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문제 발생 | Matters Arising



다음날 아침, 셜록은 여느 때와 다른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가볍게 무시해 버렸지만. 명백하게도. 불편하지만 이러다 말 테니까. 그는 쭈욱 기지개를 펴고 두 팔을 접어 머리 뒤로 괴었다. 모든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매우 가볍게 넘어갔던 셈이다.

머릿속에서 - 이상하게도 테너 톤의 따스한, 존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 목소리가 전혀 ‘넘어간’ 게 아니라고 소근거렸지만, 셜록은 그마저도 무시해 버렸다. 지난 밤 그 일… - 머리에 자동으로 떠오른 몇 가지 단어들을 외면하고 ‘표현’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했다 - 이후, 존은 예전 그대로 되돌아올 테고, 두 사람의 평소 생활로도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정말 마음 놓이는 일인 거다. 셜록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딱히 다른 일이 없다면 가서 ‘사라져버린 도둑’ 파일이라도 한번 더 들여다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보다 일상적인 문제들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허드슨 부인에게 플랫메이트를 챙겨주는 것에 대한 일장 훈계를 듣지 않고도 존의 진통제를 사다달라고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라든가, 하는. 존이 일어나려면 좀더 있어야 하는 건 자명하니… 생각이 다시 샛길로 빠져나가려 하는 걸 느끼며 셜록은 끙, 신음했다. 생각 속에서라도 눈을 데굴, 굴릴 수 있으려나? 그런 이미지를 떠올려 봐야 도움이 될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아래층’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심사숙고해보았지만,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평소의 잘 정돈된 정신 상태가 어제 저녁의… 그 경험 덕분에 완전히 망가져버렸으니 말이다. 이 모든 사태를 넘겨버리고 성욕을 휴지 상태로 되돌려놓는 게,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겠지.

셜록은 침대에서 일어서서, 불쑥 솟아버린 그곳을 처리하러 부루퉁하니 화장실로 향했다.





대략 30여분이 지난 후, 그는 샤워 덕에 약간 쌀쌀하다고 느끼며 존에게로 들러보았다. 예상대로 푹 잠들어 있는 그를, 셜록은 잠시 옆에서 지켜보고 섰다. 괜찮은 건지 확인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뭐, 전혀 달라 보이지 않으니 그런 게 분명했다. 실은, 완벽하게 보통 때와 다름 없다고 하는 게 옳겠다. 뚜렷이 이상한 기분이 드는 셜록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는 아무래도 약국에는 직접 다녀오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신선한 바람을 쐬면 머리가 맑아질지도 모른다. 존에게는 늘 그런 것 같았으니까 - 물론, 비워낼 만한 생각 자체가 훨씬 적어서 그런 거기도 하지만.[각주:1] 

그러나 셜록은, 위험 지역을 반도 채 지나기 전에 걸리고 말았다.

“나가는 거니?”

복도 중간에 우뚝 멈춰선 그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허드슨 부인.”

그녀는 미소를 보내왔지만, 예전에 보여주던 미소만큼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존 대신 장 보러 갑니다.”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허드슨 부인은 영 미심쩍은 눈치였다. “정말이니? 존이 어제 장 봐 왔는걸. 나한테 필요한 거 없느냐고 물어봤던 걸 똑똑히 기억한단다.”

그 부분을 배워두기로 하는 셜록이었다. “약국에서 뭐 사다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허드슨 부인?”

부인은 곧바로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내 조리대를 얼룩덜룩 물들여놓는 그 끔찍한 화학물질들은 더이상 안된다, 셜록 홈즈, 약속했잖니!”

“약속하진 않았는걸요, 허드슨 부인, 전 그저…” 셜록은 전략을 바꾸었다. “존 먹일 약이 필요해서요. 그래서 약국에 가려는 겁니다.”

허드슨 부인은 이 플랫메이트다운 헌신에 감동하기보다는, 곧바로 안절부절못하며 존이 어디가 안좋은지, 어떤 약이 필요한지, 얼마나 오래 안좋았던 건지는 물론, 셜록이 뭘 했는지까지 알려 들었다. 존이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총에 맞은 것 뿐이라는 설명같은 건 잘 먹히지 않았다.

“네가 없을 때는 총에 맞는 일도 없었단다,” 그녀는 콕 집어 말했다. “단 한번도 없었어.”

셜록은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냥 문으로 향했다.

“셜록, 네가 돌봐 줄 거지…? 아, 그렇지.” 그녀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앞으로 다가와서 어색하게 팔을 토닥여주었다. “미안하단다, 얘야. 네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냥 그애가… 음, 내가 바랬던 만큼 빨리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여전히 무척 안좋아 보여.”

