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제: The Paradox Suite 
  • 저자: wordstrings + 역자: PasserbyNo3
  • 등급: 18세 이상 (NC-17)
  • 길이: The Paradox Series 2편 (약 5,400단어)
  • 경고: 없음
  • 저작권: 저자/역자 모두, 이 캐릭터들과 설정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저자 주석: 존 시점. 셜록과 함께 한다는 건 충격의 연속이지만, 존은 어쨌든 덤벼보기로 합니다.
  • 알림: PasserbyNo3가 습작으로 번역하였으며,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링크 외의 펌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 원문http://wordstrings.livejournal.com/1063.html



존 왓슨은 역설적인 상황에 익숙한 남자다. 그렇게 되어버린 거다. 그래야만 하기도 했고.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의사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거다.[각주:1]
 
그래서 그는, 정반대인 것들에도 수월하게 대응하곤 했다 - 그것도 꽤나 잘, 선선이 말이다. 어지간한 모순에도 그는 느릿하게 눈 몇번 깜박이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피곤한 듯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리고는 일하러 가는 거다. 덕분에 이 역설이란 건, 그게 뭐가 되었든간에 존 왓슨이 따지려 드는 일 없이 평화롭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거다. 이래서 그는 자신의 플랫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받고도[각주:2] 마치 시한 폭탄이라도 들어있던 것마냥 2주 후에서야 생각해낼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 폭탄의 이름이 자칭 셜록 홈즈라는 걸 알아차렸고, 이어 세상에서 제일 커다랗고 창백한 데다 최고로 무시무시하면서 아름다운 미치광이에게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기세로 키스당하게 된 거다. 이쯤 살았으면 그렇게까지 이례적으로 크게 놀랄 것까지는 없어야겠지만, 셜록 홈즈와 섹스하는 사이가 된 것에 대해 가장 놀랍지 않은 사건은, 그 모든게 너무나도 놀랍다는 거라 하겠다.
 
하지만, 놀라지 않는 것도 일이었다. 거의 모든 게 그러니 말이다.

“나- 뭐? 뭔데?”
 
셜록은, 이번에는 땀으로 젖어 미끄러운 존의 목 뒷덜미부터 다시 시작하는 중이었다. 잘린 머리나 살인 현장, 채찍질 흔적이 선연한 시체나 기타등등 - 한때는 살아있었지만 지금은 어떤 이유로든 끔찍하게도 살아있지 않은 - 움직이지 않는 것들에나 어울릴 법한 정밀 조사를 견뎌보겠노라고 과감하게 두번째로 도전하면서부터, 존의 땀방울은 한층 굵어지고만 있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표정 자체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막 끝낸 후라 - 사실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맞닿아 있는 둘의 몸은 온통 달아올라 있었고, 존은 자신의 등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는 회잿빛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로 존은 자신이 당분간 움직이는 물체고,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걸 셜록이 기억하고 있는지 의아해지기도 했다. 이 플랫메이트는 그의 허리에서 손을 떼더니, 기이하리만치 길고 가는 손가락 두 개로 그의 등줄기를 아주 살짝 어루만진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모든 자극은 응당 그래야 하는 수준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당신 어렸을 때 축구를 했는 줄은 몰랐는걸요.”

“아.”

존은, 몇 초가 지나서야 자신이 뭐부터 알고 싶은지 생각해냈다.

“음. 중요한 거야?”

“나한테 말한 적 없잖아요.”

물론, 존은 어렸을 때 축구를 했었다. 열두살에서 열세살 무렵, 2년 정도. 하지만 그의 목 뒷덜미에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좀더 일찍 이야기해줬어야 한다는 건가? 2년 동안 엉망으로 골키퍼 노릇 했다는게 그렇게 중요해?”

“아뇨, 아주 좋아서요.”

이제 때를 노리며 숨겨져 있던 충격, 키커의 등장. 달빛의 색을 닮은 광기어린 눈빛으로 샅샅이 살펴보는 거다. 여기에서 산다는 것의 기본이자, 실은 가끔 유용하기까지 했다. 존은 스스로를, 그의 과 어이없는 다리를 살펴보는 데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들일 수는 없을 거다. 다른 누군가가 이미 그를 위해 해주고 있기도 하니까. 그럴 때면 스스로의 신체 구조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존은 자만심 넘치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런던 유일의 자문 탐정의 손에 스스로를 온전히 맡겨버린 거나 다름없었고, 냉담하리만치 철저한 저 탐구 자세가 약해질 리도 없었다. 그런 거야말로 이 친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일테고, 그랬다면 존 역시 아쉬워하게 될지도. 그러니 추리와 철저한 조사는 그들의 성미에도 딱 들어맞으면서, 필요한 거기도 했다. 그게 가끔 존에게는 정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어 버릴지라도 말이다.

반면에 그 낮은 바리톤의 목소리, 아뇨, 아주 좋아서요. - 그건 그 극단적인 경이의 경계선에 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존 역시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셜록은 결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으니까. 





