험 이야기들 조금만 들려주세요.”

존은 적절한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머리를 굴려보았다.

“흐음, 아직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 걸로 -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블루 카번클 사건[각주:6]을 이야기해드리면 어떨까 싶은…”

때마침 들려오는 셜록의 흥, 소리에 말이 끊겼다. (엄청 크지만 딱히 편안하진 않은) 소파, 바로 옆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블루 카번클 사건’이라니? 그렇게 부르기로 한 거야? 네 포스팅에 그런 식으로 기상천외한 이름을 붙이는 건 좀 그만둬주었으면 좋겠군그래.”

“네가 소설에서 튀어나온 인간처럼 구는 걸 그만두면, 나도 그런 기상천외한 이름을 붙이는 걸 그만둬 주지.” 존의 대꾸에, 지지 않고 째려보는 셜록이다.

“계속해요, 존.” 애러실리아가 채근한다.

“음, 몇 주쯤 전의 어느날 아침, 제가 아랫층으로 내려갔을 때였습니다; 버스 노선 절반이 운행을 중단할 정도로 엄청 추웠던 그때 말예요. 셜록은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보라색이었던 것 같은데-”

“사건이랑 내 가운 색깔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셜록이 불쑥, 끼어든다. 존은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대답했다.

“아무 상관 없어. 난 그냥 내가 기억하는 대로 이야기하려던 것 뿐이-”

“그럼 내 가운 색깔이 뭐였는지는 어째서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는 따지듯 물어왔다. “자기 열쇠를 어디다 뒀는지도 잘 기억 못하면서. 항상 네 주머니 안이나 커피 테이블, 아니면 주전자 옆에 있는데도 말야. 이런 걸 어떻게 매번 기억하지 못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러니까 넌 내가 열쇠를 두는 습관은 모조리 눈여겨보면서, 난 네 가운 색깔 하나도 눈여겨보면 안된다는 거지?” 존은 말하면서도, 치미는 홧기에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느껴졌다.

“내 이 그건걸.” 셜록은 ‘일’을 콕 집어 강조했다.

“그런 건 네 일이 아니거든! 나에 대한 건 아냐!”

“뭐, 그럼 내 취미라고 해두지.”

“뭐, 그럼 내가 눈여겨본 이유는, 전에는 입은 걸 본 적 없는데다 보기-”

불현듯, 방 안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북할 정도로 의식해버린 존이었다.

“…좋았으니까.” 그는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정말 놀랍게도, 셜록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존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려던 건, 셜록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는 겁니다. 뭘 입고 있었는지는 몰라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각주:7]” 

홀리가 의미심장하게 킥킥, 웃어댔다.

“셜록은 털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죠. 짓밟혔다거나 어디 시궁창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완전 꾀죄죄했어요. 보아하니 그날 아침에 그에게 배달되어 온 것 같았죠…”

그렇게 존은 블루 카번클 사건을 (어쩌면 좀더 포스팅에 걸맞는 이름을 생각해봐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낱낱이 설명해 나갔다. 셜록만 빼면 그의 동료들은 탁월한 청취자였다: 홀리와 애러실리아는 적재적소에 “오오”와 “아아”를 섞어주었고, 마이크로프트는 슬슬 오르는 셰리주 기운에 취해 셜록보다 먼저 이야기 하나하나를 추리해내려 들었다. 셜록은 내내 투덜거리면서 존이 조금이라도 잘못 설명할 때마다 끼어들었지만, 사실은 벽난로 불 앞에 모여앉아 감탄해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에 꽤나 흡족해한다는 걸 존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셜록의 행동을 추켜세워줄 때마다 이 친구의 귀끝이 살짝 붉어지는 걸 엄청 즐기고 있기도 했다; 사실은 조금 과하게 즐긴 나머지 좋은 수식어를 남발해버리는 바람에, 셜록이 알아차리고 맘상한 눈빛을 보내오기도 했다.

