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험한 데이트 | The Dangers of Dating
셜록은 최근의 생각들을 차례차례 곱씹어 보고 적당히 분류하면서 텅 빈 벽난로를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특별히 기억해둬야 할 만한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른 아침의 한기가 가운 속으로 스며들자 그는 얼굴을 구기며 의자 위로 두 다리를 올리고 팔로 감싸안았다.
돌아온 지도 이제 2주나 지났다. 그 말인즉슨, ‘사라져버린 도둑’ 사건이 일어난 것도 3일 가까이 지났다는 뜻이겠다 - 전에는 이렇게 오래 쉬었던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존은 세상 오직 하나뿐인 자문 탐정이 현업에 복귀했으니 놈들이 무서워서 그만둔 거 아니냐는 의견을 냈었다. 셜록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해보긴 했었지만, 곧바로 접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존이 그 말을 100% 진심으로 했던 건지, 아니면 사실은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줘서 ‘놀리려고’ 그랬던 건지 궁금해지고 말았다.
셜록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보통은 존이 그런 식으로 조롱한대도 방어하려 하진 않았었지만, 지금 그는 평소같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아이린에 대해 이상하게 질투했던 것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것도 없긴 했지만, 어쩐지 그가… 더 작아 보였달까? 셜록은 짜증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런 표현은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존이 더 작아질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그는… 셜록은 마음 속 유의어 사전을 끄집어냈다. 1
더 작은… 더 적은… 더 낮은… 아니, 다시 다시.
약해진… 감쇠된… 잠깐. 감쇠라.
연상해 보자…
음악으로 보면: 감음, 마침음이나 몰아가는 부분 없는, 불협화음이라거나 불안정하다고도 볼 수 있고…
불안정한 거다.
셜록은 벌떡 일어섰다. 불안정한 존이라니,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는 소파로 갔지만, 앉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소파. 뭔가 맞지 않았다. 기나긴 6개월 동안 자신의 집을 그려왔건만, 돌아온 지금 기억하고 있던 것처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셜록은 금방이라도 벌어질 만한 새로운 사건이 눈에 띄지 않을까, 바래보며 창가로 향했다. 그거라면 도움이 될 텐데. 새로운 사건은 언제나 모든 걸 더 낫게 해줬으니 말이다.
“제 여자친구가 지나치게 매력적이라서요.”
고작 몇 시간 지났을 뿐인데, 셜록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리 과한 말이라도 믿어 주리라 마음먹으면서, 자신의 의자에 기대앉아 그들의 새 고객이 될지도 모를 사람을 쳐다보았다. 복귀한 이후 고객들이 북적북적 밀려들어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 ‘탐정의 부활’이라는 기사 제목보다야 ‘가짜 천재의 자살’이 훨씬 더 컸고, 기억에도 확실히 남아 있었으니까.
테이블 건너 의자에 앉아 있던 존이 재빨리 말을 꺼냈다. 가차 없는 대답이 튀어나올 걸 막으려 하는 게 분명했다. “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성함이…”
남자는 불안하게나마 미소지어 보였다. “아 - 존스입니다. 개리 존스(Gary Jones)요.” 놀라우리만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 평범한 이름이군.
“죄송해요, 바보같이 들린다는 건 알지만…” 누구 하나 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되어서요. 그러니까, 제가 그렇게 볼 만한 사람도 아니고…” 이 말에도 역시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돈이 엄청 많거나, 그럴싸한 직업이 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직업이 뭡니까, 존스 씨?” 셜록은 물었다. 남자가 ‘그럴싸하다’고 정의하는 건 미덥지 않았으니까 - 어쩌면 실제 직업이 흥미로울지도 모르잖은가?
“보험회사 직원입니다.” 그딴 희망을 품었다니, 참.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서 데보라(Deborah)를 만났어요.” 남자는 URL과 로그인 정보가 담긴 종이 쪽지 하나를 건넸고, 셜록은 흘끔 보고는 존이 받아들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가 연락해 왔을 땐 좀 의심스러웠어요, 사진 한 장 올려두지 않았거든요. 그런 건 보통… 그러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혀 도움 안 되긴 하지만요. 하지만 제가 연락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닌데다, 그녀가 괜찮아 보이기도 해서 만나겠노라고 했죠. 그녀가 나타났을 때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 정말 끝내줬거든요.” 남자는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서는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젯밤에 저녁 먹으러 바에 갔을 때 한 장 찍어뒀습니다.”
그는 버튼 몇 개를 누르더니 셜록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뒤에서 어깨 너머로 쳐다보던 존이 낮게 휘파람 소리를 낸다.
“당신 말이 틀리지 않았군요, 존스 씨.”
셜록은 그가 못 보게 핸드폰을 기울였다. 여자는 날씬한 몸매에 큰 키, 불꽃처럼 붉은 긴 머리에 - 그는 곧바로 가발이라 단정했다 -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못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되돌려주었다. 2
“아, ‘개리’라고 부르세요. 처음 한 잔 하고 나서는 그녀에게서 다신 연락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두 주째 데이트하고 있는데다 어젯밤에는…” 그는 말을 끊었다.
“어젯밤에는요?” 존은 개리 존스의 프로필 페이지를 화면에 띄워놓은 노트북을 셜록에게로 건네며 채근하듯 물었다. 그의 이용자명은 ‘RocketMan75’였다.