존 왓슨은 역설적인 상황에 익숙한 남자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을 대하는 게 편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와 셜록이 군인들도 질겁을 하며 내뺄만한 일종의 유독가스로 거의 죽을뻔 하다시피 하면서 -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사건을 막 해결해낸 바로 직후의 경우라 하겠다. 최소한 세번 이상 머리를 감았는데도 뜨거운 잿물 냄새는 여전히 머리카락에 배어있었다. 그들은 옷가지를 몽땅 버리고, 서로의 살갗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 그건 존이 이제까지 본 셜록의 살빛 중 가장 발그레한 색이었다 - 벅벅 문질러 닦고는 둘 다 알몸으로 존의 침대에 파고들어갔다. 셜록은 그를 온 몸으로 덮고 누워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며 너무나도 즐겁다는 듯, 진심어린 얼굴로 - 완전히 정신나간 놈처럼 씨익 웃었다.
 
“환상적인 날이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나네요.”

아니, 환상적이진 않았다. 아니고말고. 정확히 말하면 그런 건 아니다. 복장 도착자 세 명이 죽었는데다, 임시 가스실에 갇히기도 했고, 숙련된 경찰인 레스트라드까지 충격받은 걸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거다. 숨 한번 들이마시는 것이 두려워질 때는 아니란 말이다. 식은땀이 흐르고 서서히 커져가는 공포감으로 존의 팔다리가 완전히 침착하게 가라앉았다는 게 선명하게 기억났다. 사실 왜 그렇게 된 건지는 확신할 수 없긴 했지만. 그렇게 살아남기 위한 기계처럼 변해버리는 건 사실상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러고 나서도 뭔가에 놀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무심하게 숨쉬는 장치가 아닌, 인간답게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말이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셜록과 함께 보낸 하루는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따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네 기준대로라면, 그렇지.”

“뭐에요, 영화관에서 비몽사몽 졸기라도 하는게 더 좋다는 겁니까?”

“아니, 그냥. 하루아침에 좀더 여유있게 숨쉴 수 있게 된 건 좋아. 별로, 문틈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기절해버리기 직전까지 숨을 참지 않아도 되고. 그런 건 줄었지.”

셜록은 그저 씨익, 더 크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할 리가 없는데. 그 누구도 입술이 저런 식일 수는 없지 않나, 존은 생각했다. 저런 것도 자그마한 기적인 셈이다.

“어쨌든, 당신이 이렇게까지 신나하는 걸 보니 기쁘네요.”

존은 느릿하게 웃어보였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숨쉬는건,” 숨을 토해내듯 셜록이 나직하게 속삭인다. “지루하잖아요.”[각주:3] 
 
그리고는 존의 목덜미로 흰 손을 올린다. 그는 아주 살짝 - 기도가 막힐 정도로만 힘주어 눌렀다. 소리는 낼 수 있을 만큼. 너무도 세심한 손놀림에, 존은 잠시 자신이 실제로 살해되는 게 아닐까 의아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셜록은 이미 그날치의 혼돈과 파괴를 만끽했으니까. 유독가스가 스며들어오고 있는 조그마한 방구석에 갇혀 있는 것 정도면… 아, 적어도 열 시간 정도는 버텨주지 않겠는가. 어쩌면 내일 저녁까지일지도. 이어 셜록은 둘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서로의 것을 모아 그러쥐며, 허리를 옆으로 조금 옮겨 얼마 안되는 몸무게를 실어 기대왔다. 존은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그건 이제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셜록은 꾸준히 훑어올리며 그의 목과 서로의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존은 세상의 수많은 죽는 방법 중 이거라면 그닥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리가, 그는 다시금 생각했다. 혹시 내가 저항하길 바라는 걸까?

하지만 셜록의 만족스러운 듯한 조그마한 날숨소리와 하나하나 힘을 실어 그러쥐는 손가락, 존의 얼굴을 덮는 고수머리, 그건 아니다.
 
존이 아니면 그 누구도 셜록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에는 가만히 있길 바라는 거다.

이제 셜록의 입술이 존의 입술에 맞닿았지만, 키스하는 건 아니었다. 존이 자유롭게 숨쉬고 있지 못하다는 걸, 잘금잘금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다는 걸 입으로 느끼고 있는 거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키스의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겠는걸, 존은 생각했다. 안티-키스라니 - 이런 걸로 흥분하면 안되는 거겠지만, 마음과는 상관없이 감은 눈꺼풀 너머로 별이 보일 지경이었다. 따스하고 거침없는 셜록의 숨결. 산소 부족으로 괴로워하는 존의 입술을 간지럽힌다. 모든 게 네 시간 전의 셜록의 낯빛만큼 희끄무레해지고, 그의 생각만큼 백색소음처럼 거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예리하게 훌륭해져가다가, 이내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까맣게 변해간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완벽해서, 절대로 멈춰서는 안될 - 그에게 굴복하는 이 순간, 그의 삶이 통째로 누군가의 손 안에 쥐어지는 이 감각. 그저 아무나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위험한 게, 너무나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 스스로를 완전히 놓아버렸으니, 무엇도 존 스스로의 잘못일 리 없는 거다.