한 시간, 그리고 몇 잔의 셰리주를 마신 다음에야 존은 이야기를 마쳤고(셜록이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빨리 끝났겠지만), 홈즈 형제들은 접이식 우산과 장우산 중에서 우열을 가리느라 논쟁이 한창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스타일을 이유로 클래식한 쪽을 미는 것 같았지만, 셜록은 접이식이 들고 다니기에도 편하고 훨씬 실용적이라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셜록은 그 와중에도 앉아 있던 소파에서 계속 존 쪽으로 다가붙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존이 아닌데다 (물론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긴 했지만), 어쩌면 셜록의 손을 잡아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있는 참이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남자친구 아닌가. 뭐- 실제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분명 남자친구 노릇을 하고 있긴 하니까. 아니면- 음, 뭐든간에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그렇다는 거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셜록 말대로 사귀는 척해도 괜찮다는 걸, 셜록에게도 알려줘야 할 텐데. 술기운이 오르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셜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손을 잡았었는데. 저 인간에겐 그렇게나 쉬운 게 왜 자신에겐 그렇지 않은 걸까?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존?”

존은, 지난 10분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셜록의 왼손에서 시선을 들었다. 마이크로프트가 그에게 말을 걸어온 모양이다.

“죄송해요, 뭐에 대해서죠?” 그는 물었다.

“접이식인지, 아니면 옛날식인지 말야.” 셜록이 팩, 쏘아붙였다. 존이 우산에 대한 - 자신의 노골적이고도 흥미진진한 대화 내용을 듣지 않고 있었다는 데 짜증을 내는 게 분명하다.

존은 잠시 생각하다가 갑자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우산 크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말했다.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한 거지.”

셜록은 그에게 머리라도 하나 더 달린 것마냥 멍하니 쳐다보았고, 그 모습에 마이크로프트는 고개를 젖히며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웃고 또 웃어서 거실 전체에 울릴 때까지. 간신히 진정한 다음에서야 그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존 왓슨 선생, 자고 가시죠. 당신 꽤나 맘에 드는걸요.”

“나도 그래요.” 방금까지 이어졌던 우산 토론 내내 차분하기만 했던 애러실리아도 거들었다. “자아, 우리 이쯤에서 선물을 교환하면 어떨까? 시간도 늦었잖니.”








+)
드디어 새해다! 드디어 시즌2다! …덕분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서 시름시름…
몇 시간 후면 만나게 될 그들을 생각하며 귀여운 모습을 올리고 있자니 또 시름시름…
아니네 어쩌네 하면서 투닥거리는 사이 언뜻언뜻 드러나보이는 애정이 사랑스러워서 다시 시름시름…
새해 복 많이 받기 전에 셜록부터 받고 현실 로그아웃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 어쩌겠는가 : ]
+) 1월 2일(월) 09:30 추가: 결국 본방 보고 영상 보고 자막 읽고 영상 보고 노래 듣고… ∞ 
  • 그림: 시크하고도 섬세한 하이지달님께서 해사한 셜록을 그려주셨어요. 언제나 감사해요 XD



    1. …어딜 발뺌이니! [본문으로]
    2. “We’re a fucking couple.” - 체념한 존의 말투를 상상하며 부드럽게(?) 옮겨본다. [본문으로]
    3. ‘being with family at Christmas’ – 존은 가족이니까! >_< [본문으로]
    4. “I've already got my prize.” – 꺄 >_<♡ …하지만 1) 각주5 참조 + 2) 김치가 필요해! [본문으로]
    5. “It's a tiny magnifying glass!” - 어쩐지 약올리는 느낌? ‘-지롱’이라든가 ‘-라능’이라 쓰고 싶은 걸 참았;; [본문으로]
    6. ‘the Adventure of the Blue Carbuncle’ - 푸른 홍옥, 푸른 카번클 등의 해석이 있으나 그냥 독음으로 통일한다. [본문으로]
    7. ‘I don't know what he was wearing, I have no idea. I didn't notice.’ -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건 이런거겠지? :P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