셜록은 째릿, 흘겨봐 주고는, “뭐, 오늘은 기분 나아진 모습을 보시게 될 거라 장담합니다만.” 전날 밤, 의자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자신을 남겨두고 자기 방으로 휑하니 가버리던 존의 표정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의기양양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하네요.”

허드슨 부인은 그의 말투에 조금 놀란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미소지어보였고, 셜록은 그 틈을 타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그의 시선은 난간에 숨어 있는 한… 눈에 띄는 사람에게로 꽂혔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표정이 희망에서 곧바로 실망으로 바뀐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는 얼굴을 한층 더 구겼다. “왓슨 선생님은 어디 있죠?”

“그러는 너는…?”

“님 친구는 아니네요.”

“그건 알겠네.” 그는 가만히 기다렸지만, 여자는 그저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 위에 아무렇게나 들러붙은 탈색한 짧은 머리, 고집 센 턱. 보아하니 존이 돌봐주던 사람들 중 하나겠군. 그는 하는 수 없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왓슨 선생님은 지금… 몸이 안좋으신데.”

그녀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되었다 -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들고 있던 배낭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말아쥐는 걸 보면, 단순히 존에 대한 걱정만은 아닌 거다.

“그 분, 무슨 일이에요?”

셜록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네가 원하는 걸 이야기해보는 게 어때?”

“당신이 나한테 이야기해보시지 그래요? 그게 당신 ‘전문’ 아니던가요? 누구든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서요.”

셜록의 다른 눈썹까지도 놀라움으로 올라갔다. “그렇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존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초인종은 누르지 않은 걸 보면, 친구나 환자는 아니라는 거지. - 최소한, 돈을 내는 환자는 아니겠네.”

여자는 얼굴을 붉혔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코와 입술 피어싱은 전문가가 해준 거지만, 머리는 직접 염색헸어. 네 옷은 비싼 거지만 꽤나 낡았고 - 노숙자가 된 지 1년 채 안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걸. 성인이 되면서부터일까, 10대 후반처럼 보이니 말야.” 아무리 셜록이라 해도, 보통 반 근은 됨직한 화장품으로 중무장한 여자의 나이를 가늠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 대략 위로, 혹은 아래로 넘겨짚으면 정보가 나오게 마련이니까.

여자는 발끈,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난 스물 두 살이라구요.” 그녀가 몸을 바로 세우자 대략 160cm 정도는 되어보였다. 최소한 그 중 10cm는 부츠겠고.

셜록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저렇게나 다져진 호전적인 태도가 감탄스럽기도 했다. 여자에겐 어딘가 존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키 때문이려나.[각주:2] 

“가방을 들고 있긴 하지만 작은 거야 - 네 소지품들을 모두 담기에는 너무 작지, 그러니 거주지가 있다는 거겠고, 아마도 어딘가 불법으로 살고 있겠군. 아까 비가 왔는데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말라 있는 걸 보면 한시간 넘게 여기 있었다는 건데, 어디 다친 데는 없어보이니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온 거야 - 빗속에 서서 기다려줄 만한 누군가. 나랑 마주칠 위험을 무릅쓸 만한 사람 말이지. 유감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이지만.” 그는 글자가 새겨진 구슬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는 여자의 손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이름, 마이라로군.”

그녀는 셜록을 쏘아보았다. “당신 이름은 셜록 홈즈겠군요, 턱없이 과분한 친구를 두셨고요.”

그는 그대로 가버렸다.

“그분께 빌리가 다쳤다고 전해줘요, 알았죠?” 등 뒤에서 그녀가 한마디 남겼다.

셜록은 멈춰섰고, 그대로 돌아섰다. “내가 봐 줄…”

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안 보려 할 걸요. 여기 오지도 않을 거에요. 왓슨 선생님께 전해줘요, 알았죠? 그분 좀 괜찮아지시면요.” 그녀는 오랫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짧게 끄덕이고는, 가는 어깨에 배낭을 들러메더니 볼썽사나운 신발을 끌고 터벅터벅 사라졌다.

약국으로 향하는 길이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221B로 돌아왔을 때엔, 존은 나가고 없었다.

셜록은 걱정하지 않았다. 존은 괜찮았으니까. 다치긴 했지만, 괜찮았다. 그는 원할 때면 언제 어디라도 갈 수 있는, 다 자란 성인이기도 했다. 걱정할 필요 따위 전혀 없는 거다.