모든 게 나빠지면서 동시에 좋아지고 있었다. 혈액이 그의 귓가와 얼굴, 사타구니를 타고 울컥대며 흐르는데, 여유공간은 없고 압력은 과하게 높아지는데다 너무 빠르기만 했다. 존은 정말로 잠시 정신을 잃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식이 멀어지려 하는 바로 그 순간, 셜록이 자신의 폐에서 끌어올려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물 속에서 입을 맞대고 인공호흡이라도 하듯이. 마치 지금 그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기라도 한다는 듯이.

실은 그런 걸지도 모르지, 존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시트를 힘주어 움켜쥐며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을 때, 그건 차라리 죽음에 더 가까웠다. 동시에 죽음의 문턱에서 한줄기 빛을 만나 되살아나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무엇도 놀라울 건 없었다, 전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셜록은 완전히 정신이 나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찾아왔다. 셜록이 서로의 몸을 닦아주는 동안 존은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침대로 들어오는 셜록의 모습은 네이처 채널에서 갓 뛰쳐나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생명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그의 팔과 다리, 관절들까지 온통 멋진 모습으로, 그는 존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쥐며 두 눈꺼풀 위로 키스했다. 그리고는 휙 돌아 존의 가슴에 등을 대고 누워서는 불을 끄더니, 존의 팔을 자신의 가슴께에 두르고는 손가락을 한데 얽어왔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지 않아.” 셜록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대고, 존은 다정하게 말을 꺼냈다.

“안그래요?” 지루한거다. 잠시 침묵. “잠깐, 뭐가요?” 더는 지루하지 않은가보다: 흥미가 생겼군.

“보통은 묻지도 않고 목을 졸라 놓고는, 따뜻해지려고 그 사람 팔을 끌어가진 않거든.”

“따뜻해지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나직하지만 살짝 삐진 듯한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당신을 가까이하고 싶은거지.”

존은 그의 말대로 따랐다. 그러자 셜록은 다리 한쪽을 살짝 움직여서는 둘이 더 착 달라붙게끔 하는 거다. 존은 당황했다. 역설적인 것쯤은 괜찮고, 이제까지 그래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놀라지 않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보통은 자길 목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한다는 거야.”

“그런가요?”

“그렇지, 원칙적으로는.”

셜록은 존의 손가락 하나를 끌어올려 그 끝을 입술 사이에 댔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볍고도 담백한 애무였다.

“상대에게 뭘 해줘야 하는건지 모르겠는데요.”

이 문제를 생각하며 존은 화학전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보다는 아마, 정확히 말하자면 - 이 남자를 사랑하는 거겠지, 존은 스스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넌 정말 모르는거구나, 그렇지?”

“입 다물죠.” 이 친구님은 손가락으로 존의 맥박이 뛰는 곳을 찾아 부드럽게, 천천히 어루만지며 만족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존 왓슨은 역설적인 상황에 익숙한 남자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다.

셜록은 쓰레기 수거함, 구불구불한 철판 아래에서 온통 더러워진 채로 약에 취해 반쯤 혼수상태에 빠져 꼼짝도 하지 않는 - 창백한 낯빛의 그를 찾아냈다. 이미 죽은지 3일은 훌쩍 넘은 것처럼 보였다. 셜록이 문제의 쓰레기 수거함을 찾아내기까지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깨어났을 때는 도노반이 어딘가에서 납치범을 쏴버린지 6시간이 지난 후였는데, 존은 그게 셜록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노반은 고소해하거나 뻐기지 않았다. 그가 기억해낼 수 있는 한은 그렇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운 채 실려가면서도 그녀를 흘끔 보았지만, 그녀는 줄곧 조용하기만 했다. 그를 향해 미소지어주고는, 셜록의 등을 바라보며 눈을 데굴, 굴렸다. 존은 마주 웃어주려고도 해봤었지만, 제대로 했는지는 궁금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거기 꽤나 오래 있었는데다 극도의 탈수상태에 빌어먹을 약에도 취해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깨어있는 것만이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의학적 조치인 것 같았다. 그래서, 비참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입을 가로막은 접착 테이프와 추위, 마비된 상태에서도 칼날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라니. 버티긴 했지만 아슬아슬한 상태였기에, 그들은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뭐, 존이 이해하기엔 그랬다는 거다 - 그땐 이미 병원을 나서고 있는 중이었던 탓이다. 셜록은 간호사가 휠체어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마치 그 휠체어는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납치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가 셜록에게 속한다는 생각 자체가 조금은 불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존이었다. 사랑스럽다,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셜록이 완전 상냥한 간호사에게 그녀가 마치 대충 변장한 뱀파이어라도 되는 양 파르르 화를 내는 모습이 존의 신경을 긁었다. 사람들은 간호사들을 좋아해줘야 한단 말이다. 그들은 죽어라 열심히 일하는데다 걱정하는 배우자들의 화풀이까지 받아주고 있지 않은가. 친구나 동료들, 소시오패스들에게서도.

어쩌면 저 모두에 해당되겠는걸, 셜록이 연석에 걸리지 않으려 빙 에둘러가며 휠체어를 6m나 밀어주는 동안 그는 생각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존은 아직 조금 메스꺼웠고,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소파로 향했다. 셜록은 말없이 따르며, 그를 품에 반쯤 안은 채로 살짝 빗겨서 주었다.

그 자체로도 매우 불안한 일이었다.