“그래요, 제 플랫메이트의 외설적인 호기심을 채워주시죠.” 셜록은 눈으로는 재빨리 페이지를 훑어보며 거들었다. “우리 모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안달나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제일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개리 존스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음, 그녀가 주말에 여행을 가자고 하더군요. 같이, 그러니까. 사실은 내일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명백하게도 전 ‘그러자’고 했죠. 하지만 그러고 나니 생각이 나더군요.”
“거 참 어마어마하게 부담되었겠네요.” 셜록이 동정하는 투로 중얼거리자 존이 의자를 걷어찼다. 어쩐지 그게 묘하게 안심이 되는 셜록이었다.
개리는 혼란스러운 게 분명한지 얼굴을 찡그렸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부담되더군요. 그러니까, 고마운줄 모르는 놈이 되고 싶진 않지만, 이런 일이 그냥 일어나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녀는 10점 만점을 줘도 모자란데… 저는 고작 5…”
셜록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4점 정도죠, 잘해봤자.” 개리는 그렇게 말을 마무리하더니, “제 말은, 그녀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지만 이상하다는 것쯤은 시인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두 손을 펼쳐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거라 불안해요.”
이번에는 셜록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경고의 의미로 의자를 한번 걷어차였다. 그는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해주셔서 무척 기쁩니다, 존스 씨. 곧바로 착수하도록 하죠.”
셜록은 “정말?”이라는 반문을, 그것도 고객과 플랫메이트 양 쪽에서 스테레오로 들어버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이 옳은 게 분명해, 존 - 매력도가 완전 불균형이잖아. 이 ‘데보라’라는 사람,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구.”
존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모가 전부는 아냐, 셜록. 사교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너랑 성격이 딱 맞는 누군가를 만났다고 치자. 처음에는 딱히 끌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평소 좋아하는 타입이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차츰 깨닫게 될 거…”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래, 하지만 그건 이 상황은 아니잖아. 안 그래, 존?” 셜록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그 여자, 데이트 사이트에서 찾았으니까 - 그녀가 알 수 있는 거라고는 사진 한 장에 지극하게도 평범한 이력서에다 앵무새에 대한 저속하기 짝이 없는 농담 뿐인걸.”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 괜찮아? 얼굴이 온통 빨개졌어.”
“괜찮아, 괜찮아.” 존은 한 손을 저어보였다. “계속해.”
셜록은 그들의 고객에게로 돌아섰다. “내일 당신 계획은 뭡니까?”
“그녀가 7시쯤 제가 사는 곳 근처에서 전화하겠다고, 거기서 같이 가자고 했어요. 사실 전 그녀가 어디 사는지 모릅니다 - 자기 이야긴 거의 하지 않아서요.”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제가 또 걱정하는 게 그겁니다 - 결혼이라도 했다면 어쩌죠?” 그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제가 뭐 ‘바람’피울 만한 상대도 아니긴 하지만요.”
“그건 그렇죠.” 셜록은 앞에 내밀어진 축축한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다가 일어서진 않기로 했다. “존이 배웅해드릴 겁니다. 24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어깨 너머에서 들려오는 체념어린 한숨은 못 들은 척 하고, 노트북에 집중했다.
“넌 여자 눈 색깔보다 먼저 브래지어 사이즈부터 알아채잖아.”
새 고객을 문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존은 문가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셜록이 왜 이 사건을 맡겠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혀 그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될 때까지 잠시 눈을 꾹 감았다가,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인지 알아차렸다.
“얼굴 빨개진 거?”
“네가 했던 말을 반복하게 할 셈이군, 그래.”
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2주 전 그가 버럭, 화를 낸 이후 짚고 넘어가야 했던 문제를, 마침내 셜록도 직시하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그 비유는 집어치우고, 지금 분위기에 좀더 맞게 단김에 빼버려야 할 쇠뿔이라 내심 정의하는 존이었다.
“그리고 넌 그런 것들이랑 전혀 상관없는 척 하고 있지만, 아니거든.”
셜록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고, 존은 의자로 가서 앉았다.
“너, 아이린에게 반응했었잖아. 내가 저 의자에 앉아서 봤다구.” 1년쯤 전에 두 사람에게 ‘아기 이름’을 제안하던 걸 떠올리며 방금 비워둔 의자 쪽으로 고갯짓해보였다.
“그건 그저…”
“아니.” 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셜록. 너야 지적인 자극인지 뭔지 너 좋을 대로 스스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건 내 분야고, 난 봤어. 너라면 억제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항상 억눌러왔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 있었어.”
셜록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배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네가 맞다고 치자, 논의하는 차원에서.”
“네 전문이네.”
“그렇다면, 네가 봤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 이성애적 성향이란 거겠군. 그 성향이란 게 있기라도 했다면 말야.”
존은 흥, 코웃음을 쳤다. “네가 어떻게 아는데? 넌 성욕이란 걸 꾹꾹 눌러두고 살았으니 네가 뭘 원할지 전혀 모르잖아. 뭐라도 원한다는 걸 넌 결코 시인하지 않을 테니 말야.”
셜록은 몸을 세워 앉았다. “내가 아이린 애들러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 일 따위, 결코 없었을 거야.”