2시간 하고도 27분이 지나 아랫층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도, 셜록은 여전히 걱정같은 건 하지 않고 있었다.[각주:3]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이내 문가에서 존의 발소리가 멈춰섰다. “너 괜찮아?”

셜록은 우연히도 소파에서 뎅굴, 굴러 방을 등지고 누운 참이라[각주:4] 그가 보이진 않았지만, 존의 의료용 가방이 의자에 놓이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네 친구 마이라는 내가 썩 마음에 들진 않는 것 같더라구.”

“아… 그렇지.”

셜록은 어깨 너머로 흘끔, 눈을 돌리며 존이 기대선 쪽까지 늑골이 유연하게 돌아가 줄지 재빨리 가늠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커피 테이블을 훌쩍 넘어 부엌으로 향했다. “환자는 좀 어때?”

“빌리? 괜찮아. 또 손목을 다치긴 했지만, 나을 테니까 - 한동안 얻어맞지 않고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지.”

존이 어색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셜록은 필요한 것들을 재빨리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마이라 일은 미안. 빌리도 - 네가 마주칠지 모를 다른 친구들도 그렇고. 녀석들이 그저 좀… 음, 그애들은 내가 어땠는지 봤으니까, 알지? 네가…” 그는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쨌든, 그 둘에게는 제대로 일러뒀어.”

불쑥, 들이밀어진 몇 개의 알약과 물에, 그는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어쨌든 받아들긴 했지만,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머그를 흘겨보는 품을 보니 어쩐지 모욕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셜록이었다. “어… 고마워.”

존은 알약을 꿀꺽, 삼키고는 머그를 되돌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뒤치다꺼리까지 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었기에 셜록은 그냥 무시하고[각주:5] 제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존은 있어야 할 곳에 컵을 갖다두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씨익, 웃는 그를 보며 셜록은 지난 밤의…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럼, 우리 오늘은 뭐 할 거야?”

해맑게 묻는 존을 바라보며 셜록은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음, 네가 그럴 만한 상태도 아닌 주제에 나돌아다니느라 벌써 반나절이 지났으니…”

“셜록, 나 괜찮아. 음, 알았어, ‘괜찮다’고 할 만큼 괜찮은 건 아니지만, 멀쩡하다니까. 뭐든 껀수만 있으면 뛰어들 만 하다는 건 확실해.” 존은 의욕에 넘쳐 몸을 앞으로 숙였지만, 바로 움찔하고는 물러나 앉았다. “뭐, 거의 뭐든간에.” 그는 유감스럽다는 듯 웃어보였다. “봐, 나 드디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다구, 정말이지 끝내주는 기분이라니까. 뭐라도 하자!”

셜록은 움찔, 놀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존은 키스 한번 했으니 이제 다른 것까지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였나?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을 텐데…

“웹사이트는 확인해 봤어? 나 오는 길에 신문도 사왔어 - 한번쯤 볼 만 할 것 같아서. 아니면 우리, 그냥 나가서 레스트라드 경위님이라도 들볶아 볼까?”

아.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라 아마도 조용할 거라구.” 존은 쉬지 않고 이야기하면서도, “지금까지는 내가 딱히 축하할 만한 기분이 아니었지만, 우린 뭐라도 해도 되겠는걸, 너만 좋다면? 또 파티하는 건 말고.” 재빨리 덧붙인다. “그래도 허드슨 부인이랑 같이 저녁 정도는 먹으러 나가도 되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모닝커피와 늦은 아침식사로 이어지는 수다, 존은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을 모양이라는 게 차츰 명확해져 갔다. 마치 셜록에게 키스하는 것 정도는 전혀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놀라운대단한특별한기억할 만한, 그런 것들 말이다. 셜록은 얼굴을 한껏 구겼다.

두 번 더 삐지고 난 다음에서야[각주:6], 그는 마음을 고쳐먹기에 이르렀다. 존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신도 그러면 되는 거라고. 셜록은 노트북을 끼고 앉아, 그 모든 일들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버리기로 다짐했다.

그는 딱 3분 버텼다.[각주:7] 

“그러니까 남자를 좋아하는 거면, 왜 나한테는 전에 한번도 매력을 느끼지 않았던 거야?”

존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스포츠면이 펼쳐져 있는 - 신문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는 잠시 입만 떡 벌리고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넌 뭐 하나 그냥 넘기질 못하는거지? 질문 한번 시작하면 대충 끝맺는 법도 없고.”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는 게 분명해보이는 셜록을 경계하듯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알았어, 알았다구, 그러니까 - 그랬었어. 5분 정도, 널 알기 전까지 말야. 너도 알잖아,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먼저 딱 잘라 거절해 버렸으니 말야. 뭐, 그럴 리도 없었겠지만. 너만큼 내 타입이 아닌 사람 찾기도 힘들거든.”