존 왓슨은 계단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당장은 셜록과 섹스를 할 생각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존의 온 정신은 자신의 몸에만 가 있었다. 젠장맞게도 제대로 아프단 말이다. 등은 수거함으로 내던져지는 바람에 심하게 멍든 상태였고, 그의 인생도 차차 심각해져만 가는 것 같았다. 셜록이 자신에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란걸 존은 알고 있었다. 더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차츰 자신이 셜록의 신나는 작품이라는 거대한 틀 안의 작은 부대용품 - 살다가 죽고, 그래도 네 가지 측면 정도로는 기억될 정도의 등장인물이라는[각주:4]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다. 떠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언제고 곧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면야 정말 유감이겠지. 지금 셜록과는 거의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겁게 지내고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어요.” 낮게 깔린 목소리.

존은 눈을 떴다. 셜록은 소파 옆 카펫에 주저앉은 듯, 정리 안되는 부스스한 머리를 존의 배에 기대왔다.

이 탐정은 그닥 숨을 고르게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실은 지난주에 비싼 커리집 뒤로 젊은 웨이터가 잠깐 담배를 피러 나왔을 때 셜록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던 순간과도 거의 비슷해 보였다. 셜록이 자기 고양이가 조금 전에 죽어서 핸드폰이 정말정말 필요하다며 거짓말을 하던 그때 말이다. 몇분 지나지 않아 냉정하게 훔쳐내버리긴 했지만 실제로 눈물도 찔끔 흘렸다 - 그걸 보는 존은 늘 불안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아니, 어쩌면 그러기 직전일지도. 이번에는 고양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아니면 핸드폰이라든가. 그래서 존에게는 더, 훨씬 더 좋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이번엔 가짜로 그러는게 아닌 탓일까?

존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이 친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셜록은 보통 때 하듯 들이밀며 감겨오지 않았다. 그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놀라운 일 하나.
 
“어떻게 놈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가 있어. 당신에게 약을 먹여 그런데 가둬놓다니. 어떻게 내게서 빼앗아갈 수가 있냐구. 그 개자식, 자루에 넣은 고양이 새끼들처럼 물에 빠뜨려 죽여버릴걸.” 그는 날카롭게 내뱉듯 말했다.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건 내가 겪어야 할 일이었어요. 뭐, 그랬을 것 같진 않지만. 사람들이 그런걸 느끼고도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난 그저 맛만 본 거죠, 당신은 살아있고. 하지만 당신은 날 떠나진 말아야 해요. 날 떠나선 안돼, 절대로. 그런데 당신은 그랬지. 당신 잘못 아니란거 알아요. 하지만 나 견딜 수가 없었다구.”

놀라운 일 두번째.

“다 끝난 일이야, 모르겠어요? 계속 거기 얽매여있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당신이 - 심박 조율기같다는 거에요. 그러니 앞으로 누가 당신에게 눈길이라도 주면, 내가 반쯤 죽여놓을 겁니다.”

다시금 놀랍잖은 일이군.

“별로 안 좋은데.” 존은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빗어넘기며 속삭였다.

“안 좋아요?”

“안좋지.”

“그럼 뭐가 좋은데요?” 

놀라운 일 세번째다. 존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아니면 셜록이 정신나간 건 아닐까 의아해졌다. 둘 중 하나가 완전히 현실감각을 - 그들만의 특별판 현실이겠지만 - 상실해버리기라도 했나.

“모르겠네. 날 사랑하는 건 어떨까?”

그의 상체에 기댄 머리가 단호하게 도리질친다.

“알았어, 알았다구. 왜 싫은데?”

“그런 건 새로운 정보가 아니니까요.”

“음,” 존은 그냥 넘기기로 하고 쿨럭, 헛기침했다. “좋아, 그럼. 나는  사랑해. 그건 어때?”

셜록은, 존이 지금 막 저 부자연스러우리만치 도드라진 광대뼈를 한대 갈기기라도 한 것처럼 입매를 일그러뜨리더니 존의 얇은 면 셔츠로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 - 존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오래 - 동안, 이 셔츠를 과다호흡을 다스리는 도구처럼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가 곧 옷 위로 존의 배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셔츠는 위로 말려올라가고 존의 바지 지퍼는 내려가고 말았다.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든 판판한 배, 허벅지에 올려진 손. 무엇 하나 특별히 놀라울 건 없었다. 그 전에… 바다괴물과 드래곤이 런던 상공을 유영한다든지, 짚으로 금실을 자아낸다거나[각주:5]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일이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만 아니라면. 

아, 젠장, 셜록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걸 느끼며 존은 생각했다. 몇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것들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는데. 

놀라워.

아니.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전혀 놀랍지 않은 거다.





존 왓슨은 역설적인 상황에 익숙한 남자다. 대체로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게 정말 번거로워질 수도 있다. 