“그 여자가 네게 관심이 없어서겠지… 아니면 그 여잘 믿을 수 없어서라든가?” 존은 물러나 앉으며 발을 꼬았다.
“넌 이성애자잖아.”
“현실적인 거야.”
셜록은 얼굴을 찌푸렸고, 그런 그가 측은해지는 존이었다.
“그래, 보통 민간인으로서의 생활에서는 내가 대체로 ‘이성애자’라 하겠어. 하지만 거기엔 다른 이유들도 있는데다 난 세상 물정을 좀 알거든, 셜록. 내 군 시절 동료들 몇몇은 나더러… 음… ‘꽉 막혔다’고들 하지. 더 괜찮은 표현이 없네. 너도 들었단 거 알아. 보통 그런 별명을 갖진 않는다구.”
셜록이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왜 이러는 건데? 이 새로 발견한… ‘끌림’이란 거 - 그게 맞는 표현이라면 - 이것 때문에 나 돌아온 다음에도 그렇게까지 ‘평소답지 않았던’ 거야?”
“전혀.”
셜록은 한층 더 얼굴을 찌푸렸다. “이해가 안 가.”
“그렇다는 건 나도 알아.” 존은 한숨을 내쉬었고, 잠시나마 엿보였던 자신감은 사라져버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더 작게 보이려는 듯 두 다리를 다시 모아 앉았다. 그러기엔 한참 늦어 버렸지만.
“네 잘못이 아냐.” 그는 말했다. “‘끌림’…같은 건 차치하고라도, 내가 내 머릿속에서 우리 우정을 실제보다도 훨씬 더 크게 부풀려놓았던 건 명백한걸. 적어도 네 입장에서 보기엔 말야.”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덧붙였다. “그래놓고 널 탓하는 건 반칙이지.”
“존, 나는…” 셜록은 실제로도 꽤나 괴로워 보였다 - 그는 언제나 이해하지 못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니까.
“괜찮아. 네가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거 아니까. 난 그냥… 난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네겐 좀더, 내가 중요할 거라고 말이지.” 그는 반쯤 웃어 보였다. “모두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어할 테니까 - 정말 어리석지.” 3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 한잔?” 셜록은 대답하지 않았고, 존은 부엌으로 가서 익숙한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실제로도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 스스로 말하면서 화낼 필요가 없다는 걸 스스로 되새겼던 거다. 셜록은 그러니까. 지난 여섯 달 동안 존이 이상화시켜놓은 버전의 죽은 사람보다야 실제 본인이 되돌아오는 게 천 배는 더 나은 일이다.
“전에도 친구들 잃은 적 있었잖아.” 부엌 문가에서 말을 꺼내는 셜록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존은 돌아보지 않았다. “가까웠던 사람들도 있고.”
“그래, 그랬지.” 그는 찬장으로 손을 뻗어 머그 두 잔을 집어들었다.
“왜 내 샴푸를 쓰고 있었던 거야?”
의도했던 것보다 조금 더 힘을 주는 바람에 머그잔이 조리대에 쿵, 내려앉았다. 존은 숨을 고르며, “아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셜록.”
“샤워실에 있던 병, 내가 남겨뒀던 것보다 더 차 있었고, 디자인도 새거야 - 두달 전에 용기가 바뀌었는걸. 넌 그 브랜드 안 쓰잖아, 너무 ‘고급’이라며.”
“셜록, 내가 ‘아니’라고 했지.” 존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풀어내려 애쓰는 - 하지만 좌절하는 기색이 역력한 시선을 마주했다. “그만해.”
셜록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존은 영 불만족스러운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냉장고로 향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주전자 물이 차츰 끓어오르기 시작하다가 달칵, 꺼지자 방 안에는 묵직한 침묵만이 남았다.
셜록이 입을 열었다. “다트무어에서 그랬잖아, 넌 내 하나뿐인 친구라고.”
“그래, 그랬지. 네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내내, 수백번도 더 떠올렸던 기억이기도 하지.” 존은 자신의 머그잔 안에 넣었던 차 티백을, 온 힘을 다해 스푼으로 짓이겼다. “네가 돌아오고 나서야 난 겨우 좀더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됐어… 그땐 네가 이미 설탕을 넣은 다음이었으니까, 맞지? 네가 약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그 설탕 말야.”
그는 티백에서 더 이상 짜낼 수 없을 만큼 짜냈다고 판단하고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꾹 쥐어짠 다음 축축해진 찌꺼기를 머그에서 덜어내 옆에 있던 받침에 놓았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말도 안 하고 있으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약을 먹일 수 있었겠어? 그러니 넌 사과해야만 했던 거야 - 그것도 제대로 했어야만 했지. 네가 주는 걸 내가 뭐든 받아마실 만큼. 난 커피에 설탕도 안 넣는데도 말야. 난 단순하게도, 네가 타준 거니까 마셨을 테고.” 그는 수명을 다한 티백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쓰레기통으로 받침을 기울여 쓰레기 안에 던져넣었다.”
“그래서 내가, 사과에다 격려까지 받았던 거야…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양처럼 약이 들어 있을 커피를 넙죽 받아 마셨지, 안 그래? 참 잘했지.” 그는 셜록 몫의 차를 타고는 돌아서서 테이블 너머로 팔을 뻗어 문 쪽 모서리에 머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물러나서 조리대에 기대어, 두 손으로 자신의 컵을 감싸쥐었다.