신문을 다시 들어올렸지만, 너머로 흘끔 쳐다보는 존이다. “아, 그런 눈 하지 마.”

“무슨 눈? 그냥 내 눈이잖아.”

“아니, 아냐, 아니라구. 게다가 그거, 가짜 눈빛도 아니잖아, 그렇지. 어떤 이유에선지 나, 이제 그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버린 것 같단 말이지.” 그는 휴, 한숨을 내쉬며 신문을 완전히 접어 의자 옆에 내려놓았다.

“이봐, 셜록… 너 정말 매력적인 남자야. 너도 분명 그 정도는 잘 알 테지, 항상 잘 써먹고 있으니 말야.”

셜록은 흥, 코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난 침실에서 명령 받는 거 안 좋아해. 그리고 넌 날 하루 종일 부려먹기만 하잖아, 그러니까. 그쪽 길을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게 꽤나 빨리, 자명해진 거라구. 그리고 우리 친구가 되기도 했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널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

“지금은 그래?”

존은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더니 “모르겠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네가… 죽은 줄 알았던 동안은 아니었어. 네가 돌아오고 난 직후에도 안 그랬고. 하지만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었던 데다, 아이린이 알고 있다는 게 질투나기도 했고, 그냥… 모르겠다.” 그는 두 손을 펼쳐보였다.

셜록은 그 이야기는 밀어두고, 눈에 확 들어오는 정보에만 집중했다. “그럼 왜 여자들하고만 데이트하는 거지? 전적으로 이성애자라고 하기 어려운 사람치고는 너, 꽤나 그럴싸한 인상을 주고 있는걸 - 게다가 게이가 아니라고 보란듯이 선언하지 않고서는 일주일도 못 버티면서.”

“난 게이가 아니거든.”

셜록은 데굴, 눈을 굴렸고, 존은 얼굴을 구기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우린 서로를 분류하는 데 지나치게 열심이라니까 - 모든 사람들을 작고 깔끔한 이름표가 붙은, 작고 깔끔한 상자에 넣어버리는 거지. 현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안 들어가 - 언제나 딱 들어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든가, 넣고 보면 자리가 너무 많이 남는다든가 하게 마련이거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 그래야 하지? 난 다른 사람들처럼 유일무이한걸. 그러니까 난, ‘존’ 모양 상자가 아니면 아예 상자같은 건 안 들어갈라구.”

그는 조금은 후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고쳐앉더니, “어제 네게 너무 들이댔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건 그냥 자기 방어 차원인걸. 네가 독신으로 - 아니면 뭐 너 부르고 싶은 대로, 뭐든지간에 - 남겠다고 한다면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나도 반대 안 하고.” 미묘하게 반쯤 웃어보였다. “각자 나름의 삶이 있는거니까.”[각주:8] 

말투로 보아하니 어딘가에서 따온 대사인 것 같긴 하지만, 셜록은 물어보고 싶은 생각따위 전혀 없었기에 그냥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명령받는’ 문제 때문인 거면… 아! 이해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장에선 여자들 상대로 주도권을 잡기가 좀더 쉬운 거지, 넌 키가 작으니까.”

존은 화난 불독마냥 으릉, 치를 떨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으로 숙여, 다리를 벌리고는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걸쳤다. “너, 잘 들어, 180짜리 정신 나간 인간아. 네가 입에 올릴 만한 세상 어느 누구를 상대로 하든간에 주도권 잡는 것쯤은 문제 없거든, 알겠어? 어젯밤만 해도, 네가 뭐라 반박하는 건 못 들었다구.”

순간 셜록은 자신의 맥박이 확 빨라지는 걸 느꼈지만, 이런 것 따위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존이 아직 이야기하는 중이기도 했고.

“그리고, 알았어. 넌 그냥… 일종의… 모르겠다, 속죄라거나 뭐 그런 차원에서 그랬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는 한 손을 들더니 단호하게 셜록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그런 게 아니거든, 알아듣겠어?”

셜록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화를 삭이는 존이었다.

이야기해도 괜찮겠다 싶을 때쯤, 셜록은 다시 말을 꺼내보았다. “그럼, 내가 여자들만 찾는 ‘다른 이유’가 뭔지 물어봤을 때 말인데, 어째서 그 적극성 문제를 끄집어냈던 거야?”