셜록이 지루할 때면 사람들은 으레 괴롭기 마련이다. 허드슨 부인은 큼직하게 덜어낸 브레드 푸딩을 가져다주자 대체 왜 쓸만한 걸 가져올 수는 없는 거냐며,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라도 내버려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레스트라드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크로스워드 퍼즐을 풀고 있을 때 핸드폰이 땡! 하고 깜박여대는 바람에, 셜록이 머릿속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불안해졌으니 말이다. 존은 두 가지 이유로 괴로웠다. 하나는, 부엌에 갖가지 유독성 강한 무시무시한 실험물들이 가득 들어찬 덕분에 사방에서 포름알데히드 냄새가 풍겨나고 있어 차 한잔 타 마시는 것조차 극도로 위험해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지루해하는 셜록을 보는 게 영 편치 않다는 거다. 진짜로 괴롭다는 걸 잘 아니까. 게다가, 존 왓슨은 동정심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밤, 그는 자러 가기 전에 이닦을 때 쓰는 욕실 컵에, 서른 두개의 인간 치아가 뿌리채로 들어있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냄새까지 나기 시작하는 중이다.

“무슨 짓이야, 셜록?” 그는 따져물었다.

“얼마나 빨리 변색되는지 보려구요.” 그의 친구… 남자친구… 차라리 그의 삶에서 역병과도 같은 존재라 해야겠지… 그게 좀더 진실에 가깝겠군. 어쨌든, 이 남자가 두 손을 입술에 모아 세운 채, 어쩐지 대문자 R과도 같은 형상으로 소파에 몸을 둘둘 말고 있는 자세로 대답한다. 푸른 가운을 입고 있는 것도 벌써 사흘째다. 매일 아침에 샤워하고 면도한 다음에 얄팍한 티셔츠를 갈아입는 것만 빼면 다른 건 무엇 하나 하지 않고 말이지.

“그러니까 대체 왜 내가, 저게 변색되는 걸 너랑 같이 보고 있어야 하는건데?”

“아니에요, 나 오늘 밤엔 집에 있을테니까, 아마도. 어쨌든 올때 미소 스프 좀 사와요.”[각주:6] 

존은 이를 - 다행스럽게도 이건 아직 과학적 연구 대상이 되진 않았다 - 부득, 갈았다. 불현듯 튀김에 사케 정도면 꽤나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코트를 집어들고 보란듯 방을 나섰다.

“목도리 해요, 밖에 추워요.” 윗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래서 그는 셜록의 두툼한 푸른색 목도리를 집어들었고, 잊지 않고 문도 쾅 소리나게 닫아주었다.

튀김과 사케는 머리 식히기에 딱이었다. 바에 앉은 덕에, 베이커가 아래에 사는 주문제작형 홈씨어터 장비를 판매한다는 이웃과 잡담도 했다. 누군가와 보스(Bose) 스피커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상한 것보다 더 낯선 - 부자연스럽다고 하는게 옳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꽤나 근사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에 갔는데, 우호적인데다 언어까지 가르쳐주고 싶어하는 현지 주민을 만난 것 같달까. 존은 흐음, 호응해주고 고개도 끄덕이면서 무선 스피커와 평면 텔레비전에 대한 길고긴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었고, 플랫에 들여놓는다면 크게 할인해줄 수 있다는 제안도 받았다. 거절하긴 했지만.

“오후의 피로를 풀 쓸만한 방법이니, 어쩌면 당신 남자친구가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

“제 남자친구의 기분 전환이라는 개념이… 사실 좀 평범하진 않아서요.” 존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밖에서 활동하는 걸 더 좋아하는 스타일인가요?”

“밖에서 활동한다”는 말이 “선혈 낭자한 살인사건에 푹 빠져 산다”는 뜻이라면, 그렇지.[각주:7] 그거야말로 딱 그 남자가 바라는 걸테다.

“텔레비전 보는 걸 썩 즐기는 편은 아니에요. 그닥 관심 끌만한 게 없기도 하고.”

“뭐, BBC가 형편없긴 하죠, 안그래요?” 이웃은 친근하게 동의해주었다. “제 명함입니다. 마음 바뀌면 연락해요.”

존은 계산하고 나왔고, 미소 스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각주:8] 그는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에서야 기억해내고는 울컥 짜증이 났다. 금방이라도 이 남자에게 벌컥 짜증내버리고도 남을 만큼 상당히. 소파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을, “저 이빨들은 뭐야?”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미소 스프”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남자 말이다. 그는 문을 열었다. 

셜록은 실제로 움직이긴 했다. 이젠 너른 팔걸이 의자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다는 게 다를 뿐. 그는 비참해 보였다. 아니, 사실은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남자는 일상적인 삶의 평범함에 너무나도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어, 존은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는 게 충분키나 한지, 그럴만한 거긴 한지가 잠시 의아해졌다. 그는 문을 닫고 걸어잠그며, 스프를 잊고 안 사온 걸로 언제 구박을 받게 될지를 생각하며 코트를 벗었다. 플랫 안은 쌀쌀했기에 목도리는 일단 벗지 않았다.

셜록은 스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그는 텅 빈 텔레비전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활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다.

3천 파운드짜리 사운드 시스템따위 필요 없겠는걸, 존은 생각했다. 전혀 필요없지, 절대로. 차라리 코끼리나 레이싱카가 더 나을걸. 아니면 순금으로 된 나폴레옹 조각상이라든가.