셜록은 당황한 것 같았다.
“이봐, 괜찮다니까.” 존은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난 네가 돌아와서 기뻐, 알았지? 넌 여전히 내 제일 친한 친구고 난… 음, 난 네 친구 중 하나인걸.”
“무슨 소릴 하는거야?” 셜록은 부엌으로 한 발 다가섰다. “친구 많은 건 너잖아. 인기 많은 사람도, 다들 좋아하는 사람도.”
“총경님도 그러실지는 모르겠는걸.” 4
“뭐?” 셜록은 그 말을 일축해버렸다. “네 이야기, 수수께끼같다구. 최근 일로 보자면야 이젠 네가 내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넌 그 중에서도 현저히, 제일 중요한걸 - 너도 그건 알 거잖아?”
“내가 알아야 하나?”
“당연하지.”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셜록, 하마터면 존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음, 그거야 - 네가 문제를 제대로 짚었네.”
“어떤 건데?”
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네 말 안 믿거든.”
“자네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에 손을 댔는지 모르겠다니까!”
다음 날 아침, 레스트라드가 도착하자마자 부엌으로 휘청휘청 걸어와서는 테이블 위에 파일 두 상자를 내려놓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존을 바라보다가 ‘안녕한지’ 인사를 건네려 몸을 돌려서는, 거실에서 일어나서 다가오는 셜록을 바라보았다. “별일 없지?”
“그럼요.” 셜록은 위에 있던 상자로 손을 뻗어 뚜껑을 열어젖히고는 바로 안에 있던 내용물에 몰입해버렸다.
“새 사건입니까?” 존은 일어나며 건조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레스트라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뭔가 달랐다. 그는 존에게서 셜록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존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무미건조한 분위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레스트라드는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네가 말해보지.” 그는 말을 꺼냈고, “어젯밤에 여기 있는 자네 친구한테서 전화를 받았는걸, 지난 몇 년간 개리라는 이름의 피해자가 있는 미해결 살인사건이 필요하다고.” 상자들을 툭툭, 쳐보였다. “나이랑 피해자 하나뿐인 사건들로 좁혀 본 덕분에 여기 두 상자가 나온 거지. 왜냐면… 음, 한번 봐.”
셜록은 평범하기 그지없게 생긴 남자 사진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개리 멀리건, 2년 전에 도시 외곽에 세워둔 차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어. 목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었고, 자동차 도둑이라고 보기엔 틀린 것 같다고 생각했었지.” 그는 인터뷰 기록을 살피며 세부 사항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어내렸다.
“그래!” 그는 존을 바라보았다. “남자 어머니가 최근에 ‘데비’와 데이트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했어 - 누구도 그 여잘 본 적은 없어. 여자 신분은 밝혀지지도 않았고, 관련되어 있다고도 생각지 않았어.”
존은 깜짝 놀랐다. “정말이야? 그거 우연의 일치같은데!” 그는 레스트라드를, 이어 테이블 위의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말고.”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체 어떻게…?”
셜록은 두번째 상자로 가더니, 첫번째 사진 옆에 또다른 사진을 놓았다 - 이번에도 ‘별 특징 없음’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남자였다.
“개리 벤슨.” 레스트라드가 존에게 말해 주었다. “역시 차 안에서 발견되었지, 이번에는 가슴을 찔렸고, 12개월 전이었어 - 여자친구에 대한 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그는 셜록을 쳐다보았다. 셜록은 정보들을 재빨리 훑어보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젓더니, 종이 한 장을 존에게로 불쑥 내밀었다.
“남자 누나에게 전화해봐 줄래?”
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향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레스트라드는 다시 셜록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셜록 역시 마주보았다. “연쇄 살인범이죠. 말했잖습니까.”
레스트라드는 손을 뻗어 셜록이 들여다보고 있던 파일 위에 얹더니, 테이블로 밀어 내려놓았다. “존 말야.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자네와 존이겠지.”
셜록은 진정 놀라울 정도로 단조로운 표정이 되어버렸다.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건 더이상 관심 없습니까, 레스트라드? 이게 뭔가요? 영국 경찰청 범죄 수사국의 오프라라도 됩니까?”
레스트라드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존이 자네에게 이야긴 했나?”
“항상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우린 함께 살잖습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잖아’라고 대꾸할 상황이겠지만, 자네라면 모를 가능성이 농후하겠지. 자네 때문에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존이 이야기하던가? 자네가 그를 어떤 상황에 밀어넣었는지, 자넨 조금이라도 알기나 해?”
“파일 주시죠.” 셜록은 그를 노려보며 잡고 있던 종이 끝을 잡아당겨보았지만, 레스트라드는 놓아주지 않았다.
“얼마 더 버티지 못했을 걸세.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뛰어들기나 하고, 그럴 때마다 살아남는 것 따위는 점점 신경쓰지 않는 것 같더군.”
셜록은 그대로 굳었지만, 이내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존이 망가졌다면, 내가 고칠 겁니다. 전에도 했었다구요. 파일 내놔요.”
“좋은 소식이야!” 존이 손에 쥔 노트를 들여다보며 부엌으로 다시 돌아왔다. “누나가 당시에 갓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하더군, 만나본 적은 한번도 없고. 그 여자 이름은 기억 못했지만, ‘D’로 시작되는 것 같다고 했어.”