존은 살짝 움찔했다. “뭐, 너랑 제일 연관된 문제였고, 네가 물어본 거기도 했으니까.”

셜록은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하지만 그런 건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이유는 아니잖아?”

“이봐, 사적인 거라구, 알겠어?”

셜록은 씩, 미소지었다. 점점 그럴싸해지는걸.

“이 문제, 그냥 넘길 생각같은 건 없는 거군, 그렇지?”

“이젠 알아낼 꺼리가 있다는 걸 아는데, 안되지.” 셜록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미안.”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존은, 내심 갈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에 대고 한숨 한번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시선을 맞춰오며, 한마디 한마디 강조하듯 또다시 콕, 집어 삿대질이다. “네 웹사이트에 남자의 성적 취향에 관해서 한 글자라도 올라오기만 해 봐, 너 잘 때 눈썹들 싹 다 밀어버릴 테니까. 알아들었어?”

셜록은 그 위협에 놀란 기색을 애써 감췄다. “물론이지.”

“좋아.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딱히 상관은 안해. 남자든 여자든 나한테는 문제될 게 없거든. 하지만 난 좀 더…” 그는 얼굴을 붉히더니, 벽난로에게 다음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안는’ 걸 선호한다고 해야겠지, 더 좋은 표현이 없네.”

셜록은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니까 누가 실제로 삽입당하느냐에 대해 논의할 일이 적은 경우는…”

“…여자란 거야, 그래.” 이제 존은 해골에게 이야기하려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여자 쪽이 좀 편하지.”

“그럼 이거, 그 적극성 문제와도 연결되는 건가? ‘안는’ 입장이 된다는 게 ‘주도권을 잡는’ 것과 같은 거야?”

“맙소사,  모르겠거든!” 존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더니, 이제는 바닥 깔개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의 관심을 끌으려면 손이라도 흔들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셜록이었다. “난 내 성 정체성에 대해 정신 분석하는 데 시간을 쏟아붓지 않아서 말야. 난 그냥, 뭐든 합의 하에 해볼 거고, 좋아하는 건 하고 그렇지 않은 건 피하는 거야, 알겠어? 그렇게 단순한 거라구.”

“그럼, 삽입하는 파트너가 되는 걸 선호한다는 면을 놓고 봤을 때, 그 근거는 ‘좋아하는 건 한다’는 거야, 아니면 ‘그렇지 않은 건 피한다’는 거야? 네가 삽입당하는 걸 진짜로 싫어하는 건지, 그리고 만약 그런 거라면, 그 가설은 어느 정도 폭넓게 시험해 본 거야? 해 봤어…?”

삽입한다’는 말 좀 그만 할래?” 마침내 존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데, 많이들 쓰는 표현은 안 쓰니까 내가 생각하면 안될… 것까지 연상해버리게 되잖아!”

이번만큼은 셜록도 놀란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존은 몇 차례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됐어, 그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정말이지 ‘네가 신경쓸 일 아닌’ 차원도 한참 넘은 거라구. 맞는 표현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거기까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괜찮잖아, 안그래? 평소대로 돌아가자구. 넌 원래대로 불쾌하게 굴어도 돼, 나름대로 신경써준다는 거 아는걸. 그리고 난 이 ‘끌림’인지 뭔지를 떨쳐낼 거야, 진짜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는 손을 들어 셜록을, 그리고 또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묻는다. “이거… 네가 뭐라 그랬더라? 파트너 관계?”

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더 중요하다는 거지, 알겠어? 적어도 나한테는 말야.”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표정, 진심인 게 분명했다.

“나한테도 그래.”

덧붙이는 셜록의 말에, 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럼, 우린 괜찮은 거네. 이상 없어. 바뀌어야 할 것도 없고.” 안심시키려는 듯한 기색 역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차 마실래?”

셜록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존이 부엌으로 가버리자, 자신도 모르게 목 뒤를 만져보면서.





이어지는 2주 동안은 정말이지 지옥과도 같았다.