존은 서재로 가서 <마스터 앤드 커맨더>[각주:9]를 뽑아들고는, 셜록의 의자 앞에 주저앉았다. 베개 하나는 허리에 괴고, 무릎을 세워 베개를 놓고 그 위에 책을 올려두었다. 이 남자를 위해 범죄라도 한탕 저질러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그가 무너지는 걸 방관하고 있진 않을 거였다. 그러니 최소한 근처에는 있어 줄 셈이다. 바로 여기. 저 빌어먹을 의자 앞에. 욕실에는 어느 가련한 인간의 이빨들로 가득 찬 컵을 두고 말이지. 아, 신이시여.

때마침 괜찮은 책이었다. 존은 등 뒤, 괴로워하는 천재님의 존재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 슬쩍 무릎에 스치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러자 셜록은 다리를 움직이더니, 한 팔로 두 다리를 가슴께로 감싸안은 채 팔걸이 아래 한 팔을 괴고 드러누웠다. 이렇게 커다란 남자라면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게 가능할 리 없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셜록은 불가능한 것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온 몸을 작은 공간 안에 구겨넣는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젠 그의 숨결이 존의 목 뒷덜미에 바짝 와닿는다. 

“한번 할래요?” [각주:10]

존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참았다. 매우 열심히.

“음. 아니, 괜찮아. 별로 그럴 기분 아냐.”

“내가 당신 무시했어요?”

“그럼.”

“아.”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존은 슬슬 튕기는 게 정답이었는지가 의아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셜록은 지루해하고 있다, 이건 그도 아는 바다. 셜록은 뒤쫓는 것에 열광한다. 셜록이 다시금 존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오래 끄는게 나은 걸까? 쾌적한 여유를 한시간이 아닌, 두시간 누리는게? 셜록에게 계획을 짤 기회를 줘야 할까, 할일을 찾거나 조금이라도 생각할 기회를? 하지만 그는 이제 조용해졌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코끝이 존의 목덜미에 둘러진 목도리에 닿을락 말락하고 있다. 이젠 걱정되기 시작하는 존이다. 섹스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걸 견딜 수 없어하는 이 남자에게 조금이나마 머리를 쓰게 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생각해보도록 말이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

“흐-음?”

셜록은 결코 “뭔데요,”라든가 “다시 한번 말해줄래요,” 같은 말을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법이 없었다. 부드럽게 흐음, 하는 소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될 때라면 더더욱.

“섹스 말야.”

“그게 뭐요?”

“그렇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던 거냐고, 내 말은.”

“아, 미안해요. 그건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있었네. 딴 생각 했거든요.”

“무슨?”

“당신 머리, 금발이 아니에요.”

존은 책을 그대로 바닥에 엎어두고 돌아보았다. 제대로 들은게 맞는 걸까.

“뭐라구?”

“당신 머리, 금발 아니라구요. 하지만 마음에 들어요. 틀린 거긴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어요. 왜 이게 다른지 생각이 안 나네요. 색을 떠올릴 수 없으면 신경이 쓰여요. 너무 많은 색깔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거든요. 전염병이라도 되나. 끔찍해요.”

존은 눈을 깜박, 하고는 되물었다. “그런가?”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셜록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눈빛은 시리도록 창백했다. “전자렌지는 수많은 종류가 있고, 난 그것들 모조리 다 알아요. 그런 거랑 비슷하죠.”

존은 몸을 마저 돌려, 의자에 푹 파묻혀 있는 셜록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앉았다. 보통 이런 각도에서 셜록을 본 적은 없었다: 옆에서, 서로의 얼굴이 거의 같은 높이였다. 존이 살짝 위이긴 했지만. 이렇게 보는 그는 멋지다는 걸, 존은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놀랍지 않은 일이긴 하다. 존은 한쪽 팔을 의자 시트 모서리에 기대며 말했다. 

“전자렌지라.”

“내 말이 바로 그거죠, 맞아요. 전자렌지들. 난 모든 종류를 다 알아요, 쓸모있을지도 모르니까 전에 기억해뒀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는 거니,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너무 많아서 싫더군요. 그건… 품격이 없달까. 엉망이죠. 내 하드디스크 자리만 차지한다니까요.”

이건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내 머리가 그렇단 거지. 뜬금없이. 전자렌지같다고.”

“아니, 아니, 아뇨,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당신 머리가 전자렌지같은 게 아니에요. 한번에 수많은 색깔들이 뒤섞여 있는게 전자렌지같다는 거죠.”

존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미소지었다. 이 대화에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웃기라도 하면 그렇게까지 멍청한 기분은 들지 않으니까. 그는 멍청한 기분이 싫었다. 셜록이 그에게 바보라 할 때도 보통 이렇게 반응하진 않았지만,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건 분명히 그랬다. 그래서 그는 살짝 웃으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멍청하지 않아요, 수많은 나머지 인간들보다 멍청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 말이나 끝까지 들어보라구요. 당신 머리는 금발도 아니고, 그렇다고 갈색인 것도 아니에요. 뭔지 알아낼 수가 없어요, 어울리는 단어도 없구요. 그렇다면 이것 때문에 짜증이라도 나야 하는데, 10분 넘게 생각해보고 있는데도 성가시지가 않아. 그래서 당신 머리에 대해 생각하느라 섹스는 잊어버린 거죠. 도움이 되더라구요.” 