그는 시선을 들더니 눈을 깜박, 했다. “별일 없는거죠?”
“그럼.” 셜록은 레스트라드의 손에서 파일을 끄집어 빼내며 대답하고는, 그대로 거실로 휙 사라져버렸다.
레스트라드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일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존… 저 인간이 어쩌다 이런 걸 맡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겠나?”
5분 후, 두 사람은 셜록의 의자 앞에 서 있었다.
“이름인 게 분명해.” 그는 올려다보지도 않고 말을 꺼냈다. “그런 정도의 여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 새에 대한 수준낮은 농담에 끌리기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럴 리는 전혀 없어 보이지만.”
“알았어.” 레스트라드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완전히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자네가 확실히 운이 좋은 모양이군. 그러니 어떻게…?”
셜록은 껑충 일어나며 들고 있던 파일을 덮고, 레스트라드의 가슴이라도 칠 기세로 불쑥 들이밀었다.
“왜 여자가 - 그것도 매력 넘치는 여자가 - 개리 존스같은 남자한테 작업을 걸겠어요? 남자 성격에 끌린 것일 리가 없어요. a) 그 사람을 한번도 본 적 없는데다, b) 그런 사람도 아니니까요. 그럼, 왜겠어요? 뭐에 끌린 거죠? 남자 사진을 봐요, 평범한 사람 연구 결과나 다름없다구요 - 애매한 턱에 입술 가는 남자를 열망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습니까.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좋았던 거라면, 훨씬 더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걸요; 들창코를 좋아했다 쳐도, 여드름 흉터 얼룩덜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사이트에도 차고 넘쳐요.”
그는 테이블 쪽으로 가서는 노트북을 열어, 문제의 남자 사진을 보여주었다. 레스트라드 역시 그의 묘사가 그렇게까지 심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름이죠. 그렇지만 이름에 뭐가 있길래요? 상대 이름에 누가 신경이나 쓴답니까? 허드슨 부인이 앉혀 놓고 보게 했던 그 말도 안되는 연극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 핸드백 어쩌구 하는 그거…” 그는 존을 흘끔, 바라보더니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넘어가죠.”
“‘어니스트 놀이’ 이야깁니다.” 존이 소근소근 레스트라드에게 귀뜸해 주었다. “지난주에, 허드슨 부인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같이 극장 갔었거든요.” 5
레스트라드는 씨익 웃었다. 저 셜록 홈즈를 죄책감에 사교적인 모임까지 따라나서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완전 강심장일 테다. 그는, 기회 닿는 대로 예의 그 집주인에게 꽃다발이라도 하나 사다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면 가죽 채찍이라든지.
셜록은 다시 흥미를 잃은 모양이었다. “어떤 사기꾼이 개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만 고르겠습니까? 아니죠…” 그는 고개를 저었다. “특정 이름에 집착하는 건 훨씬 더 사악한 동기가 있다는 뜻이죠 - 그리고 그녀가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건, 전에도 해봤을 가능성이 있구요.” 대부분 레스트라드를 향해 이야기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는 중에도 계속 말없는 존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군.” 레스트라드는 곰곰이 생각하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그럼, 그 여자가 자네 고객을 세 번째 ‘개리’로 삼을 생각이라면, 우린 오늘 밤에 여잘 잡을 수 있겠는걸 - 여자가 그 남잘 잡으러 갈 때 말이지.”
“무슨 혐의로요? 멍청한 인간이랑 데이트했다는 걸로? 감옥을 몇 배 더 늘려야 할걸요.”
그 말에 존의 입술이 비죽였고, 셜록 역시 눈치챘는지 히죽 웃었다.
“음, 여자가 찌를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잖은가!”
“아뇨, 절대 안되죠.” 셜록 역시 동의하며, “가서 남자 차에 도청 장치를 심어놓으시죠. 보나마나 칙칙해 빠졌을 - 남자 아파트에 잠복하시고, 방검 조끼라도 입혀둬요. ‘경찰답게’ 말이죠.” ‘얼른 가시죠’ 라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럼 자네들은 뭘 할 건가?”
셜록은 부엌에 있는 상자들을 가리켰다. “우린 저기 있는 증거들을 살펴보고 여자에게 죄를 물을 때 쓸만한 게 있는지 찾아볼 겁니다.”
레스트라드는 한숨 한번 내쉬고는, 이미 팔을 걷어부치고 부엌 쪽으로 향하는 존을 바라보았다. “난 그럼 가서…”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의 말을 딱 잘라버리는 셜록이다. “우리가 뭐라도 건지는 대로 전화할 테니까요. 존에게는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그는 한 팔로 문 쪽을 가리켜보였다. “가시죠 - 가봐야 할 곳도 있고, 구할 사람도 있잖습니까, 빨리 빨리.”
하지만 레스트라드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제가 바래다 드리죠.”
평소 걷는 속도 이상으로 떠밀리며 계단을 내려간 레스트라드는, 현관 앞에서 머뭇머뭇, 내려온 길을 다시 바라보며 걱정스레 한마디 했다. “세상에서 최악으로 위험한 육식동물 손아귀에 상처받은 짐승을 버려놓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이야. 자네가 이야기해볼…?”
“가요.” 셜록은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았다.
레스트라드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우린 어디 가고 있는 거지?”