잿빛 투성이인 1월의 어느 아침, 셜록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존의 이름을 불러 본 다음에서야 그가 없다는 사실에 놀랄 수 있었던 날들을 그리운 마음으로 되새겨 보았다. 지금은 존이 어디 있는지를 의식하는 게 지극히 상시적인 게 되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게 두뇌 일부분으로 자리잡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다. 셜록은 얼굴을 구기며 생각했다. 아니, 두뇌가 아니다. 그보다는 피부에 더 가깝다고 봐야겠지… 그의 팔 솜털 하나하나부터 목덜미 아래까지 모조리 자력이라도 생겨난 데다 어째서인지 존이 자북의 중심이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보다도 더 자각 없이 살 수 있는 걸까; 셜록의 행동은 스스로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였는데 말이다. 문제의 그 첫번째 날, 서로 그저 스치기만 했는데도 놀라우리만치 강한 반응이 나와버린 이후부터, 그는 일주일 내내 존에게 닿는 것 자체를 피했었다 - 마치 그의 하드드라이브에 드디어 개인 공간이라는 개념을 탑재할 만한 여유 공간이 생겨서, 지금은 갑작스럽게 그러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게다가 그런 쪽으로 느껴질 만한 접촉 자체가 아예 없게끔 대단히 오래 버텨내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얹으려던 손을 떨군다거나, 머그를 잡으려 손을 뻗기 전에 일단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크리스마스 날에는 테이블을 빙빙 돌면서 양 손에는 한가득 뭔가 들고 있도록 신경쓰는 등의 터무니없는 짓까지 했었다. 물론, 존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7일째 되던 날 아침. 셜록은 자위에 의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구적인 손상을 입게 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계획 A, 그러니까 가칭 ‘회피’ 전략은 완전 멸망이라는 게 분명해진 거다. 계획 B 역시 딱히 더 나은 성과를 얻어내진 못했다. 셜록은 모로 돌아누우며, 온 짜증을 실어 베개를 한 방 내리쳤다.

전처럼 행동해야겠다고 처음 다짐했을 때, 그는 블로그 포스팅이라도 놀려 줄 셈으로 존의 어깨 너머로 몸을 숙였었다. 그러자 존이 고개를 돌렸고, 불현듯 그의 입술에서 몇 밀리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셜록은 화면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고, 결국은 - 존의 글 어디에나 적용될 법한 - 두리뭉실한 일반적 문법 위주의 구박 정도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셜록은 그 기억에 얼굴을 한껏 구기며, 무릎을 세워 앉은 채로 닫힌 침실 문을 멍하니 응시했다. 평소대로 되돌아가려던 다른 시도들 역시 실패했다는 사실이 민망하기만 했다. 눈을 감아 보았다. 뭐가 문제인 걸까?

그가 이런 감정들을 지워버린 건 십년도 더 지난 일이었고, 결코 이런 느낌도 아니었다. 심지어 전환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나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 섹스란 건 시간과 정력 낭비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결론지었었고, 그 이후로는 효율적이게도 거의 없다시피 한 성욕이 표면적으로 가끔 일렁이는 정도였을 뿐, 그보다 강했던 적도 없었단 말이다. 지금까지는. 존이라는 사람 이전까지는. 그 빌어먹을 키스 전까지는. 그의 마음 깊숙이 들어와, 이제껏 느껴봤던 성적인 느낌들을 - 깊이 묻어두었던 그 햇수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난 그 하나 하나를 - 모두 다 샅샅이 잡아내고 밖으로 끄집어 내어버린 것 같은 그놈의 키스 말이다.

그는 다시 바로 누워, 욕구 불만으로 절박해질 지경임을 느끼며 한 팔을 눈 위에 얹었다. 답이 있어야만 했다. 달랑 한 번의 키스에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흔들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리 노련하다 해도, 이제껏 알아왔던 모습 아래 숨겨진 - 완전히 새로운 존을 발견한다는 게 아무리 매혹적인 일이라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 매혹이라는 것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 거였다 - 그 당시만 해도, 그의 두뇌는 기꺼이 한 발짝 물러나서, 존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그 순간에는 그저 몸을 맡기는 상황 자체를 만끽하는 듯 했고, 거의 쉴새없이 웅웅, 시끄럽기만 하던 머릿속도 평화롭게 조용해졌었다.

하지만, 존은 받아간 만큼 주기도 했다. 처음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잦아들고 ‘평소대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했을 때, 셜록은 점점 알게 되었다. 시각을 총 동원하여 관찰했던 것보다도, 눈을 감고 있었을 때 더 많은 걸 보게 되었다는 걸.