존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셜록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의 머리카락은 검다. 정말 까만색. 실상 검다 못해 진푸른빛이 도는. 칠흑같은 빛깔.
 
“그렇군.”

“이제 이해가요?”

“그러니까 네 말대로라면, 넌 수많은 비슷한 것을 구별해내는 게 가끔 싫은 거지. 색깔이나 전자렌지들같은 거 말야. 그래서 내 머리도 신경이 쓰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거고, 머리카락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하느라, 음, 정신이 흐트러져서 섹스에 대한 건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내 머리색이 네겐 그만큼 흥미롭다는 거네, 그러니까…”

“당신과 섹스하는 것만큼. 그래요, 그거죠.”

“셜록, 그 말은 나랑 섹스하는게… 지루하다는 건가?”

셜록은 발끈했는지 얇은 가운 깃을 매만지며 그릉, 싫은 소리를 냈다.

“자, 그런 게 멍청한 거에요.”

존의 가슴속에서 뭔가 빛나기 시작했다. 따스하게 깜박이면서도 빠르게 스쳐가고 있는 빛. 마치 햇살을 가리는 유리 너머 나무 이파리가 흔들리듯이.

“그럼 내 머리가… 매혹적이라는 거야?”

“그렇죠. 당신이라면 결국 이해할 줄 알았다니까요.”

이쯤 되자 셜록에게 키스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셜록에게 키스하는 건, 당연하게도 최고였다. 이젠 속속들이 알고도 남았을 텐데도 모든 면에서 놀랍기만 했다. 그의 입술은 늘 도톰하고 보드라웠고, 존이 기대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는 항상 입을 열어주었다. 밀어넣어진 혀로 수없이 알아내보려 한들, 그의 맛에는 결코 익숙해질 리 없을 거다. 그리고 섹스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더욱 수많은 충격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이 친구의 어깨에서 가운을 끌어내리며 존은 생각했고, 그의 성급한 손놀림에 셜록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존의 머리색이 사랑을 나누는 것만큼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뭔가 심오한 뜻이 있는 거야,[각주:11] 존은 더이상 생각이란 걸 할 수 없게 되기 직전에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건… 정말 고매한 의미일지도.[각주:12] 사랑 그 자체와도 조금은 닮아 있는 역설이다.

“구정물.”[각주:13] 한참 뒤에서야, 그는 셜록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

“으음?”

“엄마가 그렇게 부르시더군. 내 머리색 말야. 구정물 색이라고.”

“구정물.” 셜록이 따라한다.

마치 눈부시다고 말하는 것처럼.[각주:14] 





존 왓슨은 역설적인 상황에 익숙한 남자다. 

어느 정도까지는.

“젠장,” 방금 전, 그가 천장을 향해 헐떡이며 내뱉은 소리다. 붕 뜨는 듯, 스스로가 산산이 흩어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두 다리는 셜록의 각진 어깨에 걸친 채, 남자의 상아빛 목덜미에는 손가락 자욱을 남겨버리고 만다.

셜록은 바로 일어서서 가버리더니, 누군가에게 벌써 문자를 보내고 있다. 존 역시 알림 소리는 들었지만, 너무도 짜릿한 나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셜록은 그렇지 않았다, 어련하실까. 둘 다 절정을 맞은지 3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의 손가락은 벌써 타닥타닥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거다. 의외로 굴곡진 부분과 매력적으로 나온 부위가 어우러진 그의 얼굴에는 열의가 가득했다. 풀어헤쳐진 바지, 상기된 얼굴. 매무새를 가다듬을 생각도 않으면서 문자를 보낼 만큼은 정신이 남아 있다니… 누구지?

대체 누군데?

“마이크로프트,”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는 셜록이다.

존은 자신이 일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하다 말고, 화가 났다는 게 꽤나 강력한 동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대로 일어섰다. 침대 밑에 반쯤 들어가 있는 속옷을 찾아냈다. 자신의 몸을 닦기로 한다. 쉬지 않고 계속했다. 카펫을 노려보면서. 

“세계 안보의 사활이라도 걸려 있는 문제인가. 정말이지 골치아프군. 이 인간은 대체 왜 알아서 해결하려 들지 않는거지? 게을러터진 늙은 고양이같으니. 자기 책상 뒤에만 숨어서 움직이려 들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늘씬해질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의자에 앉아 손끝 하나 움직이려 들지 않으면서 나한테 질문이나 해대다니.”

이제 존은 이제 허리에 수건 하나 걸쳐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몸을 다 닦고는, 허드슨 부인이 우연히… 근처 어딘가에 왔다가 비명을 질러대는 일 없이 샤워실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어쨌든 여긴 그녀의 집이다. 그리고, 존은 신사니까. 지금 이 순간에는 돈 받고 몸을 파는 매춘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신사니까.

핸드폰 붙들고 있는 저 자식과는 다르게 말이지, 불만스럽게 생각해 본다. 왜 내가 우리 냉장고에 인체 일부분을 두는 걸 참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러니까, 이 인간 내가 곤란할 때 일부러 그러는 거란 소리에요.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 척 하는거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당신이 아니니까. 난 다른 사람들 관심 없어요.”