두 사람이 탄 택시가 런던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셜록은 존을 슥 쳐다보았다. “‘matchme’.com 본사.”
“그렇군.” 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시 후 얼굴을 찡그렸다. “왜 거길 가는 건데?”
진심으로 묻는 것 같지 않았다. 셜록은 몸을 기울여 그의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생각해, 존! 이 사건에서 뭐가 중요하지?”
“어…” 갑작스러운 접촉에 존은 깜짝 놀랐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이름?” 그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얼굴에 예전의 열의 비슷한 것이 담긴다.
셜록은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속 해봐.”
“그러니까… 아 - 그 여자가 거기서 일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뭐, 해커일 수도 있겠지만, 직원일 가능성이 더 높지.”
존은 감탄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고, 셜록은 잠시 그 미소를 만끽했다. 얼마 가진 않았지만.
“그럼 레스트라드한테는 어떻게 ‘파일들 살펴보고 있겠다’는 이야기로 얼렁뚱땅 넘길 생각을 한 거야?”
셜록은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존은 휴, 한숨을 내쉬었지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 그렇다고 해서 실망한 것 같지도 않다는 걸 눈치챈 셜록은 흐뭇해졌다.
두 사람은 가는 내내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 셜록은 자신도 모르게 또다른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다른 이유들’이란 건 뭐지?”
“흐음?” 창문을 깊게 연구하던 존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네가 그랬잖아, ‘대체로 ‘이성애자’라 하겠지만, 거기엔 다른 이유들도 있다’고.” 셜록은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그 ‘다른 이유들’이 뭔데?”
“아, 아냐.” 존은 고개를 저으며, “개인적인 건 논외니까, 그것도 논외야 - 너 혼자 추리해낼 수 없는 몇 가지마저도 있는 대로 불어줄 생각은 없거든, 고맙게도 말야.”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 길, 말 그대로 일방통행이네.”
셜록은 얼굴을 구겼다. 정보들을 다 갖추지 못한 채로 어떻게 존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들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나, 동정 아냐.”
고무줄로 당기기라도 한 것마냥 존이 고개를 홱, 돌렸다.
셜록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가 궁금해했다는 거 알아. 뭐, 아니거든. 모리어티가 뭐라 생각하든간에.”
존은 대화 도중에 갑자기 모리어티가 튀어나오는 데 조금 멍해진 것 같았지만, 묻지는 않겠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난… 대학 때 좀 해봤어.” 셜록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신만 사납고 - 약점이기도 했어. 제껴 버렸지.”
“좀 해봤다고,” 존이 의미없이 되풀이한다. “그렇군. 그럼 제대로 사귄 적은 없는 건가?”
셜록은 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쪽에서는 확실히 없지.”
존의 얼굴 한가득 ‘가엾은 인간들’ 이라는 생각이 드러나 보였다. “남자, 아니면 여자?”
“대표군으로 골랐어.”
“그럼 그렇지. 바보같은 질문이었네, 미안.”
“네 차례야.”
“뭐?”
“그렇게 돌아가는 거 아냐? 내 패를 보여줬으니…”
존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니, 내 말은 ‘그래’라고 - 그렇게 말하는 거야. 제대로 했어.”
그는 웃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고, 셜록은 조급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맞아. 그래. 미안. 음… 네 질문이 뭐였지?” 그는 자문자답하더니 정신을 차렸다. “아, ‘다른 이유들’… 그렇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이야기를 네게 하게 될 줄이야.”
셜록은 온 정신을 집중했다. 존에 대한 새로운 정보라면 언제나 흥미로우니까.
존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아, 맙소사.” 잠시 눈을 꾹 감았다. “알았어, 알았다구. 좋아.”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다. “난 명령받는 데 익숙해, 알지?”
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에 있었고, 다음엔 나였지. 넌 그런거 즐기잖아.”
존은 그 말에 그를 째려보았다. “난 참고 받아들이는 거야, 셜록. 같은 게 아니라구.”
“그렇다고 하신다면야.”
“그렇다고 하는 거야.”
“이게 네 성향 문제랑 관계가 있어?”
존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난… 연관되어 있지.” 눈을 피했다. “그게…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라면…”
“섹스 이야기인가.” 셜록은 질문처럼 내뱉지 않으면서도 확인하듯 말했다. “아! 계속 이어지는 거였어? 네가 명령받는 걸 좋아한다는 거…”
“아니.”
“아냐?”
“확실하게 ‘아냐’.” 그는 다시 쳐다보았다가 곧 눈을 돌렸고, 목덜미가 불그레하게 물들었다.
“확실하게… 아.” 셜록은 얼굴을 구겼다. “아이린처럼?”
의심할 것도 없이, 해선 안될 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에는 침실에서 적극적인 걸 선호한다는 게, 고통을 주고 싶어하는 욕구라든지 협박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대 범죄자와 운명을 같이 하고 싶어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라는 걸 - 셜록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제대로 들어버렸다. 여전히 존이 여느 때보다도 더 이성애자인 것처럼 구는 이유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지금 그런 걸 물어볼 만한 때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극히 명확했다.
“쉿!”
“너나 조용해!”