몇 달 전, 바츠의 옥상 위에 섰을 때 셜록은 스스로 뭘 하는지 알고 있었다. 존이 깊이 상처받을 거라는 것도, 스스로 짜둔 일들을 다 마치고 살아남는다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것도 이해했었다. 하지만, 반대 상황이었을 때의 자신만큼 존이 괴로워하리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렇게나 많은 친구들이 있는 존이기에, 존이 자신에게 그러하듯 그에게도 자신이 그 정도로 중요하리라고는 전혀 믿지 못했던 거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 자체가 있으리라고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의심할 수도 없었다.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모두 다. 전부. 모든 상실감, 사랑, 분노… 그 모든 게 있었고, 그 모든 게 존에게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의구심도 망설임도 없이, 자제하지도, 숨기지도 않은 채로 셜록에게 쏟아져 들어왔던 거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셜록은 그 사실을 지워버리지 않을 거였다.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렇게나 분명하게,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도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셜록이 그 모든 걸 망쳐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렇겠다. 존이 - 셜록이 보기엔 습관처럼 감정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모든 걸 거리낌없이 보여주는 그 존이 - 완벽하리만치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끌렸다는 걸 시인하긴 했지만, 우정이 가장 중요하다며 곧바로 접어버렸던 거다. 그건 그랬다. 확실히 그랬다. 그렇기에 그 우정을 망치기라도 한다면, 셜록은 스스로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거였다. 이대로 가면 그리 될 것이 불보듯 뻔했다. 이 플랫메이트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다는 걸 존이 눈치채기 전이라 해도, 그저 일상적인 접촉 한번만으로도 그대로 굳어버리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는 반대로 돌아누워 베개를 한방 더 내려쳤다. 이번에도 분풀이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구미 당기는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급 범죄자들이 언제부터 ‘모두에게 호의’를 갖는 데 관심을 가졌더란 말인가? 대체 그놈들은 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위장 자살 같은 거 말고 진짜 끝내주는 삼중 살인 사건 하나 없을까 전전긍긍하며 셜록이 여기서 썩고 있는 동안, 다들 젠장맞을 바하마에서 선탠이라도 하고 있나?

물론, 그가 쌓아둔 전문가로서의 성과가 이 문제로 손상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는 절망적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정신 노동에는 일말의 도움도 안 될 게 뻔한, 이상한 쪽으로만 혈액이 계속 몰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들은 그때 그 키스하던 상황으로 이어졌다.

여느 때같으면 존이 목 뒷덜미를 공략하던 그 순간 스스로의 반응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겠지만, 이미 어느 정도의 동요를 겪고 있던 참이었기에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쩌면 두뇌에의 혈류량 변화가 피부 민감도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셜록은 나중에 이 가설을 시험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각주:9] 

이 상태를 억제해야만 했다. 그저 한 번의 키스였단 말이다. 맙소사, 제안해 놓고도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존에게 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내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정신에는 전혀 영향 없다고,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하지만 어떻게 알았겠는가? 지금은 존이 받아들였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이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인걸. 고작 키스 한 번에 이렇게까지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데, 섹스라도 했다면 도대체 어찌 되었을까?

셜록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전혀 도움 안 되는 화제였군. 생각을 되돌려보려 했지만 너무 늦은 게 분명했다. 육신에 대한 분노와 함께, 그에 휩쓸리고 마는 나약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는 마지못해 잠옷 바지 허리춤 아래로 손을 밀어넣었다. 닿는 순간 전율을 느꼈지만,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 짓, 정말 또다시 하고 마는 건가? 이레 중에 엿새라니. 분명 이제껏 최고로 불편한 건 물론이거니와, 최단기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새해 결심인 셈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답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셜록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격전이 시작되었다.

생각을 비운다거나 다른 걸 생각하려 노력했던 거였나? 존이, 그리고 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키스 말고 다른 걸…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처음 흘러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애써 참아보며… 그나마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방법이었지만, 그러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나? 게다가 정말 솔직히 생각해 보면, 마지막 몇 초간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해버리기도 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패배를 시인하고 체념해버렸던 걸까? 존이 깨물기 직전까지를 마음 속으로 계속 되새겨 떠올리면서… 본능적으로 목을 숙이고 만다… 며칠간 아침마다 절정에 다다르게 했던, 그 키스를…

결코 답할 수 없을 거였다. 셜록은 다른 손까지 쓰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얼굴을 구겼다. 대체 그런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거지? 휴, 한숨이 나왔다. 위에서 보여질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로 했다. 숨기려 하는, 수치스러워하는 기색 역력할 - 문 쪽에서 등을 돌린 채로 이불을 덮고 누운 자신의 모습을… 이 순간 존이 들어와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맥박이 빨라지며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혼란스러워진 셜록은 그대로 멈췄다. 하지만 손가락 아래 움찔거리는 걸 느끼고는 의아해하면서도 다시 움직여 나갔다.