허리께에 흰 수건을 두른 채, 존은 문가에 그대로 멈춰섰다.

“별로 안 좋은데.” 그는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저 떠보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세게 뛰고 있었다. 그건…

…딱 예상한 그대로다. 넌 그를 사랑하지만, 무엇 하나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를 지키겠다는 이유만으로 남자 한 명을 냉정하게 쏴버렸지. 하지만 항상 그를 좋아하진 않아. 가끔은 목을 졸라버리고도 싶어하니까. 그의 손에라면 죽어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조수 따위로 취급받고 싶진 않아. 그게 스스로 정한 한계야. 그도 널 사랑할지 모르겠지만, 말로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거야. 아마 널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에게 넌, 거의 항상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일 뿐. 그를 위해서라면 넌 앞뒤 생각해볼 것도 없이 당장 죽어주기라도 하겠지만, 그도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알아차려 주긴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이건 뭐지? 

“어째서 ‘좋지 않은’ 거죠? 난 당신 사랑하는데요.” 짜증섞인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꼭 당신이랑 똑같이 대하거나 느낄 거라고 기대하면 안된다구요. 논리적이지 않아요.”

존은 잡고 있던 수건을 놓칠 뻔 했다. 간신히 잡고 있을 수 있던 건, 떨어뜨리는 게 만화에서라도 나옴직한 어이없는 반응임을 생각해낸 덕분이었다. 미국 워너브라더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반응 말이다. 어쨌든, 그가 예상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그건… 

충격.

충격 그 이상이었다. 삶을 온통 바꿔놓을 만한 경이로움.

그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치듯 울려왔다. 저 연인의[각주:15] 엄지손가락 아래 작은 키가 눌리며 나는 끊임없는 달칵, 소리와 함께. 그건… 

놀랍지 않은 경험이기도 하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마요. 3분 안에 옷 입어야 하니까요.” 셜록은 전송 버튼을 누르고 흐트러진 셔츠를 고쳐입으며 소리내어 한마디 했다.

그래서 존은, 샤워하러 가서 더운 물을 맞고 서 있기로 했다.

얼마나 특이한 삶이 될지를 생각하면서. 걸어다니는 역설 덩어리에게 사랑받는다니, 끊임없이 놀라운 삶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는 역설적인 상황에 익숙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을 가져보기 시작하는 중이기도 하다.



+)
역설 시리즈 첫번째 [자선]에 이어, 모처럼의 여유시간에 큰맘먹고 두번째편.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지라 읽을 때조차 허투루 넘길 수 없고, 옮기기도 어렵긴 하지만 
얼마나 좋아하는 글인지. 생각날 때마다 몇 번을 되풀이해가며 읽었더랬다. 
놀라움과 예상 가능한 익숙함, 생활 가득한 역설적인 상황들. 
기이하게 뒤틀린 모습이라도 - 그 살짝 과장된 단면 안에 캐릭터가 그대로 박혀 있어서 좋다. : ]




  1. ‘He is a doctor, and dying is what people do.’ - 모리어티의 대사이기도 해서, 번역도 그에 맞춘다. [본문으로]
  2. 전편 참조. 셜록이 나가야 한다고 종용했다. [본문으로]
  3. ‘“Breathing,” breathes Sherlock, “is boring.”’ - 마음에 드는 문장. [본문으로]
  4. 앞에 언급했던 배우자, 친구, 동료, 소시오패스. [본문으로]
  5. ‘straw spun to gold’ - 룸펠슈틸츠헨이라는 동화 참조. 물레로 짚에서 금실을 자아내는 (사기를 친) 방앗간집 딸 이야기. http://goo.gl/w7iFD [본문으로]
  6. …자기가 볼거니까 ‘같이 보고 있진’ 않아도 된다는 쿨싘한 대답. 이건 뭐…;; [본문으로]
  7. ‘If by "outdoors," you mean "elbow-deep in fresh gore," yep.’ - 정확한 지적이다.;; [본문으로]
  8. ‘the miso soup’ - 외국에선 국이라기보다는 스프의 느낌일 터라 이렇게 옮긴다. [본문으로]
  9. ‘Master and Commander’ -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소설. 나폴레옹 전쟁 시대 배경의 대하소설로, 제목은 한글 라이선스 번역을 따른다. http://goo.gl/daKZc [본문으로]
  10. “Fancy a shag?” - Aㅏ… [본문으로]
  11. ‘That means something profound’ - 아래 각주에 이어. [본문으로]
  12. ‘That means something quite heavenly’ - 각주11에 이어. 깊이를 뜻하는 profound와 높이의 의미가 담긴 heavenly를 대비하여 사용한 것. 그래서 ‘심오’과 ‘고매’라는 단어를 골라 옮긴다. [본문으로]
  13. ‘Dishwater’ - 말 그대로. [본문으로]
  14. ‘spectacular’ - 존의 구정물빛 머리를 보는 셜록의 시선. 참 좋아하는 부분이다. [본문으로]
  15. 여기, ‘연인(lover)’로 바뀌는 순간에도 감동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PasserbyNo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