“존!” 셜록은 팩, 쏘아붙이며 하던 일에 집중했다. “조용히 좀 해줄래?” 이내 텀블러 자물쇠가 달칵, 들어맞으며 데보라 마틴의 현관문이 열렸고, 두 사람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셜록은 주변을 살핀 다음 존에게 고갯짓으로 열린 거실 문 너머로 보이는 책상 쪽을 가리켰고, 그는 침실로 들어가 곧바로 있어선 안될 만한 게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셜록이 꺼내보인 레스트라드의 뱃지 중 하나와 - 시인하라며 강요당한 거긴 했지만 - 존의 순진무구한 푸른 눈망울을 본 후부터, ‘matchme’ 사장은 꽤나 협조적이었다. 직원 명부를 훑어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개리 존스의 핸드폰으로 연락했던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셜록!” 존이 낮게 식식거렸고, 셜록은 그에게로 다가서며 눈을 도륵, 굴렸다.
“그런 식으로 치찰음을 낼 필요따윈 없다구, 존. 살의 넘치는 마틴 양은 지금쯤 세 번째 피해자 후보님에게로 가시는 중일 테니까.”
“이거 봐.” 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여러 가지 중 사진 액자 하나를 내밀었다. 정말이지, 이젠 다들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만한 걸 숨기려 들지도 않는 건가? 도전 정신은 다 어디 갔어?
셜록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폭주족’들이나 몰 법한 차 후드에 걸터앉아 있는, 보다 어린 시절의 데보라 마틴이었다. 평범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그녀의 어깨에 한 팔을 걸치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자랑스레 열쇠를 들고 있었다. 차는 줄무늬에 색이 들어가 있는데다, 원 제작자들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개조된 상태였다. 그리고 앞유리 윗쪽을 가로지르는 어두운 색 줄무늬에는 운전자석 위에 ‘개리(Gary)’, 오른편에는 ‘뎁(Deb)’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6
“원래 개리일까?” 존이 의견을 냈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데?”
셜록은 사진을 내려놓고는, 널찍한 책상 맞은편으로 가서 제일 윗 서랍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 여잘 차버렸을 거라 생각해 - 그런 다음부터 여자는 자기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이랑 데이트하는 걸로 갚아준 거지. 분노로 인한 행동이었던 게 분명해.”
존은 막 대답하려 했지만, 그때 현관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바로 전등 스위치를 끄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은 마룻바닥 위를 또각거리며 다가오는 하이힐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곧 문이 열리고 데보라 마틴이 다가왔고, 분노 가득한 얼굴로 핸드백에 손을 뻗었다. 존이 진정시키려 한 손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그녀가 총을 쏘고 말았다.
모든 게 멈췄다. 이어 존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순간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갔다.
셜록은 책상을 짚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버티며, 훌쩍 뛰어 그대로 달려들었다.
열린 문가로 새어들어오는 빛이 그에게로 향하는 금속 재질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손목을 감싸쥔 손가락, 위로 꺾자 작은 뼈들이 부러지는 소리.
딱딱한 나무바닥에 총이 떨어지는 소리.
뒤이어 여자가 쓰러지는 소리.
여자의 옷깃을 틀어쥐고 바닥에서 상체를 끌어올리는 손 안에 닿는 천의 느낌.
“저 사람이 무사하기만을 빌어라.” 이상하게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꽂는 순간의 쿵, 소리.
“셜록…”
‘다행이야’… 의식을 잃은 여자 따위는 버려둔 채, 셜록은 세 달음만에 책상 옆으로 가서 존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한 손을 옆구리에 대어 누른 채 앉으려 하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손가락 아래 번져나가는 얼룩 자욱이 검게만 보였다. 커져만 가는 어두운 빛깔이 두 사람 모두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누워 있어, 바보같으니!” 한 손으로 존의 머리 아래를 받치며 셜록은 그를 밀어 뉘였고, 옷가지를 헤치기 시작했다. 겹겹이 껴입은 스웨터에, 셔츠, 티셔츠를 끌어올려 치워버렸다. 몇 장이나 입은 거야. 대체 누가 이딴 식으로 몇 겹씩 껴입으래?
“그냥 긁힌 것 같아.” 존은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지만, 셜록은 믿지 않았다. 그는 가까이 들여다보며, 뒤로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탁상용 전등 전선을 찾아내 스위치까지 재빨리 거슬러 올라갔다.
붉은 빛으로 바뀌는 검은 얼룩,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이야, 셜록. 괜찮은 것 같아.” 존이 또 일어나 앉으려 하자, 셜록은 그대로 밀어 눕혔다.
“좀 가만 있어 주겠어?”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존의 티셔츠 끝으로 피를 조금이나마 닦아냈다. 보일 때까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관통한 상처가 없는 걸, 존의 몸 속에 총알이 박히지 않았다는 걸 - 그게 이 남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걸 셜록이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일같은 건 없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도록.
그는 물러나 앉았다. “바보같으니라구!”
존은 한 팔을 괴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갈비뼈 윤곽을 따라 난 상처를 흘끔 쳐다보았다. 엉망이었다.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생명에 위협이 될 만한 건 절대 아니었다.
“음, 거 참 미안하군그래.” 전혀 그렇게 들리진 않았지만. “저 여자가 총까지 가지고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셜록은 그대로 일어섰다. “당연히 총을 가지고 있지! 요즘엔 개나 소나 총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아.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는 핸드폰을 꺼내 레스트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니, 셜록?” 느릿느릿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이크로프트? 왜 형이 레스트라드 전화를 받는거지? 아니, 신경 꺼 - 알고 싶지 않으니까. 그 인간 바꿔주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이야?”