머릿속에서, 문이 열리고… 너무 커져버린 숨소리, 입술을 깨물었다. 셜록은 내심 크게 동요했지만 - 이런 일은 없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 그러면서도 이미 바로 눕고 있었다. 곧바로 자신의 위로 올라오는 상상 속의 존, 얼굴에 싫은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역겨워하거나, 나무라는 표정도 아니었다. 상상 속의 존은, 순식간에 그의 옷을 벗겨냈다.

셜록은 이불을 걷어차 버렸다. 이제 왼손은 존을 따라 잠옷을 내리고 스스로의 몸을 드러내 보였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손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직면할 수 있도록. 그는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맙소사, 짐승같지 않은가 - 저 잘난 두뇌의 값어치는, 지금 얼마나 될까? ‘아냐…’ 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런 거 아냐… 그저 네 일부분일 뿐인걸.’ 셜록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존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손 줘봐.’

방 안에는 흐느끼는 신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셜록은 무릎을 굽혀 바지에서 다리를 빼내고는, 침대 위에 발을 올려 몸을 지탱했다. 존의 손길은,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가슴에서 멈췄고… 다리 근육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고, 온 몸이 떨려왔다… 이내 더 아래로 내려가, 까시시 돋아오른 살갗을 스치고 떨리는 복부를 지나 곱슬거리는 체모, 점점 더 긴장하고 있는 - 셜록의 손이 익숙해져버린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 그곳으로 향했다.

존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감싸고… 휘감으며… 어루만지고… 애태우면서. 시트에 맞닿은 발끝마저 움찔거렸다. 그는 발꿈치에 힘을 주어 버텼지만, 헐떡거리느라 입이 벌어지고 고개도 옆으로 젖혀지고 만다. 마음 속에서 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가까이 붙어서 있던 그 순간들, 서로 마주보고, 존이 그를 바라보면서… 셜록의 머릿속에서는 둘이 서로 묶인 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서 있던 그 순간의 장면이 펼쳐졌다. 도망칠 데라고는 없었지만, 이 환상에서는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존의 손이 창살 사이로, 그의 옷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지만 셜록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네 손가락을 빨아봐.’

아아… 한참이 지나고서야 셜록은 손을 올려, 가운데 손가락을 입에 넣어 한껏 물었다가 빼냈다. 상상 속의 존은 머뭇거리지 않았고, 셜록은 침대 위에서 몸을 활처럼 휘었다. ‘아, 세상에, 아아… 존! 뭐 하는 거야?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난 뭐…’ 

‘아무 문제 없어.’ 존의 목소리가 그를 안심시켰다.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목소리가 한층 더 낮게 깔린다. ‘더 빨리.’ 

손은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지만, 셜록은 고개를 저었다. ‘못해, 난…’ 

‘할 수 있어. 그럴 거고.’ 

그는 이제 떨고 있었다. 존이 부엌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별거 아닌 일로 화난 척 하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하기만 했다.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선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허벅지 중간 쯤에 걸려 있던 바지는, 이런다고 해서 약점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맹세와 나직한 격려의 속삭임과 함께 존이 완전히 벗겨버렸다. 자신을 붙들어 주는 든든한 손을, 안쪽으로 들어와 열어주는 손가락을 느끼고, 이어지는 쾌감까지도 알 수 있었다.

이제껏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커져가는 쾌감.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허벅지의 근육을 긴장하게, 침대에서 엉덩이까지도 들어올리게 만드는 쾌감. 숨결을 거칠게, 애타게 만들어버리는 쾌감… 방 안의 공기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대로는 의식마저 놓쳐버리고 말 거다, 이대로라면… 그는…

‘놓아버려.’ 

곧바로 이어진 울음과도 같은 신음 소리. 그 소리에도 깨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는 건, 그가 이제껏 풀어봤던 것 중에서도 최고에 필적할 만한 수수께끼였다.



  • 원문: Given In Evidence - 6. Matters Arising 
  • 역자 주석: 초딩 셜록과 남자 셜록 사이, 아슬아슬 줄타기.


  • 5. 입증 책임 | The Burden of Proof  [ 목록 ]  7. 사라져버린 도둑 | The Vanishing Thieves




    1. …지못미 존…orz [본문으로]
    2. …지못미 존… orz orz [본문으로]
    3. …야; [본문으로]
    4. …야;; [본문으로]
    5. …야;;; [본문으로]
    6. …야;;;; [본문으로]
    7. …이녀석;; [본문으로]
    8. “We're all individuals.” - ‘Life of Brian’의 대사. 의미는 살리되 편한 표현으로 옮긴다. [본문으로]
    9. 그럴리가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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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PasserbyNo3 :