“그냥 그 인간 바꾸…”
“셜록, 너 나한테 전화했어.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셜록은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여왕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가 총을 맞은 덕분에 적어도 레스트라드가 무단 침입으로 잡아넣을 정신은 없었잖아.” 세 시간여쯤 지난 후, 존은 의자에 앉아 차분히 지적했다. 리도카인을 넉넉히 맞은 덕분에 당장은 아프지도 않았다.
뭐가 잘못된 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 보니, 시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게 아닐지 의아해지는 셜록이었다.
“물론, 연쇄 살인범 하나 더 잡아줬다는 사실도 더해서 말야.” 그는 씨익, 웃으며 “굉장했어, 셜록 - 여자친구가 지나치게 매력적이라고 말하는 남자 한 명에게서 그 모든 걸 알아내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넌 정말 훌륭하다니까. 항상 말했잖아.”
셜록은 맞은 편에 앉아 - 완전히 차분하지만은 않은 - 손가락 끝 너머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경찰이 제대로 말아먹어서 개리의 플랫에서 딱 걸려준 덕도 있다고 봐.” 존이 덧붙이면서, “우리가 그 여자 집에 없었더라면, 경찰들이 뒤쫓기도 전에 아마 짐 싸서 일찌감치 도망쳐버렸을걸.” 기대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차 한잔 할래?”
“너, 여자가 쏘게 한 거지.”
존은, 우스우리만치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뭐라구?”
셜록은 의자에서 몸을 기울였다. 경찰과 의료팀을 상대하는 내내 유지했던 표정이, ‘집’을 떠올리게 하는 남자와 ‘안심할 수 있는’ 환경에 와 있는 지금은 슬슬 흐트러지고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 그는 얼굴을 구겼다. 그런 건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7
“무슨 소리야?” 존이 되풀이해 물었다.
셜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보다는 더 노력해야 할 거 아냐.” 그는 존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아까의 광경을 되새겨보았다 - 데보라 마틴이 그를 쏘는 순간에도 거기 그대로 서 있던 모습, ‘그럴 때마다 살아남는 것 따위는 점점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경고하던 레스트라드의 목소리, 모런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틀어쥐는 순간 고개를 떨구던 모습을.
그는 앞으로 다가서서 몸을 숙여 존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우리 생활이잖아: 살아남으려고 싸워야 하는 거라구, 내 말 알아듣겠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쏘게 내버려 두면 안돼.” 자신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귀에도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난… 하지만 셜록, 그 여자가 그냥 쏜 거잖아 -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셜록은 좌절감에 신음했다. 손가락에 꾹, 힘을 주었다가 물러나며, 갑자기 숨이 차오는 느낌에 한숨 크게 들이마셨다. 존은 그만큼 노력하고 있지 않은 거다 - 모런 상대로도 포기해 버렸고, 총에 맞기나 하고, 스스로가 중요하다는 걸 알지 못하고… 중요하다는 것조차 믿지 않는 거다.
“셜록, 정말이지 난 이해가 안 가는데…”
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셜록은 뒤돌아섰지만, 그는 그냥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너무나 중요한데도 그렇다는 건 전혀 깨닫지도 못한 채로.
“널 잃을 순 없어.” 그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머릿속으로 가능한 선택지를 훑으며 바로바로 지워나갔다. 존에게, 그가 가치있다는 걸 증명해 보여야만 했다. 살고 싶게 만들어야 했다… 살아남겠다고 마음먹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말로는 전해지지 않았다 - 이제껏 일어났던 모든 일들 때문에, 존은 그저 그를 믿지 않는단 말이다. 직접 느낄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했다. 어떤 증거라도 제시해야 했다. 그에게 무언가… 주어야… 아! 어리석군… 어리석어… 명백한걸…
셜록은 그대로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가, 존의 얼굴을 그러쥐고 키스했다.
닿는 지점은 하나인데 서로 돌고 돌아가는 게 안타깝다. 이렇게나 서로가 간절한데. : (
◀ 3. 마지막에서야 | The Last To Know | [ 목록 ] | 5. 입증 책임 | The Burden of Proof ▶ |
- ‘how could John be any smaller?’ - Aㅏ… 존… orz [본문으로]
- …야! [본문으로]
- 3편 마지막, 셜록의 대사를 그대로 받아친 것. [본문으로]
- S2-3, 존이 한대 쳤던 걸 생각하며 던진 냉소적인 유머. [본문으로]
- ‘Importance of Being Earnest’ - 연극/영화로 다수 각색된 오스카 와일드의 글. 영화는 본 적이 없어 번역은 책을 따른다. 위 핸드백 이야기는 여기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사, “A handbag?”을 언급한 것. http://goo.gl/YQ9Yv [본문으로]
- ‘Gary’, ‘Deb’ - 각각은 피해자 개리와 가해자 데보라의 이름이지만, 상징하는 건 Garrideb이다. [본문으로]
- ‘Surely those should be the other way round?’ - 존에게서 ‘안심할 수 있는’ 기분을, 환경에서 ‘집’을 떠올려야 하는데 거꾸로라는 의미. 존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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